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기 빈민스토리(9)
1. 실종 과정, 사태의 진상은 무엇인가?
우리는 곧바로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대책위'를 구성하게 된다. 수많은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인천과 서울에서는 번갈아 집회가 열린다. 그리고 기자회견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잠정적인 결론을 발표하게 된다.
이석근에 따르면 이덕인은 11월 25일 공권력의 대대적인 싸움이 끝나고 함께 농성 중인 사람들과 향후 방안에 대해 논의를 한다. 날씨는 추웠고 식량이 부족했으며 고령인 사람과 장애인이 있었기에 추위에 맞서 견디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이덕인은 구속되면 준비하고 있던 국가공무원 시험의 응시자격 조건에서 탈락할 것이 우려되었다. 회의 끝에 고립된 망루의 상황을 외부에 알리고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경찰의 감시와 포위망을 뚫을 결심을 하고 8시 45분경에 마침내 몇 사람과 실행에 옮긴다.
망루 주변은 위 농성자를 연행하기 위해 약 200여 명의 경찰과 백골단이 해안초소 주변에 있었고, 군도 대민 마찰을 우려한 군상부의 지시로 재투입되었다. 이석근과 망루 뒤쪽으로 몸을 숨기고 지상까지 내려온 후 500미터쯤 떨어진 해변과 도로 사이로 뚫린 어통소(경운기 통로)를 통해 포위망을 뚫고 서서히 이동하였다. 이때 이덕인을 뒤따라오던 이들은 경찰에 발각되어 급히 다시 망루 위로 되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되돌아올 수 없는 상황이었던 이덕인은 바닷가 축대를 따라 천천히 이동하며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서서히 사라졌다.
11월 26일 늦은 시간 애가 타던 가족과 노점상은 망루 위 농성자에게 먹을 것과 약품 등 보급품 전달을 위해 인천대학교에서 회의를 가졌다. 회의에서 5명의 팀을 짜서 해변가 어통소 철조망 절단하고 물품을 나누어 반입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날 회의에서는 물품 반입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 경찰의 눈길을 돌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망루 맞은편 주차장에서 노점상들이 집회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11월 27일 새벽 한쪽에서는 구호를 외치며 집회를 개최하였다. 그때 몇 사람이 보급품을 전달하고자 망루 쪽으로 이동하였다. 바다로 통하는 어통소의 수문을 열려고 박원식(남)이 먼저 들어가 수문 절단 작업을 시도했으나, 이미 문이 열려 있었다. 이때 박원식은 예감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면 이곳은 평소 굳게 문이 잠겨 있는 곳이고, 망루에서 농성 중인 상태라 경계가 심했을 텐데 문이 열려 있다는 것이 의문이 들었다는 것이다. 다행히 보급품 전달은 윤관모(남)와 이창호(남)에 의하여 망루 위에서 불침번 근무를 교대하려던 이안중(남), 이정수(남)에게 안전하게 전달되었다. 물품이 밧줄에 의해 망루 위로 올라가려 하자 경찰과 용역으로 보이는 사람이 접근하였다. 이들은 온 힘을 다해 도망쳐 나왔다. 이때 방파제 밑 돌길에서 이상한 물체가 눈에 띄었다. 시신으로 보이는 물체였다. 물품을 전달한 후 함께 간 이창호(남)는 윗옷이 벗겨져 엎어져 있는 사람의 시신을 확인하고 재빨리 그곳을 빠져나왔다. 이덕인의 시신을 처음으로 발견한 것이다.
시신의 발견 시점이 2003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를 통하여 1995년 11월 28일 오전 10시 50분경으로 되어 있으나, 이미 전날 농성자에게 보급품을 전달하고자 했던 사람에게 먼저 발견이 되었다. 망루로 되돌아온 이들은 "시신을 보았다"는 사실을 말하였다. 망루 맞은 편에서 항의 집회를 하던 노점상은 망루 위에서 담배를 피우던 노점상을 본 후 물품 보급이 성공하였다는 것을 알고 집회를 마쳤다. 오후 6시 연행된 노점상 황재은(남)에게 경찰은 수사 과정에서 주동자인 "장애인 털보는 어디에 갔는지 안다"는 등 이덕인의 행방에 대하여 경찰이 알고 있는 듯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11월 28일 오전 10시경 농성자 중 이석근이 망루에서 어통소 쪽 50m 거리로부터 떨어져 있는 바닷가에 시신을 발견하고 경찰에 이 사실을 통보하였다. 함께 농성 중이던 김선모(남)가 시신발견 지점까지 내려갔다. 시신은 분명 이덕인이었다. 상의와 신발이 벗겨진 채 물속에 엎어져 있었으며, 뒷모습은 죄수를 호송할 때 양 손목과 양팔을 함께 묶는 방법으로 포박당한 상태였다. 시신을 뒤집어 똑바로 눕히자 양 손목에 밧줄이 느슨히 묶여 있었다. 그리고 얼굴과 뒷머리, 양쪽 어깨, 팔 등에는 상처와 피멍이 수두룩하였으며, 두 눈을 부릅뜬 채였다. 시신의 손목에 포박된 줄은 노점상이 천막을 고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약 10밀리 두께의 줄로써 이 줄은 어통소 초소 및 철망 주변에 흔히 널려 있는 것이었다.
