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원왕, 빼앗겼던 고조선 옛 땅 다시 찾아
[박경순의 고구려사](15) 고국원왕의 파란만장한 삶(2)
고국원왕은 고조선의 옛 땅을 완전히 수복하는 역사적 대업을 완수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전연과의 전쟁(342년) 중에 일시적 전술적 실수로 환도성을 함락당하고, 태후와 왕비를 납치당했으며, 부왕의 시신을 강탈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또한 백제와의 전투중에 화살에 맞아 사망하는 비운의 왕이었다. 지난번에 이어 고구원왕의 파란만장한 삶의 기록을 더듬어 가본다.
전연을 멸망시키고, 고조선 옛 땅을 모두 되찾다
고구려의 고국원왕은 전연과의 대결 태세를 늦추지 않았다. 하지만 태후를 되돌려 받기 위해 유연한 자세로 임했다. 전연은 355년 태후를 고구려로 돌려보냈다. 그들이 태후를 돌려보낸 것은 고구려의 노력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들의 국력이 성장해 고구려가 감히 넘보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도 깔려 있었다. 하지만 고구려는 342년에 당한 수치를 잊지 않고 있었으며, 자기의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 큰 힘을 넣으면서 전연에 대한 복수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고국원왕은 이 시기 전국 각지를 순시하면서 조성된 정황을 처리하고, 요동지방 서북조선 각지에 성곽 방위시설들을 신축하거나 보수하도록 했다. 또 남평양성을 건설하고 농업, 수공업 생산을 발전시킴으로써 군량 축적과 무기무장 생산을 다그쳤다.
전연은 초기에는 승승장구했다. 350년 2월 만리장성 계선을 넘어 후조의 유주를 차지하고 계(북경 부근)로 수도를 옮기더니, 351년에는 중산지방을 점령했으며, 352년에는 염위를 멸망시켰다. 또한 전연왕 모용준은 황제를 자칭하고, 357년에는 수도를 계로부터 업성(하남성 임장현 서쪽 40리)으로 옮겼다. 그러나 내부에서 관료들의 부화타락이 심해 민심을 크게 잃은 데다 남쪽에서는 동진이 공격해 왔고, 서쪽에서는 서진이 공격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369년에 전진은 전연의 낙양을 공격해 그 이듬해 2월에 점령했다. 370년 7월에는 호관과 진양을 공격했다. 전연의 최고관료인 태부 모용평은 전국에서 정예군 30만명을 모아 전진의 진격을 저지하였다. 370년 10월23일 전진과 전연의 군대는 위원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이 위원전투에서 전연군은 15만명을 살상포로당하고 모용평은 겨우 목숨을 건져 수도로 도망쳤다. 11월 초 전진군은 전연군의 수도 업성을 포위했으며 7일밤 부여 고구려 등이 보낸 치자(간첩) 500여명이 북문을 열어줘 업성이 함락됐다.
고구려는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전연이 멸망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고구려는 대(大)기마군단을 보내 요서지방을 장악했다. 그리고 만리장성 계선을 돌파해 파죽지세로 진격해 유주 북부지역을 점령해버렸다. 당시 고구려가 국경으로부터 출발해 유주 북부지역까지 가려면 2000여리를 가야하는데, 이 거리를 10여일만에 진격한 것은 매우 놀랄만한 일이다. 고구려의 기동성이 뛰어난 대기마군단이 없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고구려 기마군단의 위력은 이미 49년 태원 원정 때 진가를 과시한 바 있었다. 어쨌든 고구려는 이때 대기마군단의 뛰어난 기동성을 이용해 11월10일경 베이징 서남 용성부근에서 곽경의 전진 군대와 만났다. 당시 고구려와 전진은 같은 적인 전연을 무너뜨리기 위한 전략적 동맹을 맺은 상태였기 때문에 상호 충돌 없이 전연 잔여세력 소탕작전을 공동으로 벌였다.
