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사 추모 단체들, 민주유공자법 제정 촉구
“유공자법 제정은 시대정신을 올바르게 잇는 일”
“30년 세월 지났지만 죽은 동료를 잊은 적 없다”

90년대 당시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이 모여 민주유공자법(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 즉시 제정을 촉구했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운명한 이들의 명예를 법으로 공식 예우하라는 요구다.

법안 골자는 민주화운동 관련 사건에서 사망, 실종, 부상을 입은 당사자를 국가유공자로 예우하고 유족들을 지원하는 것이다.

민주유공자법은 지난 3월 국회 안건으로 상정되어 심의에 올랐으나 여당의 반대로 논의가 중단된 상태다. 

▲12일 오후 2시 국회 앞에서 열린 '민주유공자법 즉시 제정을 촉구하는 청원서 전달을 위한 합동기자회견'에서 박병언 변호사가 발언하고 있다.
▲12일 오후 2시 국회 앞에서 열린 '민주유공자법 즉시 제정을 촉구하는 청원서 전달을 위한 합동기자회견'에서 박병언 변호사가 발언하고 있다.

12일 오후 2시, 국회 앞에서 ‘96년 열사·희생자 추모 사업회(96년 추모 사업회)’와 '열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공동 기자회견을 열었다.

96년 추모 사업회는 1996년 당시 학생 신분으로 민주화운동에 가담하다 산화한 이들의 대학 동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열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당시 각 대학 대표자들로 이뤄진 모임이다.

이날 사회를 맡은 박병언 변호사는 “직장인이 근 30년 세월을 지나, 죽은 동료를 잊지 않고 열사의 아버님, 어머님과 함께 싸우기로 했다”며, “수많은 운동가의 희생으로 한국 민주주의가 이만큼 발전했음을 국가가 인정할 때”라고 밝혔다.

권희정 열사 추모사업회 송승연 회장은 “96년 열사는 시대에 맞춰 ‘국가 교육재정확보와 등록금 인하’라는 요구를 들고 싸웠다”며 민주화운동에서 90년대 운동가의 역할을 강조했다. 이어 송회장은  “어머님, 아버님이 천막농성을 시작한지 햇수로 3년째임에도 불구, 법안을 통과시키지 않고 있다”며 늦장대응하는 국회를 질타했다. 

정연욱 박동학열사 추모사업회 회장은 “한국전쟁 유공자, 베트남전쟁 유공자, 5.18 유공자 등 수많은 유공자법이 재정됐다”며 “민주유공자법은 유족 개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관한 국가의 가치를 세우는 법”이라고 말했다. 이어 “국회의원이 조속히 이 법을 재정하는데 앞장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96년 민주화운동 당시 고인의 모습에 대한 회고도 이어졌다. 신기정 전 평화나무 사무총장은 성균관대학교 후배였던 황혜인 열사를 추억하며, “학교를 마치고 내려가는 길에 누군가 ‘선배!’하고 불러서 보니 혜인이의 다정하고 친근한 얼굴이 있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이어 신 전 사무총장은 “그로부터 며칠 되지 않아 혜인이가 자신의 몸을 불살라 먼저 떠나갔다”며 비감을 표했다.

신 전 사무총장은 또 “성균관대에 황혜인 열사를 기리는 생활도서관을 만들고 2010년대 중반까지도 추모문화제를 진행했으나, 현재는 공식 행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어 아쉽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라도 혜인이를 다시 생각하고 챙길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이날 회견은 회견문 낭독으로 마무리 되었다. 국회 일정상 6월 이후로는 상정된 법안이 폐기될 수 있어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유가협)는 시민사회의 대응을 촉구했다.

한편 민주노총 역시 오는 15일 스승의 날을 맞아 통일광장, 유가협 등의 원로와 함께 민주유공자법 제정을 촉구하는 별도의 기자회견을 열 예정이다.

아래는 이날 ‘1996년 열사·희생자 추모사업회’가 발표한 회견문 전문이다.

우리들은 민주유공자법의 빠른 제정을 촉구한다

우리는 1990년대 대학을 다녔고, 지금은 오십을 넘긴 대한민국의 평범한 시민들입니다. 각자의 일터에서 열심히 일해야 할 시간에 우리가 기자회견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걸고 모인 이유는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법 제정의 필요성이 대두된 2000년 이후 23년이 넘도록 제정되지 못하고 있는 '민주유공자법'을 21대 국회에서 조속히 제정하라고 요구하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하나는 자식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민주유공자법'의 제정을 촉구하며 31일째 단식농성을 하고 계신 유가협 부모님, 형제, 자매들의 단식을 중단하십사 요청드리기 위함입니다.

'민주유공자법'은 1998년 국민의 정부 시절 422일 동안 유가협 부모님들의 천막농성으로 제정된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과 '의문사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의 연장선에 있는 법입니다. 또한 이땅의 민주화를 위해 자기 몸을 바친 분들의 숭고한 희생이 있어 우리의 민주주의가 이만큼 이룩되었다는 사회적 공인을 하는 법이기도 합니다. '민주유공자법'이 제정되어야만 우리의 민주주의는 온전해지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산업화와 더불어 민주화는 우리 역사를 이끌어온 쌍두마차입니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는 말처럼 수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만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습니다. 일신의 안락을 뒤로 하고 민주화와 사회발전을 위해 희생한 이들이 없었다면 과연 대한민국이 세계가 부러워할 나라가 될 수 있었겠습니까?

