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특집③] 해방의 진실을 가린 ‘원자탄 신화’

2025-08-14     편집국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해방을 맞이했다. 그러나 이 해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는 지금까지도 역사 논쟁의 중심에 서 있다.

많은 이들이 해방을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와 일본의 항복’이라는 국제정세의 부산물로 간주한다. 이는 이른바 ‘타율해방론’이다.

반면, 조선인민혁명군의 무장투쟁과 전민항쟁, 그리고 소련의 대일 참전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우리 민족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해방을 쟁취했다는 ‘자력해방론’이다.

타율해방론은 대체로 원자폭탄 투하를 해방의 결정적 계기로 삼는다.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고, 일본이 이에 굴복하면서 전쟁이 종결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서사에는 우리 민족의 항일투쟁, 특히 무장투쟁의 역할이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해방을 외부에 의해 ‘선사된 것’으로만 보는 이 시각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주체성과 투쟁의 정당성을 지워버린다.

그러나 당시의 국제정세를 냉정히 들여다보면, 일본이 항복하게 된 결정적 요인은 단지 원자폭탄의 물리적 파괴력에만 있지 않았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와 한반도 북부로 대대적인 공세를 전개하였다. 동시에 조선인민혁명군은 김일성 사령관의 지휘 아래 최후공격작전을 개시하여, 회령·온성·나남·청진 등지의 일본군 통치기관을 실질적으로 붕괴시켰다. 이 작전은 단순한 게릴라전이 아닌, 정규전에 준하는 수준의 작전이었으며, 전략적으로도 소련군과 연계되어 있었다.

일본은 이러한 북방의 공세에 크게 동요했다. 기존의 일본군 최고지도부는 소련군의 급속한 남하와 한반도 북부에서의 조선인민혁명군 진공을 실질적인 위협으로 간주했고, 이는 미국을 통해 조기 항복을 모색하게 만든 배경이 되었다. 다시 말해, 일본은 소련에 항복하지 않기 위해 서둘러 미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것이다. 한반도 북부에서의 군사적 붕괴는 제국 일본에게 치명적인 전략적 타격이었다.

자력해방론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다. 김일성 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민혁명군은 단순히 일제에 맞선 무력 저항을 넘어, 해방 이후 사회체제까지 준비한 정치·군사 통합세력이었다. 이들은 국제 반파시즘 전선의 일원으로 중국 및 소련 공산당과 협력하며 우리 민족의 해방을 위한 연대를 실현해왔다. 따라서 자력해방론은 자주적 주체를 바탕으로 한 능동적 연대의 결실이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해방은 결코 외세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한반도를 끝까지 놓지 않으려던 제국주의 일본의 계획을 실질적으로 붕괴시킨 것은 바로 우리 민족의 무장투쟁이었고, 그 무게중심에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총공격과 각지에서 전개된 우리 민족의 봉기가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해방의 주역은 누구인가?”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와 일본의 항복은 분명 역사적 조건이었지만, 그것만으로 해방을 설명하는 것은 진실의 절반만을 말하는 것이다. 해방은 하늘에서 떨어진 선물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싸우고 피 흘리며 우리 민족이 쟁취한 역사였다. 바로 그 점에서, 자력해방은 자기만족을 위한 해석이 아니라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