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그리고 세계의 극우주의

한국과 미국의 신구 극우주의 비교 ⓵

2025-04-10     김장민(정치경제학연구소 프닉스 연구위원)

I. 서론

신우익은 미국에서는 '네오콘(neocons)'으로, 일본에서는 '신우요쿠(新右翼)'로 불린다. 뉴라이트는 이것들과 같은 의미다. 미국의 경우 부시정권에서 부각되던 네오콘과 최근의 트럼프주의의 배경을 살핀다. 네오콘과 트럼프주의의 차이를 알아본다. 유럽의 경우 미국이 제국주의 전쟁을 일으킨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난민의 대규모 유입에 따른 부작용 측면에서 살펴본다.

한국에서 이승만 이후 전통적인 극우주의와 소련 붕괴 이후 뉴라이트 극우주의를 검토한다. 전통적 극우세력과 뉴라이트의 기원을 알아본다. 특히 뉴라이트의 흥망을 살핀다. 끝으로 개신교와 탈북자들의 극우조직화를 살펴본다. 종합적으로 미국과 한국의 신구 극우세력의 조직과 노선을 비교한다.

II. 미국의 네오콘과 트럼프주의

1. 네오콘

1) 네오콘의 역사적 진화

하버(William R. Harbour)에 의하면 보수주의는 신(神)과 질서 잡힌 우주를 강조한다. 이것이 관습과 전통의 존중으로 나아가 게 된다. 이는 인간의 불완전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인간이 무엇을 설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혁명, 사회주의를 포함하여 모든 종류의 유토피아니즘을 반대한다. 더 나아가 인민의 권력을 의미하는 민주주의도 불신한다. 즉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통제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며 따라서 엘리트의 중요성이 강조된다(이나미. 2004).

신보수주의 운동은 지난 50여 년 동안 미국사회에서 등장하고 있는 네 가지 유형의 우파운동의 일환이다. 그 네 가지 우파운동은 반공산주의 운동, 인종차별주의 운동, 기독교 복음주의 운동, 그리고 신보수주의 운동 등이 그것이다(남궁곤. 2004).

신보수주의 운동은 정식회원을 가진 조직이 아니다. 원래 신보수주의자들은 반공산주의라는 신념에 있어서는 일치된 견해를 보였다. 공산주의가 가져다 준 위협 때문에 그들은 일치된 정치 의제에 집중 할 수 있었고 통일된 견해를 가질 수 있었다. 보수적 유대인 집단, 기독교 근본주의, 군산복합체제론자 이외에 우파로 전향한 반공좌파 즉 반스탈린주의자들을 포함한다.

어빙 크리스톨, 그는 트로츠키주의에서 전향했다

보수주의자인 레오 스트라우스와 트로츠키주의에서 전향한 어빙 크리스톨이 네오콘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트로츠키주의 반공좌파는 노먼 포더리츠(Norman Podhoretz)가 편집자로 있던 친유대주의 저널 Commentary에 학문적 뿌리를 두고 있다. 이들은 반공좌파로서 민주당 내 반공좌파로 전향했으나 민주당이 소련 등 공산주의 세력과 미국 내 친소좌파에 미온적이라고 불만을 가졌다. 공산주의와 대결하는 베트남 전쟁에 비판적인 민주당 내 자유주의 세력을 비판하면서 미군의 반공경찰의 역할을 강조하는 공화당의 강경파로 전향했다.

‘신보수주의자(Neo-conservatives)’는 “구소련이나 반미 급진주의 집단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거부하는 좌파에 염증을 느끼고 우파로 전향한 사람들을 가리킨다(Frum, 1994). 좌파가 군사주의적 반공산주의, 자본주의 경제, 최소 복지국가, 전통적 엘리트에 의한 지배, 그리고 전통적 문화가치의 회복 등을 추구하게 되는 이념적 개종 현상”으로 정의된다.

신보수주의 첫 번째 시기는 1930년대 말로 뉴딜연합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빙 크리스톨(Irving Kristol) 등 초기 신보수주의자들의 사회주의 이념은 1930년대 후반 뉴욕시립대학(City College of New York)에서 트로츠키 집단에 참여함으로써 유지되었다. 당시 뉴욕시립대학에 스탈린주의자들은 트로츠키안보다 수적으로는 세 배 정도가 많았다.

