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 40만 침략군 물리친 고려의 지략, 싸움의 정석
소모전으로 대적을 물리친 제2차 반거란전쟁
고려가 대적한 거란침략군은 기병을 위주로 한 기동력이 매우 빠른 강적이었다. 1010 년 11월 거란은 강조(康兆)의 정변을 계기로 고려의 내정예 간섭하던 끝에 직접 40만의 침략군을 끌고 고려로 쳐들어 왔다.
고려군은 적들의 침략기도에 대처하여 적의 압록강 도하장을 틀어쥐고 배후를 위협하면서 통주(通州, 평북 선천군) 계선에서 결정적 타격을 주어 청천강 이북 지대에서 최종적으로 소멸하기로 계획했다.
첫 전투는 고려의 관문요새인 흥화진(興化鎭)에서 벌어졌다. 흥화진 방어자들은 도순검사 양규(楊規)의 지휘 아래 용감히 싸워 성을 지켜냈다. 양규는 적들의 침입에 대처하여 철저한 방어대책을 세우고 성안의 백성들, 장병들과 함께 성을 굳건히 고수했다.
양규 등 장수들은 주부 이수화(李守和)를시켜 투항을 설교하는 적들에게 거듭 회답펀지를 보내 "우리들은 눈보라와 찬서리를 견디면서 우리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기에 노력하겠으며, 몸이 비록 가루가 되더라도 나라의 천년위업을 길이 받들 결심이다." 라고 자신들의 애국의 굳은 결의를 표명하였다. 침략군 수괴인 거란 성종(聖宗)은 그들아 연달아 보내는 회답편지에서 절대로 항복하지 않으려는 그들의 억센 의지를 알아채고 포위를 풀고 남쪽으로 쳐 내려갔다.
그러나 적들은 흥화진의 군사들이 저들의 배후를 치는 것이 두려워 침략군 무력의 절반에 해당하는 20만의 병력을 린주(麟州, 평북 의주군) 남쪽 무로대(無老代, 의주군 남쪽 지명)에 주둔시켰다.
계속 남하하는 적의 예봉을 꺾어놓기 위하여 고려군 총사령관 강조는 창칼을 꽂아 만든 '검차(劍車)'라는 장애물을 일선에 배치해 놓았다. 그런데 강조는 첫 승리에 만족하여 전투지휘를 소홀히 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저질렀다.
적들은 통주계선 방어진을 돌파하고 계속 남하했다. 일부 대신들 속에서는 항복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하지만 강감찬(姜邯瓚)만은 투항을 반대했다. 그는 힘에 부친 전쟁이니만큼, 마땅히 적의 예봉을 피했다가 천천히 회복할 방도를 강구할 것을 제기했다.
그리하여 고려 조정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다음과 같은 작전안을 세웠다. 우선 적들이 노리는 것은 임금을 사로잡아 항복을 받아내자는 것이므로, 고려 현종(賢宗)과 조정은 일시 피난하며 그 시간을 얻기 위하여 거짓으로 화평을 제의한다. 한편, 청야전술(淸夜戰術)로 적들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음으로써 적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게 한다. 또한 요긴한 길목들을 막고 험한 지형에 의거하여 보루를 더 높이 쌓아 굳게 지키면서 부단한 소모전으로 적들의 예봉을 꺾고 퇴각하가를 기다렸다가 추격전을 조직하여 섬멸한다.
고려 조정은 필요한 시간을 얻기 위하여 거란침략군에 거짓강화를 제기했다. 고려 조정의 거짓강화제안에 접한 거란군은 어리둥절해져 주춤거렸다. 이미 앞선 전투에서 적지 않은 손실을 당했던 지라, 거의 모든 장수들 속에서는 그에 만족하여 퇴군하자는 제안까지 나왔다.
이때 통주에서 고려군 주력을 격파하는데 '큰 기여'를 한 야율분노(耶律盆奴) 만은 "고려 왕이 한번 싸움에 패해 강화를 요구하니 이것은 계교가 아닌지 의심스럽다, 그것을 받아들였다가 그들의 간계에 빠질가봐 두려우니 그 세력이 힘이 다하기를 기다려 굴복시켜 강화를 받아들이는 것도 늦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힘으로 굴복시킬 것을 주장했다.
적들이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고려 조정은 개경(開京)을 떠나 일단 전라도 광주(光州)로 피난했다. 거란침략군은 1011년 1월 고려의 수도 개경을 점령하여 대묘, 궁궐, 민가들을 모조리 소각하며 약탈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적들은 고려군의 청야전술에 걸려들어 굶주림에 시달리고 추위에 허덕이게 되었다. 그리고 흥화진을 지키던 양규를 비롯하여 곳곳에서 고려군이 적들에게 타격을 주었다. 한편 적의 병영에 사신으로 간 하공진(河拱辰) 일행은 임금이 간 곳을 묻는 거란추격부대에 "폐하께선 강남으로 가셨는데 어디 계신 지는 모른다, 강남은 대단히 먼 곳이라 몇만 리나 되는지 모르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적들은 고려 왕의 행적을 찾을 길이 없는데다가 피해가 더욱 커져 할 수 없이 추격을 단념하고 돌아섰다.
개경에 침입했던 적들은 10일 만에 총퇴각을 개시했다. 고려의 군민들은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여 강력한 타격을 주었다. 고려군은 구주(귀주), 무로대, 이수(梨水), 여리참(余里站), 애전(艾田) 등 싸움들에서 적 수만 명을 섬멸했다. 거란군은 고려군의 여러 장병들의 강한 반격에 부딪치고, 또 말과 낙타는 피로하고 병들었으며 군복과 병기를 다 잃어버렸으므로 압록강을 건너 퇴각하게 되었다. 이때 고려군은 적이 강을 반쯤 건널 때 후군을 맹렬히 추격하여 수많은 적을 물 속에 처넣었다.
이처럼 정의의 반침략전쟁인 제2차 고려-거란전쟁은 고려땅 이르는 곳마다에서 청야수성전술로 적들을 부단히 소모, 약화시켜 퇴각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고 쫓겨가는 적들을 부단한 추격전으로 소멸함으로써 40만에 달하는 적 침략군을 물리친 의의있는 전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