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임나일본부설과 「광개토왕릉비」 비문의 진실

일제 식민사관 파헤치기 10 - 임나일본부설의 허와 실

2025-06-11     안광획 건국대 통일인문학 박사과정
▲ 임나일본부설을 반영한 왜곡된 지도

일제 식민사학에 의한 우리 역사 왜곡에 있어서 가장 큰 쟁점을 꼽자면 단연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設)이다. 4~6세기에 야마토(大和) 정권이 한반도 남부의 가야(임나)에 통치기관인 ‘임나일본부(미마나 미야케, 任那御宅)’를 설치하고 백제, 신라를 속국으로 삼았다는 이 황당한 주장을 일제는 ‘1억의 국민적 상식’으로 널리 홍보하며 조선 식민지배의 역사적 정당성으로 삼았다. 또한, 이를 역사적 사실로 만들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특히, 일제는 임나일본부설을 사실로 만드는 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광개토왕릉비』에 주목하고 이를 ‘분석’, ‘연구’하는 데 공을 들였다. 이번 글에서는 일제가 임나일본부설을 조작하기 위해 왜 그렇게 『광개토왕릉비』에 집착했는지 살펴본다. 또한, 일제의 『광개토왕릉비』 해석이 어떤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지, 『광개토왕릉비』에 등장하는 ‘왜’의 진실은 무엇인지도 살펴보자.

일본군 참모본부에 의한 『광개토왕릉비』 연구와 임나일본부설 조작

일제 식민사학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데 있어서 주요한 근거가 되었던 것은 『일본서기』, 『고사기』 등 일본의 고대 역사책이다. 식민사학은 『일본서기』 및 『고사기』에 기록된 전설 속 여왕인 신공황후(神功皇后)가 삼한을 정벌했다는 이야기나, 숭신기, 웅략기, 계체기 등의 기록에서 야마토 정권이 임나(가야)에 통치기관인 ‘미야케’를 설치하고 지방관인 ‘임나국사(任那國師, 미마나노 구니노 고노모찌)’를 파견했다는 내용 등을 바탕으로 임나일본부설을 제기했다.

하지만, 이는 한계가 명확했다. 야마토 정권이 임나(가야)를 지배했다는 기록은 자국 기록인 두 역사책에만 있고, 『삼국사기』·『삼국유사』를 비롯한 조선 역사책과 『한서』·『삼국지』 위지 왜인전 같은 중국 역사책에는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 거기다가 삼국시대 금석문(비석, 목간, 금속 도구에 새겨진 글씨 등) 역시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하는 내용은 발견된 것이 없었다.

이와 같은 중대한 한계에 부딪히자, 식민사학은 임나일본부설을 증명할 사료(역사 자료) 발굴에 나섰다. 자국 기록만으로는 임나일본부설을 밀어붙일 수 없으니 당대 사료를 통해 이를 ‘과학적으로’ 입증하고 역사적 사실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임나일본부 ‘사료’ 발굴 사업은 일제의 조선 강점 및 대륙침략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지난 연재에서 살펴보았듯, 일본군 참모본부는 19세기 후반부터 공작원들을 한반도 및 만주 곳곳에 파견하고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할 사료 수집에 나섰다.

▲ 『광개토왕릉비』 탁본을 가져온 일본군 중위 사코 가게노부(좌)와 1910년대의 『광개토왕릉비』(중), 그리고 그가 가져온 탁본(쌍구본)의 신묘년 기사 부분

이런 가운데, 1880년에 조선-만주 국경지대인 길림성(吉林省) 집안(集安)에서 『광개토왕릉비』가 발견되었다. 비석 자체는 그 이전부터 『용비어천가』 등에도 언급되며 존재가 인식되었지만, 고구려 멸망 이래로 오랫동안 수수께끼의 대상이었다. 그러다가 청나라가 만주에 대한 봉금령을 해제하여 출입이 자유로워지면서 이 비석을 자세히 연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탁본 연구를 통해 마침내 이 비석이 고구려 광개토왕의 업적을 칭송하고 왕릉 관리 및 제사(수묘)에 대해 기록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일본군 참모본부는 집안에서 『광개토왕릉비』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놓치지 않았다. 일본군 참모본부는 육군 중위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를 조선-만주 국경에 공작원으로 파견해 『광개토왕릉비』를 조사케 했다. 사코 가게노부는 집안에서 『광개토왕릉비』 쌍구본(탁본 원본에 종이를 대어 종이 뒤로 비치는 글자를 따라 연필로 윤곽선을 그리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먹으로 칠해 만든 모사본) 하나를 얻을 수 있었고, 1884년에 일본으로 가져왔다.