신보수주의 변화의 두 번째 시기 1960년대 후반 신보수주의자들은 기존의 제도와 사고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보수주의와의 제휴가 필요했다. 그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은 공산주의를 비판하지 않는 자유주의 지식인들을 공격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공공선의 확보를 위해 신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을 도덕적 가치의 수호신으로 자처하고 나섰다. 그들이 사회에 진출한 이후인 1960년 후반 사회주의를 포기했다(Gerson, 1997: 21-23).

1976년 신보수주의자들을 비롯한 민주당 내 보수적 경향의 지지자들은 잭슨(Henry Jackson) 후보를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지하였지만 무명의 카터에게 패배하였다. 당시 미국은 국내적으로 높은 인플레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대외적으로는 이란 인질사건, 니카라과 좌익 혁명, 소련의 아프간 침공 등의 외환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보수주의자들은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갈아탔다.

신보수주의 변화의 세 번째 시기는 대체로 레이건 대통령 시기이다. 대부분의 신보수주의자들은 학계에서 벗어났다. 그들은 공화당 행정부에서 고위직을 쫓아 현실참여를 그들의 실천 방안으로 삼았다. 펄(Richard Perle)과 울포위츠(Paul Wolfowitz)를 비롯해서 많은 신보수주의자들이 정치권과 연계하여 네오콘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신보수주의 변화의 네 번째 시기가 시작된 것은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기이다. 특히 2001년 9∙11 테러는 신보수주의를 미국 조야에 등장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Halper and Clarke, 2004: 40- 42). 2004년 부시 대통령의 재선 과정에서 신보수주의자들은 기독교 복음 세력과 연합하는 양상도 나타났다. 체니(Dick Cheney) 부통령이나 럼스펠드(Donald Rumsfeld) 국방장관을 비롯한 전통적 공화당 강경파 참모진은 신보수주의 사고와 양립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이들은 1997년 신보수주의 핵심 문서로 꼽히는 ‘새로운 미국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 (PNAC: Project for New American Century)’성명에 서명하는데 동참하였다. 이들의 지지가 없었다면 신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의제들이 현실 미국 정치외교에서 현안으로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Halberstam, 2002: 86-94).

2) 소련 붕괴 이후 보수주의 분화

신보수주의 지식인 운동은 냉전의 종식과 함께 이념의 균열 현상을 가져온 점이 주목된다. 공산주의의 붕괴는 신보수주의자들로 하여금 그들 사이의 의견 불일치와 동맹관계의 균열을 가져다주었다. 현실주의(Realist)는 신보수주의의 주류 캠프로서 크리스톨(Irving Kristol)과 컬크패트릭(Jeane Kirkpatrick)에 의해 주도되는 당파이다.

이들의 외교적 주장은 일방주의와 현실주의로 요약된다. 이들은 냉전이 끝났다고 해서 신보수주의가 믿어왔던 신념이 바뀔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미국 외교에는 강한 미국적 도덕주의가 반영되어야 하며 필요하다면 고립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다.

이들에는 민주적 세계주의자(democratic globalist)가 제일 많다. 무라브직(Johshua Muravchik) 등이 이 집단의 대표로 꼽힌다. 덱터(Midge Dector)의 주장에 의하면 우리 개입주의자의 생각에는 미국은 강력한 군사력을 지니고 세계를 안정시킬 책무를 갖는다. 이들에 의하면 신보수주의의 진정한 계승은 십자군 정신에 의 해서만 가능하다. 신보수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제국, 민주주의 제국에 매진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미국이 세계의 민주주의를 지켜내야 할 책무는 바로 미국의 개입주의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세 번째 단극주의 (Unipolarism)는 미국 외교의 목표가 민주주의 확산이라는 점을 인정하지만 그에 접근하는 방식은 다르다. 민주적 제국론자들이 주변국가에 집중하여 어떻게 하면 그들을 민주화시킬 것인가에 초점을 두고 있는 반면, 단극주의자들은 관심을 서구 중심국가에 초점을 둔다. 크라우트햄머(Charles Krauthammer)가 주장하기를 공산주의 붕괴는 미국이 담당할 책무의 구조를 변화시켰다.

