조지 블레이크 (George Blake, 1922.11.11.~2020.12.26.)는 영국 외교관 출신으로 소련의 이중간첩이었다. 영국에서의 본명은 조지 비하르(George Behar)였고, 소련 국가보안위원회 소속으로 계급은 대령(폴코브니크)이다. [편집자]

작년 성탄절 직후 98세의 나이로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죽음의 소식은 유럽과 미국, 러시아 심지어는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매체가 그의 부고 소식을 전했다. 나도 당시 그의 부고를 듣긴 했지만, 나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로 여기고 지나가고 말았다. 다만 그가 한국전쟁 중 포로였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그러다 며칠 전 그의 전기를 쓴 사이먼 쿠퍼(Simon Kuper)가 나오는 팟캐스트(The Happy Traitor: Spies, Lies and Exile in Russia)를 우연히 듣는 중에 무척 흥미로운 얘기가 나와 그의 삶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고 BBC가 만든 기록영화 스토리빌(Storyville)을 유튜브에서 찾아서 보았다.

▲한국전쟁 당시 블레이크(왼쪽)와 90대 나이의 블레이크(오른쪽)
▲한국전쟁 당시 블레이크(왼쪽)와 90대 나이의 블레이크(오른쪽)

그는 이집트-유대인 아버지와 네델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네 자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차대전 중 영국군으로 참전하여 공훈을 세워 영국 시민권을 받았고 아들을 낳자 당시 영국 왕이었던 조지(George) 5세를 따라 조지(George)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직장으로 인해 다른 도시에서 살았기에 어린 시절에는 독실한 개신교이었던 어머니를 따라 신앙에 열심을 내었고, 한때 목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전기 작가 시몬(Simon)은 그를 독실한 칼빈주의자(Calvinist)라고 부른다.

14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사업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죽음을 맞이한다. 생활에 어려움을 겪은 어머니는 그를 이집트의 부자인 여동생에게 보내 교육을 받게 하였는데, 거기서 영국인 학교를 다니다가 영국 대학에서 러시아과에서 공부를 하다 이차세계 대전이 시작하자 집으로 돌아온다. 전쟁 시작과 함께 독일에 점령을 당하고 그는 체포를 당했지만, 어린 나이로 인해 풀려나와, 약 2년간 레지스땅스 연락임무를 맡는다. 이후 탈출을 하여 이미 영국으로 피신한 가족과 재회를 한다. 스무 살이 되어 영국 해군에 지원을 하고 이어 007 제임스본드로 유명한 영국정보국 MI6에 비밀첩보요원으로 포섭되어 러시아어 전문가가 된다.

1948년 11월 그는 대한민국 영국대사관 부영사란 직함을 갖고 서울에 온다. 그때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의 중국과 소련에 대한 정보수집이었다. 블라디보스톡이 주요 활동무대였다. 당시 그의 상관은 그에게 임무를 맡기면서 이렇게 말한다. “한반도에서 곧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자 그는 포로의 경험이 있었던지라 전쟁발발의 위험이 있는 지역에 가지 않겠다고 말하자, 그의 상관은 “염려 말라. 영국은 남한과 북조선 어느 쪽에서 속하지 않는 중립국이다. 설사 체포를 당한다 해도 외교관의 신분으로 곧 석방될 것이다.”라고 안심을 시킨다. 사실 당시 영국은 대영제국으로서의 위신을 지니고 있었기에 새롭게 제국으로 등장한 소련과 미국과는 거의 동등한 위치에 있었고, 이 두 나라의 중재자 역할을 담당했다. 이념적으로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이론의 발상지로서 미국식 자본주의와 소련식 공산주의 모두를 적절히 수렴하고 있었다.

그가 파송을 받았던 1948년 11월은 한국전쟁 발발 거의 1년 7개월 전이다. 그런데 이 당시 영국은 이미 미소간의 전쟁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이차대전은 끝났지만, 미소의 군수공장들은 멈추지 않아, 포탄이 차고 넘쳤으며 당장의 소비처가 필요했다. 억지로 나눠놓은 남과 북은 이미 미소의 대리국가의 성격을 띠었기에 미소냉전의 시대에 평화적 방식으로의 통일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중립국이 가장 현실가능성이 있는 얘기였지만, 그렇게 되면 일본이 위험하게 되면서 미국은 태평양에 대한 지배권을 잃게 될 것이 뻔했기에 남한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게다가 북한(조선)은 소련군이 퇴각하면서 물려받은 무기가 있었고, 모택동의 중국 통일투쟁에 참여하여 승리를 경험했다. 이러한 엄중한 상황에서 미국은 500여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겨둔 채 소련과는 달리 무기를 모두 철수시켰다. 여기서 물음이 생긴다. 북한(조선)이 전쟁준비를 끝낸 상황에서 한반도를 포기할 의도가 없었다면 군사고문단만 남겨두는 저의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1950년 1월 한반도는 미국의 태평양방어선에서 제외되었다는 애치슨선언이 의도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한국전쟁은 미국의 유인정책이었다는 주장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로 나는 지금 블레이크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대사관과 달리 영국대사관 직원들은 정부의 훈령에 따라 피신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중립국으로 남을 것이기에 외교관으로서 체포의 위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은 미국의 요청에 따라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함으로 그는 자동으로 전쟁포로가 되어 평양을 거쳐 압록강 근처에까지 끌려다니면서 3년동안 엄청난 고생을 한다. 그는 포로생활 중 러시아어로 된 칼 막스의 자본론을 두 번 읽게 된다. 그는 이미 청소년 시절 이집트에서 이모집에 3년을 머문 적이 있는데, 그때 열 살 위의 사촌형(Henri Curiel)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데, 그는 후에 이집트 공산주의 운동에 지도자로 성장하고 파리에서 암살을 당했다. 블레이크에게 있어 사유재산이 없이 공동체가 함께 살아가는 공산주의의 이론은 독실한 칼빈주의자였던 그에게는 생소한 주장이 아니었다.

