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업시리즈 2-1
필자는 지난 해 코로나사태와 관련한 연재(“변혁의 시대에 진입하다!”)에서 앞으로 코로나사태가 몰고 올 경제위기 활로는 ‘공기업화’임을 주장한 바 있다. 이번 경제위기는 2008년 금융위기 때와는 달라서 그 부담을 투자자 개인이 아닌 사회 전체가 짊어지는 식으로 헤쳐 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대규모 국채 발행으로 인한 국가부채의 급속한 증가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이렇듯 증가된 국가부채는 앞으로 오랫동안 한국경제와 한국사회 전반을 짓누르는 커다란 짐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공기업화를 통해 국가재원을 마련하는 길이다. 단순히 부도나는 몇몇 한계기업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앞으로는 수익성이 좋은 기업에 대해서도 합법적 수단이 허락하는 한 적극적인 공기업화 조치를 취해나가야 한다.
최근 일각에서 거론되고 있는 ‘기본소득제’와 관련하여서는, 이 제안은 취지는 좋지만 재원 마련에 대한 대책이 결여되어 있다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 ‘기본소득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방안은 기껏해야 결국 ‘세금 더 걷기’ 차원을 넘지 않는다. 그럴 경우 지난 18대 대선을 앞두고 2010년 하반기부터 벌어진 ‘복지논쟁’의 재판이 되기 쉽다. 당시 갖가지 화려한 공약들이 제출되었지만, 그 후 바뀌어진 것은 별로 없다.1) 지금은 세금 더 걷기가 아닌 소유적 차원에서 근본적인 대안을 찾는 것이 필요한 때이다. 보편적 복지든 기본소득제든 공기업을 바탕으로 할 때만 지속적인 실천과 그 실현을 위한 물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물론 공기업문제는 단순하지 않으며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민감한 주제이다. 전세계적으로 보면 공기업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그에 대한 상이한 평가가 존재한다. 한국사회 역시 과거 적지 않은 공기업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90년대 이후 대대적인 민영화조치 끝에 지금은 그 수가 대폭 줄어들었다. 대체로 본다면 공기업과 관련한 한국사회의 인식은 부정적이라 할 수 있다.
지난번 [공기업 시리즈-1]에 이어 그동안 필자의 공기업 관련한 연구 성과를 앞으로 계속해서 내놓을 생각이다. 미약하나마 독자들의 의문에 얼마간 답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1) 공기업의 기원
공기업의 기원을 살펴보면 의외로 그 역사가 긴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가장 먼저 본격적인 꽃을 피운 영국의 경우 일찍부터 공기업의 맹아를 발견할 수 있는데, 1657년에 설립된 우편총국이 그것이다.2) 프랑스 역시 공기업의 역사가 결코 짧지 않다. 프랑스 혁명 이전의 프랑스 군주들은 정치적, 군사적, 재정적 필요성과 중상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인하여 여러 공기업을 운영하였다. 예컨대 17세기 루이14세 시절 재정대신인 랑 파티스타 콜베르는 국가가 간여하여 지지하거나 주도하는 공상업(工商業) 방안을 제출하였으며, 이를 위해 일부 도로와 운하 등 기초시설을 건설하였다. 이 역시 공기업의 초기 형태라 할 수 있다.