미국의 첫 번째 책무는 제삼세계 국가들의 민주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구 산업국가들의 단결에 있다. 서구국가들의 단결이야말로 미국의 이익을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 서구 국가들은 자신들 스스로가 정치경제적으로 자유화함으로써 각자가 단극체제에서 중심에 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헌팅턴(Samuel Huntington)은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을 통해 미국인들이 지난 350년 동안 모든 인종과 민족, 종교를 끌어안았던, 그리고 자신들이 세상을 위해 추구하던 자유와 단결, 힘, 또 도덕적 리더십의 원천인 앵글로-개신교도 문화와 전통, 그리고 가치관에 다시 한번 헌신해야 한다고 믿는다. 또 “미국인들은 늘 자신들의 국가를 기독교 국가라고 생각하면서 모든 종교들이 전통적인 유대-기독교 도덕성에 합치하기만 하면 그것들을 똑같이 인정해 왔다.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현실적인 지위의 완전한 평등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고 회고하면서 어빙 크리스톨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이에 비해 소로스(George Soros)는 《미국 패권주의의 거품》을 통해 신보수주의의 문제점을 첫째, 그들의 노력이 미국 대외정책이 전통적으로 지녀왔던 ‘균형’에서 벗어나 외교정책의 불연속성을 가져왔고, 둘째, 참여자로서 인간은 정도와 특성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어느 부분에선가 분명 잘못을 저지르게 되는 칼 포퍼의 근본적 오류의 공리(postulate of radical fallibility)에 빠져 있다는 데서 찾고 있다.

2. 트럼프주의

트럼프주의는 우익 포퓰리즘, 국가 보수주의, 신민족주의, 신파시즘과 같은 광범위한 우익 이데올로기로 구성되어 있다. 청교도적인 금욕주의, 소수자와 외국인 혐오, 인종차별, 기독교 민족주의자, 보호무역, 반페미니스트, 주류 언론에 대항하는 음모론과 가짜 뉴스 등을 포함한다.

‘마가’(MAGA)는 트럼프의 2016년 대선 구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의 약자이다. 이는 미국의 세계경찰의 지위를 강화하기 보다는 미국 국내 문제, 미국의 경쟁력을 강화하자는 의미이다.

트럼프주의자는 권위주의를 따르며 대통령의 권한이 헌법이나 법치주의에 의해 제한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기존 매체를 혐오하고 소셜미디어 등 신매체에 의한 대중 선전을 중시한다. 엘리트 정치에 식상한 대중들을 선동하여 기존 정치권 전체를 공격한다.

개인숭배와 집단최면의 대중전술을 구사한다. 2020년 10월 여론조사에서 공화당원과 공화당 성향 무소속자의 58%가 자신을 공화당보다는 트럼프 지지자로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화당원 4명 중 3명은 대선 개표 조작 등 음모론을 믿고 있으며 거의 절반이 대선 결과를 최종 발표하는 국회 공격에 대해 묵시적 지지를 표시했다.

파시즘이나 나치즘은 협소한 영토와 적은 인구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제국주의를 추구하나 트럼프는 현재로서는 군사적 제국주의를 추구하지는 않는다. 트럼프는 1기 때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를 결정했으며, 우크라이나와 중동에서 군사비 지출에 반대한다. 두 전쟁을 중단하는 협정을 당사자국가에게 강요하고 있다. 조선과 협상하는 등 군사적 부담을 줄이고자 한다.

나토 탈퇴를 언급하는 등 외국 분쟁에 대한 개입을 반대하며, 나토와 아시아동맹에 대한 비용지출에 반대한다. 동유럽, 대만, 한국 등 외국에 개입할 때는 방위비 분담 등 상대방에게 분명한 대가를 요구한다. 트럼프는 향후 5년 동안 매년 8%씩 국방비 감축을 선언했다. 인도태평양지역과 전략무기 분야는 오히려 늘 예정이므로 예산감축 수준을 준수하려면 유럽사령부와 중동사령부가 상당히 축소될 것으로 보인다. 외국군과 합동군사훈련도 축소할 것으로 보인다.

