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인동 에세이] ‘백세 인생’ 이라니 ‘세월이야 가보라지’

북에서는 “륙십 청춘, 구십 환갑”이라는 시대어가 생겼다고 한다. 처음 듣는 얘기다.
2018년 11월 18일, “한국에서는 아직도 보통나이를 쓰다 보니 내일이 형 팔순입니다. 가족들이랑 좋은 시간 갖기 바랍니다”라는 서울 동생의 편지에, “팔순? 아냐! 난 미국식으로 79세, 칠십대야”라고 답장을 보내고 보니, ‘아~ 내게도 때가 온 모양인가’ 했다. 그래도 팔순은 안돼! 남에서 인기 있다는 노래 「백세 인생」에도 70대엔 “할 일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래, 난 아직도 1년 열두 달이나 남은 70대야! 혼자 되뇌어 보았다.

그러고 보니 4년 전, 우리겨레의 전통 설날에 로스앤젤레스의 [진보의 벗] 이용식 회장과 회원들이 “미주 한인사회와 한반도가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길에 헌신해 오신데 감사드린다”며 나에게 <늘 푸른 청년상>을 안겨주고 세배를 했다. 돌이켜보니 내 청춘은 이미 그때부터 저물기 시작했나 보다. 그래서 나 더 늙지 못하게 ‘청년상패’를 안겨준 모양이다.

▲ 2015년 전통 설날, 미국 LA ‘진보의 벗’ 이용식 회장이 내게 ‘늘 푸른 청년상’을 안겨 줬다.
▲ 2015년 전통 설날, 미국 LA ‘진보의 벗’ 이용식 회장이 내게 ‘늘 푸른 청년상’을 안겨 줬다.

1970년 말, 미국에 와서 정형외과 수련을 마치고 귀국해 후배들을 가르친다는 생각으로 이 땅에 왔다. 그랬다면 오늘은 누이들과 동생네 가족들일랑 함께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만 멀리 떨어져 살아온 지 49년이다. 그동안 때마다 모국엘 들락거렸지만 맏아들로서 아버님의 임종도 놓치고 허겁지겁 장례식에나 겨우 참여하면서 지내온 날들이 가슴 아프게 되살아 왔다. 내 딴엔 뭐가 그리 좀 잘나서…. 인공고관절 강연과 수술로, 세계 여러 나라 여행들로 바쁘다며 모국의 형제자매들과 멀리 떨어져 살아온 날들이 새삼 부끄러웠다.

그러면서도 다음날 해가 뜨면 어제 그랬듯이 또 하루가 되풀이되어 온 날들이었다. 미국서 낳고 자라 멀리 떨어져 사는 아들과 딸이 ‘생일에 뭘 받고 싶으냐’ 물어왔다. 언뜻 떠오른 게 내가 회원인 한국의사수필가협회 수필집 <버리고 갈 것들만 남아>였다. ‘아무것도 필요없다’ 했다. 그런데 생일 전날 배달된 소포에서 현란한 색과 무늬의 양말들이 쏟아졌다. 내 청춘이 되살아온 듯 눈을 즐겁게 했고, 두꺼운 양말은 산행 때 신고 다닐 좋은 선물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생일 축하드립니다”라는 뉴욕의 유엔 조선대사관 리 참사관의 이메일이 와 있었다. 이때다 하고 ‘북에서도 만 79세가 되면 팔순이라 하느냐?’ 물었더니, “옛 조선식으로는 오늘 팔순 잔치를 합니다”라는 대답이었다. 실망이었다! “그런데 공화국에서는 ‘륙십 청춘, 구십 환갑’이라는 시대어가 태어났습니다. 요즘엔 백세시대에 들어섰는데 박사님 구십 환갑에 술을 부어 올리는 기회를 갖고 싶습니다”고 답해왔다. 왔구나, 배뱅이가 왔어! 난 아직 한참 멀었어. 게다가 그가 한마디 더 하는 것이 “항상 청춘의 정열로 통일애국운동에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건강하시고 생신 축배 부어 올립니다. 경의. 뉴욕에서 리기호 올림.”

그래서, “축배 잘 들었어요. 분단 70여 년이지만 북에서도 우리 조상들의 예지에 따라 팔순 잔치를 한다는 얘기가 반갑네요. 특히 새 ‘시대어’를 언어학 박사 리 참사관으로부터 알게 되었으니 남녘에도 전파시켜야겠습니다”고 답해 보냈다.

▲ 2015년 정월 초하루, ‘청년상 패’ 안겨주고 세배하는 ‘진보의 벗’ 회원들.
▲ 2015년 정월 초하루, ‘청년상 패’ 안겨주고 세배하는 ‘진보의 벗’ 회원들.

