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특집⑤] 일제의 통치기구를 분쇄한 전민항쟁

2025-08-14     편집국

1945년 8월 9일, 항일유격대(조선인민혁명군)이 국경을 돌파하고 해방의 총공격을 개시했을 때, 이에 호응해 전민족이 들불처럼 봉기했다. 일제가 항복을 선언하기도 전에, 이 땅의 민중은 무장을 들고 일본 통치기구를 분쇄하며 해방의 주체로 나섰다. 이는 우발적인 분노의 폭발이 아닌, 수년에 걸쳐 준비된 조직적 항쟁의 분출이었다.

조국광복회, 반일회, 반제동맹, 청년회, 농민조합, 여성동맹 등 독립운동조직들은 이미 각 지역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이들은 항일유격대와 손잡고 적 통치기구를 해체하는 실질적 무장항쟁을 전개했다. 그 중심에는 “전민항쟁”이라는 전략적 지침이 있었다. 한반도 전역에 자위대, 보안대, 자치대, 적위대, 치안유지대 등 다양한 명칭의 무장조직을 결성했다.

①어랑: 패주하는 일본군을 섬멸하다

함경북도 어랑 지역에서는 8월 16일, 무장대가 편성되어 봉강의 면사무소를 접수하고 100여 명의 청년을 무장시켰다. 이 무장대는 나남에서 패주하던 일본군을 매복공격으로 타격했다. 퇴각 중이던 일본군은 어랑무장대의 강력한 사격에 사상자를 내고 산길로 도주했으나, 강릉산 일대에서 치열한 교전 끝에 집단 투항했다. 이는 지역 무장조직이 일본 정규군을 격파한 상징적 승전 사례였다.

②길주: 철도파괴와 무기노획

길주 성천 일대에서는 8월 16일 조선인민혁명군의 부대가 백암을 해방하고 길주로 진격했다. 남계자치대는 적의 군용열차 퇴각 정보를 입수하고 역 선로전환기를 조작해 열차를 전복시켰다. 충돌과 함께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인민혁명군은 28량 분량의 무기, 식량, 군수물자를 노획하거나 파괴했다. 이어 덕산면 민경대는 도목동 골짜기에 집결한 일제 패잔병을 기습해 전멸시켰다.

③성진·삼지연: 도심 내 저항 분쇄

8월 18일 성진 보안대는 일본군 잔당이 시내 고급요정에 집결한 사실을 파악하고 요정을 포위, 격전을 벌인 끝에 무장해제에 성공했다. 이어 성진경찰서를 습격해 악질 경찰들을 처단하였다. 삼지연 노동자돌격대는 8월 19일 퇴각하던 일본군을 매복 공격하여 10여 정의 기관총, 수백 정의 보총, 수천 발의 탄약을 노획하였다. 이들은 청진 전선으로 도주하려던 잔당을 완전히 격멸했다.

④평양: 항공부대까지 소탕한 대중의 힘

평양은 일본 관동군, 17방면군 등의 기계화부대가 집결한 핵심 지역이었다. 8월 16일 조국해방단을 중심으로 조직된 적위대가 일본군을 포위하고 무장을 해제했다. 8월 17일 평양역에서 열차로 도주하려던 일본군은 적위대에게 붙잡혔고, 이어 평천리 병기공장, 선교경찰서, 대동강역 등 주요 시설을 쟁취했다. 평양감옥도 점거되어 정치범으로 분류된 독립운동가 3,000여 명이 석방되었다.

전국 각지에서의 자치와 봉기

함흥, 혜산, 강계, 사리원, 신의주, 경성 등지에서도 유사한 양상이 벌어졌다. 함흥과 원산을 포함한 함경남도 3개시와 16개 군, 129개 면 전역에는 8월 16일부터 31일 사이에 인민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신의주에서는 2만 명이 봉기하고, 삭주에서는 조국광복회가 중대광산을 접수했다. 안변에서는 반일청년회가 군청, 면사무소, 은행을 장악했고, 이천과 해주에서도 유사한 점령과 자치조직 결성이 이루어졌다.

항쟁과 권력 창출의 결합

이러한 전민항쟁은 단지 일본군에 대한 물리적 저항을 넘어서, 새로운 권력을 창출하는 정치적 실천이었다. 경찰서와 면사무소, 신사, 우편국, 은행, 방송국 등 식민통치 기반을 파괴하고, 인민위원회를 세워 치안, 행정, 경제를 스스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는 ‘무정부 상태의 해방’이 아닌, ‘조직화된 자력해방’이었다.

김일성 사령관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45년 8월에 우리나라에서 적 통치체계가 왜 그렇게 빨리 허물어졌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전민항쟁 조직들이 도처에서 들고 일어나 일본사람들이 틀고 앉아 있던 통치기관을 철저히 짓부수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1945년 8월 13일부터 23일까지 단 열흘 사이에, 전국 1,000개소에서 반일시위와 무장봉기가 벌어졌다. 전민항쟁은 단지 조선인민혁명군의 군사작전 보조가 아니라, 해방의 실질적 동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