전연 세력을 소탕하기 위해 기마군단을 동원해 10여일만에 베이징 근처의 용성(유주 북부지역)까지 진출한 고구려는 그 지역에 고구려 행정구역으로서 유주를 설치했다. 당시 설치된 고구려의 유주는 산하에 13개 군이 있었고, 유주 자사는 진이었다. 그런데 고구려가 한 때 자기의 유주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 어떤 역사책에도 기록돼 있지 않다. 중국의 역사책들은 말할 것도 없이 〈삼국사기〉에도 기록돼 있지 않다. 그러다보니 대다수 중국의 역사책들에서는 전연 멸망이후 전연의 땅을 전진이 다 차지한 것처럼 써놓았다. 그런데 어떻게 고구려가 설치했던 유주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을까? 그것은 바로 덕흥리 벽화무덤이 발굴되면서다. 1976년말에 평남 강서군 덕흥리에서 새로 발굴된 덕흥리 벽화무덤 앞 칸에 묵서가 쓰여 있었는데, 이 묵서를 통해 알려지게 됐다. 이 무덤 앞칸에 있는 묘지명을 통해 이 무덤의 피장자는 고구려 귀족관료 진(332~408년)이라는 것이 알려졌다. 그리고 묵서에는 그가 유주 자사로 있을 때 유주 관하의 군현 수와 군현 법이 적혀 있으며, 그림에는 그가 3군 태수와 만나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의 유주 설치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덕흥리 벽화무덤의 묵서를 통해 확인된 유주 자사 진은 고구려의 유주 자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중국의 유주 자사였다가 고구려에 망명한 사람이라고 한다. 하지만 유주 자사 진은 망명객이 아니라 고구려 사람이다. 그 근거는 첫째로 묘지명에 적혀 있는 그의 출생지 “00군 신도현 도향 중감리‘가 고구려 지명이라는 것이며, 둘째로 그의 관직명이 고구려 관직이라는 것이며, 셋째로 무덤의 축조형식과 방법, 벽화의 주제와 내용이 5세기초 고구려식이며, 고구려의 고유 풍습과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서 확증할 수 있다. 이처럼 고구려에서 태어나 고구려에서 관직생활을 줄곧 해온 진이 유주 자사를 했다는 것은 고구려가 370년대에 유주를 설치했다는 것을 확증해 준다. 고구려가 유주를 설치했던 것은 유주를 영구 장악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고구려의 정책적 목표는 분명했다. 그것은 우리겨레가 살았던 고조선의 옛 영토를 수복해 겨레의 민족 통합을 실현하는데 있었다. 고구려가 유주로 진출해서 유주를 설치했던 것은 군사전략상 필요에 따른 것이었다. 당시 백제 역시 요서지역에 진출해 있었다. 남조계통의 역사책들인 〈송서〉, 〈양서〉, 〈남사〉 등을 보면 당시 백제도 출병해 요서 진평 2개군을 두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구려는 전연의 잔여세력들을 소탕하는 한편, 백제 세력들도 제압하기 위해 유주를 설치했던 것이다.
고구려는 유주 진출의 목적이 달성된 조건에서 376년경 유주에서 주동적으로 철수하고, 대릉하~의무려산 줄기 계선 동쪽만을 고구려 영토로 확보했다. 이 계선은 바로 고조선의 서쪽 국경선이 있었던 곳으로서 고조선 옛 땅 수복정책에 포함되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대릉하에서 난하까지의 지역도 한때 고조선의 영토였던 적이 있으나 기원전 3세기 이후 연나라에 강점당한 후 우리겨레가 거의 살지 않고 중국화돼 버렸다. 당시 대다수 우리겨레는 대릉하 이동지역으로 옮겨와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는 대릉하 이서 지역을 통합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던 것이다. 고구려의 유주 진출은 오랜 침략세력이었던 전연을 멸망시키고 그 잔당까지 소탕함으로써 고구려의 국위를 널리 선양했을 뿐 아니라, 수백년간 외세에 의해 강점당했던 고조선 옛 땅 수복이라는 역사적 위업을 달성했다는 점에서 거대한 역사적 의의가 있다.
371년 백제와의 남평양성 전투에서 사망하다
고국원왕이 전연세력과의 생사를 건 투쟁을 펼치고 있었을 때, 남쪽에서 백제가 새롭게 신흥강국으로 성장해 고구려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그때 백제의 왕은 근초고왕(재위 346년~375년)이었다. 근초고왕은 비류왕의 아들로서 백제의 부흥을 이끈 왕이었다. 그는 내적으로는 왕권을 강화하고 지방 통치기구를 정비하는 등 국력을 신장시켰고, 외교적으로는 가야를 손 아래 동맹으로 끌어들이고 신라와의 관계를 개선해 나갔다. 그는 지금까지는 상전으로 모시고 받들던 고구려와 한판을 겨뤄보겠다는 야심을 공공연하게 내비쳤다.