![▲ 영국 우편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우편마차(Mail Coach). [사진 : 영국문화원 공식블로그, 이지희]](/news/photo/202108/12025_25401_3130.png)
19세기에 이르러 공기업은 우편, 조폐, 정부인쇄 등 당시 중앙정부 차원의 공익사업 분야를 중심으로 존재하였다. 이 밖에도 한정된 부문과 순수 재정적 목적을 위해 설립된 담배와 성냥의 전매사업 분야에서도 그 존재를 발견할 수 있다. 또 민간업자의 능력부족이나 채산성 악화로 경영에 실패할 경우 사업에 관한 면허권을 회수한 분야, 그리고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당시 도시화의 시작으로 인한 대중교통, 주택보급, 수도, 보건‧위생관리 사업 등에도 간여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공익사업의 운영 방식은 별도의 ‘공기업제도’보다는 행정부 소속 부서에서 직접 담당하는 형태가 주를 이룸으로써 일종의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 같은 모습은 공기업의 진화과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즉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형식을 정부행정기관으로 할 수도 있고 공기업으로 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공공기관과 공기업은 질적으로 완전히 서로 다른 것은 아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공기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여 경제적 성격의 공익사업으로 정식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는 주로 국방상의 필요에 따라 각국 정부는 무기생산, 식량공급, 운수, 해운보험 등의 활동을 직접 수행하였다. 정부는 전쟁으로 파괴된 지역들의 재건과 국토의 정비‧개발을 위한 경제적 사업도 도맡았다. 그 수행방식에 있어서도 종전의 국가기관에 의한 직영방식이 아니라, 국가와 ‘독립된 기관의 형식’을 빌려 이들 활동을 수행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의 공기업의 효시를 이루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영국의 경우 이들 기관은 석탄, 철도, 함선, 건축, 식료와 설탕 및 곡물 매매 등 비교적 광범위한 경영을 하였다. 그러나 자유주의를 숭상하였던 영국에 있어서는 이 같은 조처는 전쟁기간 중의 임시적인 것으로 전쟁이 끝난 직후 영국정부는 이들을 곧 민간경제로 회귀시켰다.
프랑스에서는 영국과 달리 전쟁이 끝난 후에도 전시에 형성된 국유경제가 해체되지 않음으로써 공기업의 독자적인 발전이 나타났다. 베르사유조약에 의하여 자국에 반환된 알사스지방의 가성칼리자원의 개발을 위해 프랑스에서는 많은 공기업이 설치되었다. 제1차 대전 이전의 경우와 비슷하게 민간업자로부터 회수 또는 인수된 면허권의 공적운영이 필요한 경우도 있었으며, 기존 민간부문 일부에 대해 정치적으로 국가 정책적 시각에서 국유화를 단행하여 공공부문을 조성하는 경우도 나타났다. 1921년 프랑스는 정부기관의 행정서비스와 상공 분야의 공공서비스를 구분하는 법령의 도입을 통해 공공재를 창출하는 분야는 모두 공기업으로 인정받는 고유의 공기업법 개념을 정립하였다. 1930년대의 세계경제 위기 시에는 도산에 직면한 많은 기업체에 구조의 손길을 뻗쳤으며, 이러한 재정적 원조의 대가로 기업체의 주식을 취득함으로써 이들을 공기업화 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프랑스의 공기업은 영조물(營造物)법인3)으로서 공사(公社) 또는 공사혼성자본 기업의 형태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중 공사의 형식을 취한 경우는 베르사유조약에 따라 프랑스에 귀속된 재산 또는 사업의 경영을 위하여 설립한 것들인데, 국영공업공사, 알사스국유칼륨광산 등이 그것이다. 물론 베르사유조약과 무관한 국립농업기금금고, 석유공사도 있었다. 공사혼성자본회사4)의 경우는 주로 당시 경제적 상황에 기인하였다고 할 수 있다. 예컨데 1929년의 경제공황 이후 해운, 철도, 항공 등의 특허기업들은 중대한 재정적 위기에 봉착하여 국가의 보조금에 의한 지원이 더 이상 존속할 수 없었거나, 이들 기업에 대한 국가의 전도금(前渡金)5)을 상환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여건 하에서 관련 공공역무6)의 지속적 수행, 전도금 회수, 당해 사업에 대한 국가의 계속적 지원이나 그 경영에 대한 국가의 통제 확보를 위한 가장 적절한 형식으로 특허기업을 공사혼성자본회사로 전환하는 방식을 적용하였다.