외교는 국익에 철저한 고립주의 노선이나 파나마 운하와 그린란드, 캐나다에 대해 트럼프의 병합야욕처럼 국익에 부합한다면 예외적인 개입을 허용한다. 예멘에 대한 폭격이나 이란에 대한 폭격협박에서 보듯이 국익을 위해 군사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트럼프는 바이든의 제국주의 정책을 뒤집고 있지만 반대로 이란핵합의 파기, 쿠바와 베네수엘라에 대한 적대정책 등 바이든의 선린정책도 뒤집고 있다.

나치와 파쇼에서 보듯이 민족주의는 시간이 지나면 국내중심정책에서 방향을 틀어 제국주의 침략정책을 노골화하는 경향이 있다. 트럼프가 4년 밖에 집권하지 못한다는 측면에서 고립주의에서 제국주의로 급전할 가능성이 적다. 하지만 트럼프는 군사적 침략 수준은 아니지만 무역전쟁, 관세전쟁을 통해 경제적 침략을 가시화하고 있다. 과거의 제국주의도 처음에는 경제적 침략을 하다가 군사적 침략으로 그 성격을 변질한 바 있다.

트럼프 자신이 군사적 침략으로 선회할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트럼프주의가 공화당에 계승된다면 그 후계자는 경제적 침략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군사적 침략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미국의 고립주의는 국익을 위해 내치에 힘쓰지만 필요하다면 개입주의보다 더 강경한 군사적 수단을 동원해왔다.

미국에서 사양산업인 전통적인 굴뚝산업의 자본가와 노동자들이 트럼프를 지지한다. 백인의 블루칼라는 경공업은 중국, 첨단산업은 미국이라는 미국 기득권의 신자유주의 전략의 피해자이다. 따라서 국제분업에 반대하며 전통적 산업국인 중국, 한국 등 공업국가들이 미국의 일자리를 뺏고 있다고 본다. 트럼프는 중국은 물론 동맹국에 대해서도 관세전쟁을 시작했다. 다만 미국은 캐나다, 멕시코, 한국 등 동맹들과는 자유무역협정을 맺고 있어 실제 관세 충격은 다소 완화될 것으로 보인다.

유럽에서 중동전쟁에 따른 난민 유입에 반대하는 외국인 혐오증이 증가하듯이 미국에서 중남미의 사회적 경제적 난민이 유입에 반대하는 외국인 혐오증이 증가한다. 이주민과 불법체류자는 저임금 노동시장에서 가난한 백인과 경쟁하기 때문에 저학력 백인들은 국경 봉쇄를 요구하는데, 트럼프가 강경론을 펼치면서 백인노동자의 지지를 얻고 있다. 엥글로색슨 계열뿐만 아니라 라틴계열 중 미국의 시민권을 얻어 백인노동자와 같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경우도 트럼프를 지지한다.

트럼프는 미국의 기독교 전통을 옹호한다. 백인, 기독교, 육체노동자가 트럼프의 지지기반이다. 2016년 선거 출구 조사에 따르면 유권자의 26%가 자신을 백인 복음주의 기독교인으로 식별했으며 그 중 4분의 3 이상이 트럼프를 지지했다(Pew Research Center).

브라질의 Jair Bolsonaro, 네덜란드의 Geert Wilders, 터키의 Tayyip Erdoğan, 헝가리의 Viktor Orbán, 남아프리카의 Jacob Zuma, 일본의 Shinzo Abe, 아르헨티나의 Javier Gerardo Milei 및 한국의 윤석열이 파퓰리즘, 반공, 가부장, 주료 세력 비판 등의 측면에서 트럼프주의에 가깝다.

III. 유럽 극우

1. 중동과 우크라이나에서 난민 양산하는 미국과 나토의 전쟁정책에 반발

전쟁과 생활고에 시달린 유럽 유권자들이 탈미를 강조하는 극우정당을 선택하고 있다. 유럽연합(EU) 선거에서 기존 좌우정당과 녹색당이 패배하고 극우 진영이 약진했다. 녹색당-유럽자유동맹(Greens/EFA)은 2019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71석을 얻었으나, 이번 선거에선 53석 확보에 그쳤다. 반면 유럽보수와개혁(ECR)과 극우인 정체성과민주주의(ID)는 각각 73석, 58석으로 2019년보다 총 12석 늘었다.