지금까지 자기나라에 사대조공을 해오던 백제가 통제를 거부할 뿐 아니라 신라까지도 자기 산하에 끌어들여 남쪽에서 하나의 세력으로 규합되는 것을 고구려로서는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고국원왕은 369년 9월 직접 보병과 기병 2만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백제의 북변 치양 땅에 나가 주둔했다.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치양땅으로 내려온다는 소식을 접한 백제의 근초고왕은 태자를 시켜 많은 무력을 이끌고 급히 치양으로 달려가 싸우도록 했다. 백제군이 기습하면서 고구려-백제 간의 첫 전투(물론 3세기말 대방국을 공격할 당시 대방국왕의 사위였던 백제의 책계왕이 대방국을 도와 고구려와 싸운 적은 있었으나 양국 사이의 직접적인 대규모 전투는 치양전투가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가 벌어졌다. 이 전투의 승자는 백제였다. 당시 고구려군은 아직 진지를 차지하기 전이었는데, 백제군이 기습해오자 고구려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백제군은 기세가 등등해졌다. 그 전까지 고구려를 몹시 두려워했었다. 그런데 첫 전투에서 승리하게 되자, 고구려를 두려워하던 마음이 사라지고 고구려와 한판 붙어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해졌다. 371년 10월 백제군은 3만명의 무력으로 고구려 남부지방에 쳐들어 갔다. 예성강을 건너 황해도 평천군을 거쳐 남평양성(장수산성)을 공격했다. 백제의 남평양성 공략전투는 고구려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패했고, 전투는 고구려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남평양성 방어전투를 지휘하던 고국원왕은 백제군이 쏜 화살에 맞은 것이 원인이 되어 10월23일에 사망했다. 그리고 황해도 안악군 오국리에 있는 안악3호 고분에 묻혔다.
고조선의 옛 땅을 완전히 되찾고, 고조선 계승국가로 등장하다
고국원왕은 전연을 멸망시키고 고조선 옛 땅을 모조리 되찾았다. 고구려는 이제 고조선의 전성기 때의 땅을 모두 자기의 영토에 편입하는 대업을 달성해 동아시아 강대국으로 우뚝 섰다. 서쪽으로는 대릉하~의무려산 줄기 계선까지 차지하였고, 북쪽으로는 후부여의 옛 땅 대부분을 차지했고 동부여까지 복속시켰다. 동으로는 동옥저를 통합해 동해안 연해주 남부일대까지 진출했다. 남쪽으로는 예성강 중류 이서, 임진강 중류 이서, 개성 부근까지, 또 강원도 영서지방의 많은 지역을 차지했다.
새로 고구려 땅으로 된 지역에는 경제발전에 유리한 넓고 기름진 땅과 광활한 초원 산림이 많았다. 고구려는 새로운 광활한 땅을 확보하게 됨으로써 많은 토지와 주민을 지배하게 됐다. 이것은 군사력의 기본인 인적자원(군사)을 확대할 수 있게 하며, 무기와 장구류 등 군사물자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해 줌으로써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주었다. 이러한 힘을 기반으로 ‘대왕(천자)이 다스리는 나라’(대왕국, 천자의 나라)로서 위용을 갖추기 위한 제반 제도 기구를 구비했으며, 주, 군, 현제를 실시함으로써 중앙집권체제를 보다 강화할 수 있게 됐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빼앗겼던 고조선의 옛 땅을 다시 찾고, 고조선 유민들이 세운 소국들을 모두 통합해 고조선의 옛 땅과 주민들을 다 포괄함으로써 고조선의 계승국가로서 면모를 확립했다는 점이다. 이로써 고조선-고구려로 이어지는 민족사의 정통성이 확립되게 됐다. 또한 고구려는 자신들이 창조한 정치, 군사, 경제, 문화 분야에서 성과들을 백제, 신라 등 이웃 동족의 나라들에게 전수해 줌으로써 전반적인 민족사의 발전을 추동했다. 뿐만 아니라 아시아 대륙 동북방에서 제일 강대한 나라로서 자기중심의 세계를 형성할 수 있는 기초를 튼튼히 닦았으며, 자기의 위력을 만방에 시위하였다. 바로 이점에서 우리 민족사에서 고국원왕을 새롭게 조명해 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