1992년, 재미한인의사회장의 학술교류단 참여권유가 있어 평양에서 인공엉덩이관절수술 강연을 하고 내가 고안한 인공관절기와 수술교재들을 기증했다. 처음으로 북을 체험하며 분단문제에 눈뜨게 되었다. 1995년, 엉덩이관절염으로 고통받는 김대중 야당 총재의 인공관절수술 상담의뢰를 받고 서울에서 진단하고 수술을 결정했다. 정계의 여러 일들로 연기되다가 선거가 다가오며 수술은 취소되었다. 그즈음 로스앤젤레스의 통일운동 선배 이활웅, 문갑용, 은호기, 조재길 등과 작성한 「남·북 지도자에 드리는 통일정책건의서」를 1998년 1월, 서울서 임동원 총장을 만나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에게, 다음날 평양에서 통일전선부 최승철, 신병철 국장을 만나 김정일 총비서에 전했다. 그리고 6년 전 평양에서 만났던 보건성 최창식 부부장이 평양의학대학병원 수술방문을 요청해 왔다.

점심때, “오 박사님, 80돌 생신을 축하합니다. 박사님 년세가 80이라는 얘기에 놀랐습니다. 쓰시는 글들을 보면 아직도 정열에 넘쳐 있습니다. 계속 후배들을 위해 좋은 말, 좋은 글 많이 해주시고 써주시기 바랍니다. 더욱 건강하시기를 바라며. 박성일 드림.”

2008년, 뉴욕서 만난 뒤 평양의대병원 수술여행을 주선해준 현재 박 부대사였다. 에이! 난 79세인데 남에서도 북에서도 80세라니, 내가 손 들어야 하나? “오늘 저녁엔 북에서 만났던 인연들과 대사관 여러분과 남녘 노래 「백세인생」을 들어보며 피로를 풀어보자구요”라고 답해 보냈다.
「백세 인생」 듣기

이명박 정부에서 남북왕래가 끊어지자 6.15해외측위원들은 미국 국무부와 상·하원 외교위원회를 방문해 Korea통일문제 토론을 해왔다. 한편 뉴욕 유엔조선대사관도 방문해 신선호 대사, 박성일 참사관과 북남관계 개선 논의까지 하다 보니 1990년대 평양의대 선생들이 원했던 수술을 돕지 못한 미안함이 되살아 왔다. 하여 2009년부터 매해 평양의대병원에서 인공엉덩이·무릎관절수술을 도우며 해외동포위원회 김관기 국장, 박철 위원과 통일문제 논의도 했다. 6.15북측위 리창덕, 김성혜, 양철식 부위원장들과, 뉴욕서 리동일 부대사와도 대화를 나눴다. 평양에서 통일전선부 맹경일 부부장, 김천희 국장과 2013년 내 책 [밖에서 그려보는 통일의 꿈-남북연합방]을 놓고 북핵을 ‘겨레핵’으로 남북이 품어안아야 한다는 내 제언에 대한 논의도 했다.

그런데 오후에 또, “안녕하십니까? 보내주신 전자우편들을 반갑게 보고 남쪽에도 ‘60 청춘, 90 환갑’의 노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조국에서 널리 류행되는 노래 「세월이야 가보라지」를 들어보십시오. 흥이 나고 젊음이 약동할 것입니다. 경의. 김성 ”
「세월이야 가보라지」 듣기

2010년대 전반 유엔 조선대사관 참사관 시절 교신하며 지냈던 그가 대표 대사로 부임해와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다. 그래, 북 노래도 들어보자. 그래야 북·남·해외동포들이 남과 북의 노래를 함께 번갈아 부르게 될 것 아닌가? 나는 “제목부터 야속하게 쉬임도 없이 흘러가는 세월을 거부하며 도전하는 노랫말이 마음에 드네요. ‘황혼기도 청춘이니 세월이야 가보라지, 우리 마음 늙을소냐, 구십 환갑 노래하니, 세월이야 가보라지, ….’ 아암, 그렇고 말고, 난 이제부터 90 환갑날까지 계속 뛸 거야! 이 노래에 내 청춘이 되살아 왔네요. 난 아직 8순도 아냐요. 고마워요. 인동”

70여 년 분단에도 남과 북은 조상들의 고귀한 정서와 전통을 그대로 지니고 있음을 남의 노래 「백세 인생」과 북의 「세월이야 가보라지」에서도 확인하고 있지 않은가? 2018년 새해, 북이 핵·미사일무력의 완성을 선언한 뒤 4.27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을 시작으로 분단 이래 처음인 6.12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도 했고, 이어 통일의 길을 다지는 9.19평양북남공동선언을 내놨다. 북·남의 정상이 겨레의 성산 백두에 올라 맞잡은 두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새해에는 남의 국민과 북의 인민들이 두 노래를 서로 바꿔 불러가며 ‘우리민족끼리’ 자주통일의 길로 힘차게 달려나가자! 남·북·해외동포들, 우리는 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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