각국 극우정당들이 공통적으로 내건 슬로건이 반이민이지만, 그 본질은 전쟁으로 인한 생활고이다. 극우는 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난민 유입, 극단주의 테러 증가 등으로 인한 사회불안을 아젠다로 활용했다. 좌파는 생활고가 미국의 전쟁 정책으로 인한 것임을 각인시키는 것에 실패함으로써 유권자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결국 이번 선거 결과에 대한 본질적인 원인은 경제난에 대한 각 정당의 정책에 대한 심판이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유럽에서 난민 증가, 물가인상, 고금리 등 생활고가 높아지자, 집권당에 대한 불만이 표로 나타난 것이다.

실제로 이번 선거 직전 설문조사에서 독일의 30대 미만 젊은이들은 인플레이션(65%), 비싼 집값(54%), 노후 빈곤(48%), 사회 분열(49%), 불법이민 및 난민 증가(41%)을 현안으로 선택했다. 이밖에 고금리와 연금도 표심에 영향을 미쳤다. 생활고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좌우 정당들이 우크라이나 전쟁, 친환경 정책에 예산을 배정하는 것에 유권자들이 불만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일반 유권자들은 생활고 해결, 금리인하, 전쟁반대, 난민 유입을 막는 국경폐쇄 등을 요구하고 있다. 실제로 유럽중앙은행(ECB)이 선거 직전 6일 기준금리를 1년 11개월 만에 0.25%포인트 내렸다.

2. 경제난 겪는 서민들 “친환경 정책은 한가로운 소리”

녹색당의 부진 역시 전쟁으로 먹고 살기 힘든데, 기후 문제, 산업전환 문제가 너무 한가롭다고 여기는 유권자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유럽 각국은 재생에너지 확대와 2035년까지 신규 내연차 판매 금지 등 친환경정책이 속도를 조절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 중단으로 가격이 치솟은 가스발전소를 폐쇄하고 원자력발전소를 늘려 대체하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다. 농민들은 유럽연합(EU)의 친환경 규제에 항의해왔다. 경제성장 둔화, 물가 상승에 따른 생활비 위기 등으로 재정 압박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친환경 규제, 세금 부담까지 농민의 불만이 크다.

유럽의회 선거결과가 국내 선거에 반영되면 이탈리아에 이어 프랑스와 독일에도 극우세력이 집권할 수 있다. 프랑스 집권정당인 중도우파가 패배의 충격으로 조기총선을 선언했다.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이번 선거에서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가 이끄는 사회민주당(SPD)을 누르고 제2정당으로 발돋움했다. AfD는 2017년 총선에서 제3정당으로 부상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극우정당이 최초로 원내에 진출했다.

3. 미국에 종속된 유럽공동체, 해체냐 독자노선이냐

유럽의 민심은 미국의 중동과 동유럽에서 전쟁정책 반대, 미국으로부터 거리두기, 미국을 따르는 나토와 유럽연합에 대한 실망 등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이런 기조에서 프랑스의 RN이나 독일의 AfD가 이탈리아 극우정당인 이탈리아형제들(FdI) 등 전 유럽에서 독자노선이 강화될 수 있다.

프랑스 국민연합(RN)을 이끄는 마린 르펜은 물론 극우 당선자들 중 일부는 러시아, 중국과 밀접한 사이다. 이들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반대하고, EU의 국방비를 증가시키려는 미국의 정책에 저항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유럽 각국은 미중 경제전쟁에서 미국 편에 서기보다는 사안별로 중국과 협력하는 등 유럽의 이익을 추구하는 독자노선을 걷을 수 있다. 미국이 유럽연합과 나토에 계속 미국을 위한 경제정책과 안보정책을 강요할 경우 유럽공동체가 이완되거나 독자노선을 걷을 수 있다. 미국의 전쟁 정책이 유럽공동체를 위기로 몰고 가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미국의 전쟁정책 반대, 난민 유입반대라는 민중들의 주장이 극우로 평가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의 전쟁정책으로 인한 난민 증가 반대가 극우로 볼 수 없다. 유럽의 좌파들도 일반적인 이주반대와 전쟁으로 인한 난민 폭증 반대를 구별하지 못하고 극우로 폄하하면서 유권자의 정서를 읽지 못했다. 결국 이러한 전통적인 우파와 좌파의 한계로 인해 극우가 민심을 얻은 것이라고 봐야 한다.

