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정하는 이유

일제 식민사관 파헤치기 9 - 일제 식민사학이 삼국 건국연대를 늦춘 이유

2025-05-29     안광획 건국대 통일인문학 박사과정
▲ 『삼국사기』

이전 글들에서도 보았듯, 일제 식민사학은 우리 역사를 날조, 왜곡하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특히, 일제 식민사학은 삼국의 건국연대가 수록된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초기 기록들을 ‘믿을 수 없는 엉터리 기록’으로 부정하는 데 공을 들였다. 이번 글에서는 일제 식민사학이 어떤 근거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정했는지, 왜 이들은 삼국의 건국연대를 늦추고자 했는지 살펴보려 한다.

실증, 과학과 거리 멀었던 일제의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부정

식민사학은 조선 역사 연구에서 실증주의, 과학적 검증을 잣대로 내세웠는데, 그중 하나는 역사 기록에 대한 검증이었다. 다만, 이 당시엔 아직 고고학 유적·유물 발굴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이전이었기에 식민사학이 주로 사용한 방법은 같은 시기 외국(중국, 일본 등) 기록과 비교하여 검증하는 문헌고증이었다.

특히, 일제가 문헌고증의 대상으로 눈독을 들인 기록은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역사를 담은 『삼국사기』였다. 신화 및 설화적 성격이 강한 『삼국유사』는 간단하게 ‘신화’ 또는 ‘전설’로 치부해 무시할 수 있었지만, 『삼국사기』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엄연한 ‘정사(正史)’이므로 무턱대고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식민사학은 『삼국사기』의 사료적 가치를 일정 부분 인정하면서도 적잖은 부분에 대해 믿을 수 없다는 식의 부정하는 방향으로 ‘문헌고증’에 나섰고, 바로 여기서 고구려-백제-신라 건국연대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정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식민사학은 ‘삼국의 건국설화는 허황되어 믿을 수 없다’, ‘중국 및 일본사서와 비교해 보니 사실관계가 맞지 않다’, ‘삼국의 초기 기록은 최소 200년 정도가 끌어 올려졌다’, ‘삼국 초기 국왕들은 대부분이 후대의 사람 이름을 조작하여 만들어진 허구의 인물들이다’ 등의 주장을 내세우며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정하고 폄훼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실제 건국연대를 서기 4~5세기경으로 늦추면서 삼국의 역사를 반토막 냈다.

▲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부정을 주도한 두 식민사학자 나카 미찌요(좌), 쯔다 소키찌(우)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부정 작업은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기 이전부터 기획되었다. 1896년 일본의 동양사학자 나카 미찌요(那珂通世)는 도쿄제대 사학회 학술지에 게재한 저서 『조선고사고(朝鮮古史考)』에서 “「고구려본기」의 태조왕(재위 47~165년) 이전 왕대는 (믿기 어려우니) 탈락시켜야 하며, 「신라본기」의 흘해이사금(재위 310~356년) 이전, 「백제본기」의 계왕(재위 344~346년) 이전 연대 역시 믿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나카 미찌요가 불붙인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은 일제 강점 이후 더욱 본격화되었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는 쯔다 소키찌(津田左右吉)이다. 쯔다는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은 대다수가 가짜라고 주장했다. 세부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쯔다는 고구려의 경우 『삼국사기』에 수록된 6대 태조왕 이전 국왕들은 『후한서』, 『삼국지』 「위지동이전」 등 중국사서에 나오지 않으므로 실존하지 않는 가짜 인물이었다고 보았다. 또, 태조왕-차대왕-신대왕의 100세가 넘는 비정상적인 수명과 국왕의 시호가 일정한 규칙 없이 무분별하게 붙여진 것도 조작의 증거라고 주장했다.

백제의 경우에도 쯔다는 백제의 시조는 서기 2세기경 인물인 구태(仇台, 쯔다는 이를 고이왕으로 보았다)이며, 그 이전의 기록은 후대 국왕(근초고왕, 근구수왕, 개로왕)의 이름을 따오거나 신라 건국연대에 맞춰 끌어 올렸다는 식으로 조작됐다는 주장을 펼쳤다.

신라의 경우, 쯔다는 신라 초기 국왕들이 중국 사서에 없으므로 조작된 인물이며, 특히 2대 남해차차웅이 4대 탈해이사금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은 중국 신화에서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준 설화를 차용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외에도, 『삼국사기』 「백제본기」 및 「신라본기」에서의 왜(倭) 관련 기록은 『일본서기』나 『고사기』와 전혀 맞지 않으므로 전부 가짜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논거를 바탕으로 쯔다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 식민사학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정하기 위해 시도한 검증은 과학이나 실증과는 거리가 멀었다. 먼저,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역사를 연구한다면서 그 기준을 삼국이 아닌 중국, 일본 등 외국 기록에서 가져온다는 발상은 매우 비과학적이고 비주체적 태도이다. 같은 시기 기록이라 하더라도 자국 기록이 아닌 외국의 기록은 철저히 외부인의 관점과 입장에 따르며, 정확도나 공정성도 자국 기록에 비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한계를 무시하고, 삼국의 기록이 『삼국사기』, 『삼국유사』 외엔 전해 오는 것이 적으니 중국, 일본 등 외국의 기록을 가져와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관점은 과학적이지 않다.