오전 11시 50분 이덕인의 시신은 인천 세광병원으로 옮겨졌다가 남인천의원 원장 박용섭 씨가 검안하였다. 그때 의사는 "얼굴과 팔, 상체 등에 상처와 피멍 든 자국이 선명한 것으로 보아 구타에 의한 사망으로 추정된다"고 검안소견을 밝혔으나, 이후 확인 과정에서 박 씨는 이를 전면 부인한다. 이것은 당시 사진 자료, 그리고 사건 발생 초기 시신을 살폈던 목격자들의 진술에 의해 입증되나 이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자료에서는 경찰 조사를 토대로 상처 등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진술되어 있다. 이 밖에도 의문점은 더 있었다. 덕인이가 망루에서 탈출을 시도한 11월 25일 저녁 7시 30분경 망루에서 탈출해 이동했을 해변 길의 바닷물 수위가 55∼80cm이고 유속도 거의 없는 시간으로 평소 수영을 잘하는 덕인이가 수영 미숙으로 익사하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유가족의 증언이다. 그리고 덕인이가 탈출을 시도하다가 죽었다면 5일간이나 바다 위에 표류하였을 텐데, 아암도 주변에 군과 경찰이 경계 근무를 계속하고 있었고, 망루 위에 농성자들도 계속 농성을 하고 있었음에도 그 5일 동안 아무도 표류하는 사체를 발견하지 못하였던 것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5일간 바다에 쓸려 다녔을 표류체의 일반적 상흔이라고 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2. 이덕인열사 시신을 탈취한 경찰
11월 28일 오후 6시 30분, 유족들은 보다 정확한 사인 규명을 위하여 시신을 인천 세광병원에서 인천 중앙길병원으로 옮겼다. 11월 29일 새벽 4시경 시신을 보호하던 한 학생에 따르면 최기선 인천시장과 인천시경 관계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무전기로 영안실 상황을 주고받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어 시신 탈취에 대한 것을 예측하였다. 당일 새벽 4시 30분경 인천시 경찰 책임자가 병원을 방문하여 상황을 살피려 하였을 때, '대책위'에서는 경찰 책임자에게 시신 탈취를 우려하여 경찰 측과 함께 다음날 시신을 부검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현장 지휘 책임자는 거부하였다. 오전 4시 45분, 공권력 1,500여 명이 시신이 안치된 인천 중앙길병원을 둘러쌌다. 그리고 영안실을 침탈하였다. 당시 병원의 영안실에는 시신발견 소식을 듣고 달려온 노점상과 학생, 사회단체 회원 등 100여 명이 영안실을 지키고 있었다. 공권력은 쇠파이프와 곤봉, 쇠망치 등으로 중무장한 채 사방으로 나뉘어 벽과 유리창을 뚫었다. 공권력은 깨진 유리와 벽돌을 대책위 쪽 사람에게 집어 던지고 쇠파이프와 곤봉을 휘두르며 순식간에 영안실에 난입하였다. 영안실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공포에 휩싸였다.
당황한 학생들과 사회단체 회원들은 경찰이 휘두르는 쇠파이프에 머리가 터지고 얼굴이 깨지는 등 피투성이가 되어도 어떻게든 시신을 지키고자 병원 주변에 공사용으로 쌓여 있던 모래와 각목 등을 집어 들며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순식간에 몰려든 공권력의 폭력 앞에 시신을 지키던 100여 명은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인천지역 대학생 4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20여 명이 경찰에 끌려가 머리가 터져 20∼30여 바늘을 꿰매고, 어떤 이는 안면이 함몰되었으며 쇠파이프에 맞아 실명의 위기에 처하는 등으로 진단 4주 이상의 상처를 입게 되었다.
경찰서로 연행된 사람들은 8시간 동안이나 경찰의 감시 아래 시멘트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또한 병원 시신침탈에 동원되었던 전경들에게 연행 학생 7명의 얼굴을 보여주며 한 사람씩 지적하게 하였다. 학생들의 정당한 방어를 폭력으로 몰아 연대 온 사람 전체 총 12명을 구속하였다. 경찰은 폭력적인 방법으로 자백을 강요하고 구속했다. 심지어 인하대 1학년인 한 학생에게는 전경에게 '삽을 들고 있었다'는 자백을 강요하며 특수공무집행방해죄로 구속하였다.
