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전쟁이 없다고 생각하는 당신에게

2025-09-05     한경준 기자
조은석 특별검사팀 직원들이 3일 서울 여의도 국회 국민의힘 원내대표실 앞에서 압수수색영장을 꺼내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 송언석 원내대표 등 의원들이 의원총회 농성을 하고 있다. ⓒ뉴시스

총성이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곧 평화라 믿기 쉽다. 그러나 오늘날 전쟁은 총보다 사이버·법·언론·사회·문화에 대한 공격이 먼저다. 전선은 국경선이 아니라 국민의 의식, 사회 공동체를 향한다. 한 사회의 의지를 마모시키는 전쟁, 하이브리드 전쟁이다. 선전포고도 없이 시작되고 종전선언도 없이 끝난다. 정상적이지 않은 현상이 반복되고, 뒤늦게 우리의 일상과 제도가 심각하게 손상된 것을 깨닫게 된다.

지난해 한국은 이 새로운 전장의 실체를 뼈아프게 체감했다. 윤석열의 비상계엄으로 한국 사회가 얼마나 뒤틀려졌는지 깨달았다. 다행히 광장의 힘으로 윤석열을 탄핵하면서 위험의 고비를 가까스로 넘어섰다. 그러나 내란·외환을 가능하게 한 뿌리는 여전히 남아 있다.

2025년의 한국 정치 풍경은 극우 준동이 제도와 거리를 동시에 흔드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귀연 재판부가 보여주는 윤석열 내란 재판의 지연전술은 그 상징적 사례다. 4월 14일 시작된 1심에서 특검이 신청한 110여 명의 증인 가운데 법정에 선 이는 고작 19명에 불과하다. 한 달에 2~4번 열리는 느슨한 재판은 내년 1월 구속 만료와 맞물려 윤석열을 풀어주기 위한 시간 끌기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국민의힘이 장동혁을 당대표로 선출하며 스스로 극우화의 길을 택했다. 장동혁은 취임 연설에서 “모든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 정권을 끌어내겠다”고 선언했고, 자신의 승리를 “새로운 미디어 환경이 만들어 낸 성과”라고 규정하며 극우 유튜브의 영향력을 인정했다.

김민수 국민의힘 최고위원은 지난 1일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은 가정적 주장"이라며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를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또한 지난 3일에는 특검의 압수수색에 농성으로 대응했다. 국민의힘은 내란 수사를 '야당 말살, 정치 보복'이라고 규정하고 특검 해체를 요구하고 있다.

온라인과 거리에서도 극우의 준동은 계속된다. 전한길을 비롯한 극우 유튜버들은 여전히 ‘탄핵 음모론’과 ‘내란 무죄론’을 퍼뜨리며 여론을 교란한다. 국민의힘 지도부가 이를 받아쓰고 재생산하면서, 당의 정치적 프레임이 극우 선전선동과 결합하는 양상이 뚜렷해졌다. 동시에 태극기 집회 세력은 ‘대선 무효’, ‘윤 어게인’을 외치며 거리로 다시 집결하고 있다.

결국 2025년의 한국 사회는 법정과 의회, 언론과 온라인, 그리고 거리에서 동시에 벌어지는 하이브리드 전쟁에 직면해 있다. 

하이브리드 전쟁의 본질은 ‘승리’가 아니라 사회를 분열시키고 혼란을 이어가는데 있다. 국민이 서로를 불신하고 제도를 의심하게 만들면, 몇 발의 총포성만으로도 국가는 무너질 수 있다. 지금 한국 정치의 풍경이 바로 그것을 보여준다.

우크라이나는 하이브리드 전쟁의 결과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기원을 이해하려면 2014년 마이단 사태를 짚어야 한다. 당시 서방의 지원을 등에 업은 극우 시위는 정권 교체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극우 민병대 신나치 세력인 아조프 부대가 급부상했다. 이들은 내무부 산하 국가방위군에 공식 편입되고 규모도 확대됐다. 이어 우크라이나 동부와 남부의 친러 지역 주민들에 대한 학살과 탄압이 뒤따랐다. 러시아의 든든한 우방이었던 우크라이나가 불과 몇 년 만에 적이 되었다.

중동 전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고, 미사일과 드론이 오가며 민간인의 희생은 쌓여간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이란의 휴전 국면 이후 팔레스타인의 고통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여전히 총성은 울리고 있지만, 평화와 전쟁의 경계는 희미해졌다. 이것이야말로 하이브리드 전쟁의 특징이다. 전선은 눈에 보이지 않고, 피해는 은폐되며, 전쟁은 일상처럼 이어지고 있다.

이런 변태적인 상황의 밑바탕에는 하이브리드 전쟁이 있다. 전쟁의 방식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과거의 전쟁 개념으로만 이해하려 한다면, 우리는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맥락을 놓치게 된다. 총성이 울리지 않으면 평화 상태라고 오인하게 하는 것, 정상적이지 않은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해도 무감각해지는 것이 하이브리드 전쟁의 시작점이다.

미국이 하이브리드 전략을 선택한 것은 전략적 진화가 아니다. 오히려 군사 패권의 상대적 약화가 그 배경이다. 압도적 군사력으로 세계를 통제하던 시대가 저물면서, 미국은 사이버전·경제제재·여론전과 같은 비정규 수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하이브리드 전쟁은 미국의 생존전략이자 동시에 한계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러한 패권의 불안정은 세계 곳곳에서 극우 정치의 부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분열과 혐오를 자산으로 삼는 극우 세력은 하이브리드 전쟁의 토양에서 힘을 얻는다. 우크라이나의 아조프 부대가 그러했고, 유럽 각국의 극우 정당들이 그러하다.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내란 사태를 옹호하는 정치 지도부, 사법부, 언론을 동원한 통치와 극우 유튜브 채널에 의존하는 정당의 행태는 하이브리드 전쟁의 한 형태다.

따라서 우리는 이 현상을 “이해할 수 없다”라는 말로 넘길 수 없다. 이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 전략적 대응은 요원해진다. 지금 필요한 것은 하이브리드 전쟁을 정확히 이해하고 맥락을 짚어내는 일이다. 그래야만 올바른 과녁을 겨눌 수 있다. 분열과 혼란을 넘어 평화와 자주, 민주주의를 지켜낼 힘을 모을 수 있다. 전쟁은 이미 시작되었고, 그 전쟁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한국에서 하이브리드 전쟁은 치열하게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