따라서 사회발전의 토대인 민주주의를 완성하고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을 제대로 존중하기 위한 '민주유공자법'은 반드시 마련되어야 합니다. 더는 미룰 수 없습니다. 만일 21대 국회가 차일피일 '민주유공자법'을 미룬다면, 국민의 대표기관으로서 직무유기를 하는 것이며, 역사적 죄를 짓는 일이 될 것입니다.

지난 23년간 자식을 먼저 보낸 유가족분들은 자식들의 뜻을 따라 이 땅의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 통일 등에 앞장서 활동해 오셨습니다. 87년 6월항쟁 35주년이었던 지난해 유가협 부모님들은 '민주유공자법'의 조속한 제정을 촉구하며 삭발식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31일째 곡기를 끊고 애끓는 심정으로 단식농성을 진행 중이십니다.

사람의 몸은 아주 정직하다고 합니다. 평소 건강한 사람이 100을 먹는다면, 숨을 거두기 직전의 연로한 분들이 먹는 양은 30 정도라고 합니다. 연세 드신 분들이 식사를 거르거나 식사량이 줄면 몸의 세포들이 '아! 이 사람이 명을 다할 때가 되었구나!' 인식한다고 합니다.

여든이 넘는 유가협 부모님들이 단식을 하는 것은 젊은 사람들이 단식을 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위험합니다. 의료진은 단식을 끝낸 뒤의 후유증 또한 엄청날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의 건강에 대한 염려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가협 부모님들이 곡기를 끊는 극단적 단식에 나선 것은 자식들의 명예가 회복되지 않고는 편히 눈을 감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유가협 부모님들은 죽어서도 자식 볼 낯이 없다고 하시는 겁니다.

자식들을 민주의 제단에 바치신 유가협 부모님들이 더는 몸 상하지 않고 단식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은 '민주유공자법'의 조속한 제정밖에 없습니다. 이분들이 두 다리 뻗고 편히 쉬실 수 있도록 21대 국회는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여당인 국민의 힘은 논의 자체를 회피하는 졸렬한 작태를 멈추기 바랍니다. 169석의 거대야당인 민주당은 여론의 눈치를 살피지 말고, 정부와 여당, 국민을 설득해 '민주유공자법'을 통과 시키기를 강력 촉구합니다.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은 열사들의 친구들입니다. 우리들의 친구였던 열사들은 스무살 대학생 시절 사회적 이슈였던 매년 20-30%씩 폭증하는 등록금 문제를 정부가 해결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김영삼은 1992년 대통령 선거 때 'GNP 대비 5% 국가교육재정을 확보'하겠다는 약속을 했으나 제대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1996년 전국의 대학가는 국가교육재정 5%공약을 이행하라는 요구를 내걸고 시위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연세대 재학생이던 노수석 학생이 경찰의 폭력에 희생되었습니다. 그후 연이어 경원대 진철원, 성균관대 황혜인, 여수 수산대 오영권 학생 등은 분신을 통해 사회적 불의에 항거했습니다. 성신여대 권희정 학생은 일방적인 등록금 인상 반대와 등록금 책정에 학생 참여를 요구하는 단식 도중 단식 후유증으로 사망했고, 대구공전 박동학 학생은 학생처 직원과의 실랑이 도중 이유를 알 수 없는 발화로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영남대 김하영 학생은 그해 8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요구하며 8.15범민족대회 참석 중 경찰의 원천봉쇄로 지병인 천식을 제때 치료하지 못해 사망했습니다.

이들의 희생이 있어 '반값등록금'은 사회적 이슈로 논의될 수 있었습니다. 현재 시행중인 대학생에 대한 국가 장학금 지급이나 등록금 책정에 학생 자치단체 참여 등의 진일보된 정책은 그 희생의 값진 결과물입니다. 또한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목소리는 6.15남북정상회담과 이후 이어진 남북교류의 물길이 되었습니다.

21대 국회의 임기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15대 국회 때부터 미루어왔던 '민주유공자법'의 제정을 더 이상 어떻게 미룰 수 있겠습니까? 민주화가 자랑스럽다면, 민주화를 위해 자신들을 희생한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이 우리 사회에서 공인되고 존중받아야 합니다.

다시 국회에 묻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23년이라는 시간이 부족했습니까?

유가협 부모님들이 삭발에 이어 단식농성까지 나섰습니다. 뭘 더 해야 국회의 의무를 다하겠습니까? 더는 기다릴 수 없습니다. 부디 '민주유공자법'을 조속히 제정하고 몇 해째 거리를 떠돌고 계신 부모님들을 댁으로 돌려 보내주십시오.

 

2023년 5월  12일

민주유공자법 즉시 제정을 촉구하는 1996년 열사‧희생자 추모사업회, 열사를 기억하는 사람들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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