트럼프가 나토무용론을 주장하면서 나토를 미국으로부터 독립된 유럽군사동맹체를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나토를 중시하기 때문에 트럼프의 임기가 끝난 후 미국과 나토의 결속은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미국의 나토에 대한 투자는 트럼프 이후에도 감소할 것으로 보인다.

IV. 한국의 반공파쇼와 반공친미

1. 반공파쇼

얼마전 3.1절에 자유통일당 등 보수단체가 주최한 집회에서 참가자들이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고 있다.

1948년 8월 15일까지 남한을 군사적으로 통치한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은 우익단체들을 육성했다. 그 이후 이승만과 군부 독재정권들은 이러한 우익단체를 기반으로 하여 민간 자율이라는 가면을 쓰고 국민들을 전국적으로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관변단체들을 만들어 지원해왔다.

1946년 11월 30일, 월남한 청년단체들은 서북청년단을 세웠다. 서북청년단은 1948년 4.3 항쟁 당시 제주도민을 학살해 사태를 악화시켰다. 서북청년단은 상당수가 미군정과 우파지도자에 의해 경찰과 군대에 편입됐으며 1948년 12월 대한청년단에 통합됐다. 남은 일부는 1949년 10월 18일에 단체등록이 취소되어 소멸됐다. 1949년 6월 당시 서북청년단 재건위원회 간부인 안두희는 백범 김구를 암살했다. 2014년 9월 28일 서북청년단 재건위원회를 자칭하는 무리들이 세월호 분향소를 철거하려고 난입했다. 그 며칠 뒤 재건위 위원장 배성관은 ‘일베’사이트에 “안두희의 김구 암살은 의거”라고 주장하는 글을 올렸다.

서북청년단의 후신격인 실향민중앙협의회는 최장집 교수의 한국전쟁관과 관련, 국방부에 여순반란사건, 제주4.3사건에 대한 공식적 입장을 밝히라고 요구하여 이 사건이 공산분자의 폭동이라는 국방부의 답변을 얻어내기도 하였다.

한국자유총연맹의 출발점은 1954년 당시 이승만대통령과 중화민국 장제스 총통이 주도하여 조직한 아시아민족반공연맹이다. 이 연맹의 한국 지부가 1956년 설립된 한국아시아민족반공연맹이다. 이 한국 지부가 1963년 '한국반공연맹법'제정으로 한국반공연맹으로 정식 출범했다. 반공연맹은 4.19 혁명 이후 자유당 외곽조진으로 지목되면서 해체 위기를 맞기도 하였으나 박정희 정권 출범 이후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시군구 지부를 둔 전국 조직으로 발전하였다.

1989년에는 반공연맹법이 폐지되고 ‘자유총연맹법’에 따라 한국자유총연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법에 따라 한국반공연맹의 모든 권리의무를 한국자유총연맹이 포괄 승계했다. 한국자유총연맹의 모태는 서북청년단, 대한청년단, 태극단동지회, 건국청년운동협의회, 실향민호국운동중앙협의회 등이다. 자유총연맹은 6·15 남북정상회담을 지지·환영하는 성명을 내는 등 스스로 ‘개혁적 보수’를 표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재향군인회는 1952년 예비역 장교들이 지역 내 징병 대상자와 기타 예비역 해당자를 관리하여 동원 체제를 구축하고 국방부 병무행정의 집행을 보조하는 예하 단체로서 출범했다. 1961년 ‘대한민국재향군인회법’은 재향군인회를 법인으로 하고 정부보조금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대신 국방부장관이 징집, 소집, 방위훈련에 관하여 재향군인회의 협력을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1963년 대한민국재향군인회법은 병역의무를 이행한 국민이 당연직 회원이 되도록 했으며. 회비 규정도 신설했다.

1969년 박정희 정권이 3선 개헌을 추진하자 재향군인회는 정치개입금지 규정에도 불구하고 '250만 재향군인'의 이름으로 개헌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1996년 3월 15일 자 <한겨레>가 보도한 기사 '여, 관변단체 총선 활용 조짐'에 따르면, 신한국당 직능위원회가 향군을 비롯한 9개 관변단체와 선거 협력을 추진했다. 재향군인회는 최대 천만 회원을 보유하고 국가보훈처로부터 100억 이상을 지원받으며 10여개의 회사를 운영한 바 있다. 하지만 2019년 1월 8일 자 <시사저널> 기사 '부실 경영 향군, 매번 정부 눈치만 본다'에 따르면 재향군인회는 "6000억 원이 넘는 부채를 지니고, 2017년 950억 원 손실을 봤다.