더군다나, 엄연히 자신들이 발견한 고구려인들이 남긴 기록 『광개토왕릉비』가 있는 마당에 『광개토왕릉비』는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중국과 일본의 기록만을 기준의 잣대로 세운 것이다. 그로 인한 문제점은 쯔다 소키찌가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펼치는 논거에서도 잘 드러난다. 쯔다는 『광개토왕릉비』를 통해 시조 추모왕(고주몽)과 유류왕, 대주류왕 등 3명의 초기 국왕이 확인됨을 인정했다. 그러나, 정작 뒤에서는 고구려의 실제 시조는 태조왕이며, 그 이전 국왕들은 조작됐다고 주장하는 모순된 태도를 보였다.

또한, 식민사학이 내세운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의 주장들도 대부분 명확한 근거를 바탕으로 내놓은 것이 아니라 추측, 추정에 불과한 것들이다. 식민사학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들이 조작되었고 믿을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그 주장을 펼칠 때 ‘~인 것 같다’, ‘~였을 것이다’, ‘중국의 OO 설화 또는 경전 기록과 유사하다’ 등의 추측성 용어들을 남발했다. 명확한 근거 없이 추측 및 추정만으로 거짓으로 몰아붙인 꼴이다.

▲ 삼국 초기 역사를 입증하는 유적, 유물의 발굴. 좌: 한성백제 수도 풍납토성의 발굴(『연합뉴스』 2011.11.29.), 우: 울진 봉평리 신라비(ⓒ국가유산포탈)

그리고 시간이 지나 삼국시대 유적, 유물에 대한 고고학 발굴이 속속 진행되면서, 『삼국사기』 초기 기록들도 점차 하나둘씩 입증되고 있다. 1990년대 말에 서울 송파구에 소재한 풍납토성 발굴이 진행되면서 3세기 이전 백제 유물들이 출토되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기록된 초기 한성백제의 위상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또한, 『울진 봉평리 신라비』(1988년 발굴), 『포항 냉수리 신라비』(1989년 발굴) 등이 발굴되면서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기록된 초기 신라의 6부 체제나 마립간(매금왕) 왕호 등이 사실로 밝혀졌다. 즉, 문헌고증에 의존해야 했던 이전과 달리 유적, 유물 같은 물적 증거를 통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신빙성이 증명되고 일제 식민사학이 내세운 초기 기록 불신론이 점점 깨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식민사학이 ‘실증주의’와 ‘과학적 검증’을 내세우며 제기한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은 과학, 실증과는 거리가 먼 왜곡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고고학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 그 허구성이 점점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다.

왜 그들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에 집착했을까?

▲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을 묘사한 그림

그렇다면 왜 식민사학은 그토록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정하고 폄훼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까? 여기에는 우리 역사를 일본 역사보다 훨씬 뒤처진 것으로 만들어 우리 민족의 민족성을 말살시키고 식민지배 정당성을 강화하고자 했던 의도가 짙게 깔려있다.

일반적으로, 일본에서의 역사시대는 야마토(大和) 정권이 서부 일본을 통합해 가던 5세기, 혹은 646년 대화개신(大化改新)을 통해 천황 중심 중앙집권체제를 마련한 때부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일본의 고대사는 아무리 빨라도 5세기, 늦으면 7세기로 한참 늦게 시작된 것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 민족은 첫 고대국가인 고조선은 기원전 30세기경에 형성되었고, 일반적으로 우리가 ‘고대’로 보는(조선 학계에선 중세봉건제 국가로 본다) 고구려-백제-신라의 경우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1세기 이전에 건국되어 일본보다 훨씬 역사시대가 빨랐다.

당연히, 일제 식민사학은 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이를 그대로 인정하면 일제의 식민지배 기반이 뿌리째 흔들릴 뿐 아니라 ‘천황의 만세일계’도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일제는 앞선 글에서 보았듯 고조선은 ‘실존하지 않는 전설 속 국가’로 치부해 버렸고,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정함으로써 삼국의 역사를 반토막 내서 일본보다 훨씬 뒤처지게 만든 것이다.

특히, 식민사학의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은 임나일본부설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식민사학은 야마토 정권이 4~5세기에 한반도 남부 가야를 정복해 식민지로 삼고, 백제, 신라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일본서기』, 『고사기』 기록을 근거로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임나일본부에 대해선 어떠한 언급도 없고, 오히려 삼국이 일본에 문명을 전파했다는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즉, 『삼국사기』를 인정하면 임나일본부설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를 타개하고자, 식민사학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철저히 부정하고, 『일본서기』는 추켜세운 것이다. 당연히 이는 정치적 논리를 앞세워 과학을 부정한 반역사적인 행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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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식민사학은 삼국의 역사를 반토막 내 우리 역사를 일본보다 뒤처진 것으로 만들고 임나일본부설을 사실로 만들고자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내세웠다. 이 과정에서 식민사학은 ‘실증주의’와 ‘과학적 검증’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상은 추측과 모순, 확증편향으로 점철되어 과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쉬운 점은, 우리 역사학계가 일제가 내세웠던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현행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여전히 ‘삼국은 기원전 1세기에 연맹체 국가로 형성되어 주변 소국들을 통합해 가며 3~4세기에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발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박물관에서는 기원전 1세기~서기 3세기 전시에서 ‘삼한시대’라는 표현이 사용되며,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시대 유물은 3세기 이후 유물부터 전시되고 있다. 즉, 교과서나 박물관 전시에선 여전히 ‘삼국의 건국은 기원전 1세기에 벌어졌으나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로 발전한 것은 3~4세기 이후이다’라는 관점이 적용되는 것이다. 과연 이렇게 보는 것이 옳은 태도일까? 진정 식민사관을 극복하자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