사코가 가져온 『광개토왕릉비』 탁본을 본 일본군 참모본부는 그야말로 세상을 다 가진 듯 환성을 터뜨렸다. 어쩌면 자신들이 그토록 찾던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할 당대 사료일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었다. 이에, 일본군 참모본부에서는 요코이 다다나오(橫井忠直)를 위시한 역사학자와 한학자(漢學者)들을 총동원해 5년 동안 해독 작업에 나섰고, 1889년에 그 해독 결과를 5권으로 구성된 학술지 『회여록』에 발표했다.

또한, 간 마사토모(菅政友), 나카 미찌요(那珂通世), 미야케 요네키찌(三宅米吉) 등의 역사학자들은 『회여록』에 수록된 『광개토왕릉비』 탁본 해석본을 바탕으로 임나일본부설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여러 논문들을 발표했다.

“백잔(百殘, 백제)과 신라는 예로부터 (우리의) 속민으로서 조공을 바쳐왔다. 그런데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잔, OO,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 - 일제가 발표한 『광개토왕릉비 신묘년(391년) 기사 해석

당시 일본군 참모본부와 식민사학은 『광개토왕릉비』의 신묘년(391년, 영락 1년) 기록을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할 결정적 근거로 내세웠다.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OO(일제는 이를 가야로 봤다), 신라를 깨뜨리고 신민으로 삼았다”는 해석만 놓고 보면, 마치 『일본서기』 및 『고사기』에 나오는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기록이나 임나일본부 설치 기록을 입증하는 것처럼 읽혔던 것이다.

일제는 『광개토왕릉비』 신묘년 기록에 따른 임나일본부설을 정설이자 역사적 사실로 못 박았고, 내지(일본)와 식민지 조선에서의 역사교육에도 그대로 가르쳤다. 그리고 이는 ‘일본과 조선은 같은 조상을 지닌 형제 민족’이라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의 주된 논리로 악용되었다.

신묘년 기사에 따른 임나일본부설은 당대뿐 아니라 해방 이후에도 남북 및 중국, 일본 역사학계 사이에서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임나일본부설에 따른 일선동조론의 해악도 컸지만, 일제가 증거로 내놓은 신묘년 기사를 믿을 수 있느냐가 가장 큰 문제였다.

일제가 내놓은 해석은 『삼국사기』를 위시한 역사책이나 당시 정황과 전혀 맞지 않는데 이를 그대로 믿어야 하느냐는 근본적인 지적이었다. 정인보를 위시한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신묘년 기사의 주체를 ‘왜’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며 식민사관의 해석에 의문을 던졌다.

그리고 해방 이후 남북 학계는 물론 중국, 일본 학계에서 신묘년 기사의 의미를 새롭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오늘날까지도 『광개토왕릉비』 신묘년 기사는 첨예한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광개토왕릉비』 신묘년 기사의 진실: 신묘년 기사는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하지 않는다

▲ 광개토왕 표준영정(좌)와 광개토왕 시기 고구려의 군사활동 지도(우)

일제강점기에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하는 증거로 악용되었고 오늘날에도 해석을 두고 논란이 끊이지 않는 『광개토왕릉비』 신묘년 기사.

과연 이 기록은 일제가 주장한 대로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일까? 일제의 주장이 성립하려면, 다음과 같은 전제조건이 해명되어야 한다.

1) 『광개토왕릉비』의 주체는 누구인가?
2)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왜가 야마토 정권을 뜻하는가?

첫 번째 조건부터 일제의 주장은 논파된다. 『광개토왕릉비』가 어떤 비석인가? 고구려인들이 광개토왕의 업적을 칭송하고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애초에 임나일본부와는 전혀 관련 없는 비석이다. 또한, 비문의 주체도 당연히 광개토왕과 고구려이며, ‘왜’는 단지 고구려에 쳐들어왔다가 격파되는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점을 감안하여 신묘년 기사는 “고구려가 OO(바다? 패수?)를 건너 백제와 연합해 쳐들어온 왜를 격파하고 신라를 OO1)해서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해야 한다. 이를 무시하고 일제는 “신묘년에 왜가 왔다(而倭以辛卯年來)” 구절에만 주목해 주객이 전도된 엉터리 해석을 내놓고 임나일본부설의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1) 조선(북) 학계에서는 이 구절을 ‘고구려가 신라를 초유(招諭, 임금 또는 상국이 신하에게 불러서 타이르는 것)했다’라는 내용으로 해석한다. 당시 신라가 백제-가야-왜 연합군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하자 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고, 고구려가 이를 받아들여 백제-가야-왜를 물리쳐 신라를 구원하고 고구려 영향 아래 두었던 사실과 맞물려 이 해석은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조건은 임나일본부설의 성패 여부와 밀접하게 관련있다. 특히, 『광개토왕릉비』의 ‘왜’를 야마토 정권으로 보는 것은 일제 식민사학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관성처럼 여겨져 왔다. 그러나 이 역시 역사적, 고고학적으로 충분히 논파된다. 광개토왕이 활약하던 4세기 말~5세기 초에, 야마토 정권은 아직 기내(畿內, =긴키 또는 간사이) 지방에 머물러 있었고 서부 일본을 통일하지도 못했다.