박정희 정권은 농촌근대화와 농민통제를 목적으로 1969년부터 새마을운동을 전국적으로 시행했고 1975년에는 도시와 공장으로도 확대됐다. 1973년 대통령령으로 내무부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하고 대통령 비서실에 새마을 담당관실을 설치했다.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9년 당시 새마을운동에 대한 정부지원금은 4252억 원, 민간단체의 지원금은 2032억 원에 달했다.

전두환 집권 직후 1980년 ‘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에 따라 새마을운동중앙회가 법정 사단법인이 되고 대통령의 친동생인 전경환이 책임자로 선정됐다. 노태우 정권이 출범한 뒤 전경환이 비리 혐의로 구속되자 일시적으로 타격을 받았으나 1989년 4월24일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로 이름을 바꾸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는 통, 리 단위에 23만여 명의 지도자를 두고 있으며, 전직 지도자까지 합하면 2백만여 명이 넘는다. 새마을 금고, 새마을 문고, 새마을 직장새마을 협의회까지 합하면 전국적인 최대 조직이다.

새마을운동중앙회 주최 2024년도 새마을지도자 교육 모습. 총 7400명이 참여했다(2024.3.25~27일)

전두환 신군부세력은 1979년 12월 12일 쿠데타 이후 초헌법기구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출범시켰고 국보위는 사회정화위원회를 만들었다. 사회정화위원회는 정치인 등 5천여 명의 공직자를 구속하거나 퇴출시켰으며 3만 8천여 명을 삼청교육대에 강제 입소시켰다. 또한 사회악 일소라는 명목으로 5만 7천여 명을 검거했다. 사회정화위원회는 전두환 정권의 사회통제기구 역할을 하다가 1988년 내무부 산하업무로 흡수됐으나 1989년 4월 바르게살기운동중앙협의회라는 관변단체로 부활했다. 바르게살기운동중앙협의회는 노태우 정권의 사회통제기구로서 운영됐다. 바르게살기운동중앙협의회는 1992년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야당과 육박전을 펼치며 날치기 통과시킨 바르게살기운동조직육성법에 의해 공식적인 관변단체로서 출범했다.

1988년 163명의 의원들이 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폐지법안을 발의했고, 그 이후 1993년, 1996년 등에도 이러한 관변단체 폐지 법안이 발의됐다. 김영삼 정부는 감사결과 관변단체 정리계획을 수립했으나 대선을 1년 앞둔 1996년 이들 3개 단체에 수십억 원씩 지원했다.

김대중 정권에 의해 최초로 정권교체가 된 후 1999년 공익적 사업을 하는 비영리민간단체를 지원하는 ‘비영리민간단체지원법’이 제정됐다. 하지만 새마을운동중앙회, 한국자유총연맹, 바르게살기운동중앙협의회 등 세 단체는 별도의 특별법에 따라 다른 민간단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특혜와 지원을 받고 있다.

해방 직후 우파들이 일본 통치 시기부터 존재해왔던 좌파성향의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에 대항하여 1945년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을 결성했다. 이 연맹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를 견제하려는 미군정청의 비호아래 1946년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대한노총)으로 전환됐다. 이 단체는 이승만과 김구 등을 고문으로 하여 반공과 노사협조를 지향하였다. 1948년 정부 수립 직후 이승만 대통령은 스스로 대한노총의 총재가 되어 그해 대한노총을 대한노동총연맹으로 전환토록 하였다.

1959년 대한노총에서 전국노동조합협의회가 떨어져 나왔으나 반공과 노사협조 노선은 변함이 없었으며, 양 조직은 1960년 4.19혁명 이후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으로 통합하였다. 한국노총은 5.16군사정변으로 일시적으로 해산되었으나 바로 군사정부에 의해 재구성됐다. 한국노총은 1987년 민주화 이전까지 군사정부의 비호아래 민주노조운동을 방해하고 경우에 따라서 정부 및 사측과 협조하여 노동운동을 탄압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