공기업은 이처럼 2차 대전 이후 서유럽에서 본격적으로 보편화되기 이전에 역사적으로 일찍부터 존재하였다. 비록 중간에 다소간의 부침이 있긴 하였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현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그 범위와 규모를 확대해 왔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시장경제하에서 공기업의 출현이 일시적이거나 우연적 현상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발전을 해온 이유는 무엇일까? 헤겔은 <법철학 강요(綱要)>에서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고 말한 바 있다. 모든 현실 속에 존재하는 사물은 자기 나름의 객관적 합리성과 존재 의의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공기업 역시 이 같은 합리성을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다. 맑스는 <자본론>에서 ‘화폐’의 출현은 상품의 내적 모순의 필연적 결과임을 밝힌 바 있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공기업도 현실 관계에 있어 일종의 ‘모순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있어 ‘공기업’은 과연 어떤 모순의 산물일까? (계속)
본문 주석
1) 당시 유력한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주자였던 박근혜는 “의약품 리베이트, 실종아동, 다문화가족” 등 돈이 적게 드는 소위 '박근혜식 복지'를 들고 나왔다. 민주당의 손학규 대표는 전통적인 보수야당 당수답게 소위 '창조형 복지국가' 건설을 운운하였는데, "증세 없는 복지국가 구현"이라는 정말 '창조적인' 복지명제를 내세우고 나왔다. 이에 대해 같은 당 최고위원인 정동영의원은 "순자산 30억원 이상 보유자와 1조원 이상 보유 법인에 자산 1~2%를 세금으로 부과하자"는 파격적인 ‘부유세 신설’을 내걸었다. 이쯤 되면 이미 상당히 진보진영과 가까워지거나 차이가 거의 없어진 셈이다. 진보신당 강상구 대변인은 민주당의 '창조형 복지국가' 발표가 난 후 "OECD 평균 수준이 되려면 지금보다 약 110조원 가량의 복지재정이 더 필요“하며 이를 위해선 '증세'가 필수적"이라는 주장을 했다. 민주노동당의 이정희 대표도 "소득세․법인세 최고세율 구간을 신설해 재원을 마련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당시의 복지논쟁은 제도권의 대부분 정치세력이 참여하는 최초의 본격적인 복지논쟁이었다는 점에서 과거 어느 때와는 달랐다. 그전에도 몇몇 정당이나 정파들이 복지문제를 거론한 적이 있긴 하지만, 대통령 선거를 무려 일 년 이상 앞둔 시점에서 자신들의 주요한 선거공약으로 미리부터 뜨거운 논쟁을 펼치기 시작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한국의 영향력 있는 대부분의 정치세력들이 복지논쟁에 뛰어든 것과 관련하여, 각자의 정치적 의도나 복지강령의 성실성 여부는 둘째치고라도 일단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그간 한국사회는 너무도 오랫동안 경제성장의 논리에 밀려 복지문제가 부차화 되었기 때문이다.
2) 이하 공기업 역사와 관련된 사실적 내용은, ①한국조세연구원, 2010년5월, <주요국의 공공기관Ⅰ―영국, 프랑스, 스웨덴, 미국>; ②伍柏麟 席春迎 공저, 1996년, <서방국유경제>, 북경, 고등교육출판사 주로 참조함.
3) 영조물이란 국공립 박물관·도서관 등과 같은 공공용(公共用) 영조물이나 교도소·소년원 등과 같은 공용(公用) 영조물 등의 물적 시설을 말하며, 이러한 영조물에 법인격을 부여한 공법인(→공공단체)이 영조물법인이다.
4) 어떤 공사혼성자본회사는 국가적 이익에 의하여 정당화되나 사적부문 만에 의하여서는 수행하기 어려운 새로운 경제적 역무의 이행을 위해 설립되었다. 또 다른 공사혼성자본회사는 일정 경제영역의 경우 그에 대한 자본주의적 지배현상은 침해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되었는데, 이러한 영역에서는 국가가 관련 기업의 자본에서 과반수를 점함으로써 당해 기업경영에 있어 사적 자본가의 실질적 결정권을 배제하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5) 매매·위탁·청부 등의 계약을 이행하기 전에 주는 대금이나 교부금. 선급금(先給金)을 말한다.
6) 공공단체가 공익을 위하여 행하는 모든 활동으로 프랑스에서 행정법이 적용되는 영역을 뜻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