▲조지 블레이크 (왼쪽)가 북한(조선)에서 영국으로가는 베를린 공항에서
▲조지 블레이크 (왼쪽)가 북한(조선)에서 영국으로가는 베를린 공항에서

휴전협정이 진행되는 포로생활 중 그는 북쪽의 아주 작은 농촌 마을에 피신해 있었는데, 당시의 젊은 사람들은 모두 전쟁터에 나가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미 공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인해 여성과 어린이와 노인들이 무참히 피 흘리며 죽어가는 처참한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잘못된 진영에 속해 있음을 깨닫고 공산주의가 인류를 위해 보다 나은 제도라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비밀리 소련 정보장교를 접촉하여 후에 영국으로 돌아가면 소련을 위해 일하겠다고 자원을 한다. 그리곤 석방이 되기까지 다른 동료들과 똑같이 매우 힘든 과정을 겪다가 휴전협정 서명과 함께 영국으로 금의환향한다. 그리고는 다시금 영국정보국 MI6요원으로 베를린에 파견을 받아 소련의 관료들을 이중간첩으로 포섭하는 역할을 부여받는다. 이중간첩이 이중간첩을 포섭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정보국의 타자수들이 점심을 먹기 위해 자리를 비우는 사이에 비밀문서들을 사진으로 찍어 소련정보원에게 넘긴다. 무려 9년간을 들키지 않고 이 일을 계속하면서 본인의 말로는 500명 가까운 정보원들의 신상이 노출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블레이크는 정보를 넘기면서 결코 정보원들의 죽임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한다. 그러나 후에 밝혀진 바로는 그의 정보로 인해 몇 명은 희생되었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소련정보국은 블레이크를 매우 중요한 정보원으로 여겨 그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갖가지 노력을 하였다. 심지어는 영국에서 땅굴을 파서 소련군의 전화를 도청한다는 정보를 받고도 1년 간 이를 모른 채 하면서 역공작을 하였다. 그러다 폴란드의 이중간첩의 신고로 그의 신분이 폭로되어 국가반역죄로 재판을 받고 42년 실형을 언도받는다. 이 42년의 언도는 종신형을 빼고 영국 재판부가 내린 최장의 형기였다. 재판과정에서 드러난 이중간첩으로서의 역할과 영국은 물론 서구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5년간의 감옥 생활을 하던 중 만난 세 명의 동료(이 중 두 명은 반핵활동을 하다 6개월의 징역형 언도를 받은 사람들이었다)들의 도움을 받아 감옥을 탈출하게 된다. 이들이 그의 탈옥을 도운 이유는 블레이크의 순수한 인간성에 반했던 것이다. 얼마간 이들의 도움으로 여러 집을 전전하며 피신생활을 하다 동료 한 부부가 캠핑용차 요즘 말로 하면 봉고차 크기의 차를 타고 동독으로 탈출을 하게 된다. 검문을 피해 가는 방식은 뒷좌석 아래에 몸을 숨기고, 그 위에는 어린 자녀 둘이 잠을 자는 방식이었다.

동독을 거쳐 소련으로 넘어갔고 정부의 보호 아래 두 번째 결혼을 하고 정착을 한다. 한때 소련연합이 붕괴되면서 러시아정부에 의해 영국으로 추방될 위험을 맞기도 했다. 이후 푸틴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1990년 68세에 “No Other Choice(다른 선택은 없다)”라는 자서전을 출판하였고, 그의 탈옥은 영국에서 연극으로도 공연이 되었고 유명 감독 히치콕 또한 영화 제작을 기획하였지만,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중단되고 말았다. 블레이크는 90세가 넘어 캐나다 방송과 영국 BBC방송과 인터뷰를 하였다.

그는 자신이 영국 정부를 반역했다는 국가반역죄에 동의하지 않는다. 주장하기를 “자신이 한 번도 속했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 나라인데 어떻게 반역죄가 성립이 되는가?” 보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탈옥을 도운 이 세 명 중 어느 누구도 실형을 살지 않았다. 그들의 무죄 주장은 42년간의 언도가 너무 비인간적이었다는 주장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상상조차 힘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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