이날 공권력은 시신을 탈취하면서 영장을 제시하지도, 시신을 탈취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지도 않았다. 또한 덕인의 친형이자 유족인 이덕창(남)에게도 납치하다시피 시신 부검에 동의할 것을 강요하며 강제로 입회시켜 부검하였다. 시신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이하 국과수)로 가져간 경찰 측은 불과 1시간 50분 만에 부검을 서둘러 마쳤다. 가족과 노점상에게는 '더 이상의 부검을 하지 못하도록 시신을 손상했다'라는 의혹과 소문이 퍼지기도 하였다. 세월이 흘러 지금도 덕인의 부모님은 우리를 만날 때마다 "저놈들이 우리 아들의 몸을 고깃덩어리 취급을 했고 만신창이를 냈다" 며 회상하고 슬퍼한다.
3. 이덕인, 세상에서 두 번 버림받은 사람
1995년은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 씨의 분신자살로 장애인에 대한 여론이 사회적으로 뜨겁게 달궈졌다. 장애인 문제와 저소득 도시 취약계층을 정책적으로 지원한다는 김영삼 정부의 언론 발표가 있었지만, 결국 덕인의 죽음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실상은 전시 행정에 불과했다. 2000년 3월에 실린 '노들 장애인야간학교' <노들 바람 18호>에 실린 기획 기사 '故 이덕인 열사에 대하여'를 참조하면 장애인들의 현실이 어떠한지 잘 설명을 해주고 있다.
'정부에서 정책으로 내세우는 것들은 대부분이 이벤트적이고, 전문성이 부족한 것들뿐입니다. 그 한 예로 장애인 취업 도모를 위해 노동부에서 주최하는 장애인 기능 대회가 있는데, 이는 올해로 6회가 넘어가는데도, 그동안의 참가자 중에서 직장을 찾은 사람은 단 두 명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부 조직조차도 장애인고용촉진법을 제대로 준수하고 있지 않으며, 심지어 장애인고용촉진공단에서조차도 장애인을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사업주들은 효율성과 최대이윤만을 따져 장애인 고용을 피하고, 이를 해결할 정부 정책마저도 이러한 형편이라면, 강제 철거에 맞서 싸웠던 노점상들과 이덕인 씨의 죽음이 과연 그들만의 국한된 문제인지를 따져 봅니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덕인 사건에 대하여 “대규모의 공권력 동원과 통제로 헌법상의 생명권을 위협하고, 신체의 자유, 행복추구권을 과도하게 침해하여, 공익보다 침해되는 사익이 현저히 큰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였으며, 국민기본권의 확립을 위해 항거하는 과정에서 사망에 이르렀다는 요지의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직접적인 사인과 관련해서는 ‘이덕인 씨가 경찰에 폭행당한 후 실신 상태에서 물에 던져졌음을 뒷받침할 근거는 없다’ 는 결론을 내렸다. 죽인 자는 국가가 맞으나 당시 국가권력의 하명을 받아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경찰이 죽였는지는 모르겠다는 결론을 내고 진상규명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국가폭력에 의한 사망이라는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결론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2008년 ‘민주화운동명예회복보상심의위원회’는 민주화운동과 관련한 사망으로 볼 수 없다는 ‘불인정 결정’을 내려 열사의 명예회복마저 물 건너가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세상으로 두 번씩이나 버림을 받은 열사를 안타까워 한 부친 이기주 님은 그 후 팔십노구의 몸을 이끌고 거리로 나서서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알리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고 있다. 2015년 5월 3일,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과거사법제정촉구’ 기자회견장에서 머리카락을 잘라 삭발하고 국회 앞 1인시위를 전개하였다. 광화문 촛불집회 등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마다하지 않고 아들의 진상규명을 위해 거리로 나가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 가족의 소망은 어려서부터 가난과 장애로 힘겨운 삶을 살아온 열사는 공부를 잘해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었다. 죽음이 닥쳐오는 줄 모르고 망루에 오르던 그 날도 덕인이는 공무원시험 볼 자격을 잃을까 걱정이 앞섰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무자비한 국가폭력은 그의 조그마한 소망조차도 용인하지 않았으며, 목숨마저 빼앗았던 것이다.
덕인이는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는 장애인이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과 동일시하며, 자신에 대한 존엄과 모두가 존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일상적 활동과정에서, 그리고 저항하는 과정에서 온몸으로 보여준 사람이다. 우리는 몇 년 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 박승하와 김종환 그리고 당시 노점상 단체의 부의장이었던 유희씨 등과 함께 인천의 아암도를 다시 찾았다. 이곳은 그날의 흔적을 다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말끔히 지워져 있었다. 이곳이 설마 섬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