“대업(양제) 4년(608), 문림랑 배청(拜淸)이 왜국에 갔을 때 백제를 거쳐 (중략) 동쪽 일지국(一支國, 이키섬)에 이르고 또 죽사국(竹斯國, =쯔쿠시국(築紫國), 오늘날 후쿠오카현)에 이르렀다. 또 동쪽으로 가서 진왕국(秦王國)에 이르렀다. (중략) 죽사국으로부터 그 동쪽에 있는 나라들은 모두 왜를 섬긴다.” _『수서』 왜인전 중

심지어, 『수서』 왜인전에 따르면 7세기에도 야마토 정권은 북규슈 일대까지만 통합했고 규슈 서남부는 여전히 독립 세력이 존재했음을 시사하는 기록이 나온다. 7세기에도 이러한데, 4~5세기에 야마토 정권이 서부 일본을 통합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 로오지 무덤 출토 판갑옷(좌)과 스키자키 무덤 출토 철검 및 스키자키 무덤 내부(우)
▲ 경남 함안군 옥전 고분군 출토 판갑옷과 고리자루큰칼. 위의 북규슈 출토 유물과 비교해보면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또한, 고고학 발굴에 따른 유적·유물도 이를 뒷받침한다. 『광개토왕릉비』에 기록된 ‘왜’의 근거지로 추정되는 북규슈(후쿠오카현, 사가현) 일대에는 로오지(老司) 무덤, 스키자키(鋤崎) 무덤, 이마주쿠 오오쯔카(今宿大塚) 무덤 등 4~5세기에 조성된 여러 무덤 및 유적들이 있다.

이들 유적을 발굴해 보니 한반도, 특히 백제·가야 유적에서 출토된 것과 동일한 철제 무기, 마구류, 질그릇 등이 발견되었다. 반면, 야마토 정권의 중심지였던 오사카-나라 일대에선 이와 같은 유물은 아무리 시기를 일찍 잡더라도 5세기 말~6세기 초 이후의 무덤 및 유적2)에서만 나오고 4세기 말~5세기 초 유적3)에선 전혀 찾아볼 수 없다.

2) 오사카 남부에 소재한 다이센 무덤(大仙古墳, 일명 ‘인덕천황릉’), 곤다야마 무덤(譽田山古墳, 일명 ‘응신천황릉’) 등이 대표적이다.

3) 나라현 가쯔라기시(葛城市) 무로노 오오하카(室の大墓) 무덤, 오사카부 후지이데라시(藤井寺市) 나카쯔야마(仲津山) 무덤 등.

야마토 정권이 서부 일본을 4~5세기에 통합했다면 북규슈 유적·유물 연대가 기내지방보다 늦거나, 출토된 유물들에 기내 야마토적 성격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발굴 결과에서는 정반대로 한반도와 가까운 북규슈에서 기내지방보다 훨씬 선진적인 한반도 계통 유물이 나온 것이다. 이를 보더라도, 광개토왕이 활약하던 4~5세기에 백제와 손을 잡고 고구려를 공격한 ‘왜’는 야마토 정권과는 무관하며, 오히려 백제·가야로부터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기내지방의 야마토 정권보다 훨씬 앞서가던 세력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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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자면, 『광개토왕릉비』 신묘년 기사는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하지 않으며,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왜’는 기내 야마토 정권과는 전혀 무관하다(그 정체에 대해서는 다른 글을 통해 살펴보자). 이로써 일제가 『광개토왕릉비』 신묘년 기사를 내세워 조작한 임나일본부설은 완전히 파탄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일제의 주장, 즉 『광개토왕릉비』의 ‘왜’가 야마토 정권이라는 관념에서 빠져나오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글에서 살펴봤듯이 4~5세기에 야마토 정권은 북규슈까지 통합하지도 못했고, 『광개토왕릉비』의 ‘왜’는 야마토 정권과 무관한 독자 세력이었다. 진정 임나일본부설과 그 폐해를 극복하자면, 고대사 기록에 나오는 ‘왜’가 시기를 불문하고 야마토 정권이라는 편견부터 깨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