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을 준비하는 미·일의 공모결탁
한반도 침략 미일결탁의 역사 ⓽
일본의 청일전쟁 준비 과정
청나라군대와 일본군대의 강도적인 조선 출병
미·영·일의 결탁으로 청일전쟁 도발을 위한 국제환경 마련
1894년 갑오농민전쟁을 계기로 조선 지배를 둘러싼 청·일간의 각축은 새로운 양상으로 벌어진다. 이 시기 조선을 둘러싼 기본 대결 구도는 일제의 조선침투를 견제하려는 청나라와 청나라 세력을 밀어내려는 일본의 대립이었으며, 이 각축에 미국과 영국 등 유럽 열강까지 끼어든다.
일본의 청일전쟁 준비 과정
1882년 임오군란에 대한 청나라의 무력간섭은 조선을 노리던 일본의 침략야욕을 대폭 자극하여, 천황제에 기초한 군국주의로 나갈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1882년 <군인칙유>를 공포하여 일본 천황에 절대복종하도록 무장시켰고,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을 제정 공포하여 천황의 이름으로 해외 침략을 합법화하는 군국주의의 새 국면을 열어놓았다. 내각과 제국의회 등 모든 국가기구는 천황의 통치를 보좌하는 도구로 전락하였다. 1890년 천황의 <교육에 관한 칙어> 발표는 전쟁 때 천황을 위해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라는 도덕관으로 전 일본 국민을 교육하는 내용이었다.
일본은 방대한 군대를 준비하는데 나라의 모든 역량을 동원하였다. 1889년대 중엽부터 확대되기 시작한 일본의 군사력은 1890년대에 이르면 엄청나게 늘어난다. 1890년 육군은 현역군인 5만 3,000여 명, 예비역까지 합하면 25만 6,000여 명이었다. 해군은 25척의 군함(5만 1,000여 톤)과 10척의 어뢰정을 보유하게 되었다. 1882년 중소 군함이 15척이던 것과 비교하면 불과 몇 년 사이에 2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1890년에 들어서면 일본의 공개적으로 침략전쟁준비를 선포한다. 1890년 처음 소집된 제국의회에서 수상은 일본의 주권선(일본 국토방위선)에 직접 접한 조선을 생명선이라고 규정하고, 조선을 반드시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발언하였다. 조선을 강점하겠다는 일본 군국주의의 노골적인 선포였으며 그를 위해서 청나라와의 전쟁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시사였다.
청나라 군대와 일본군대의 강도적인 조선 출병
갑오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지 불과 4일 만에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한다. 정영창 등이 거느린 청나라군 1,500명이 5월 5일부터 9일 사이에 아산에 상륙하였다. 5월 8일, 농민군과 조선 정부 사이에 <전주 화의>가 성립되자 5월 10일 조선 정부는 원세개에게 철병을 요구하였지만, 청나라는 오히려 무력을 증강하였으며 5월 말까지 아산에 3,000여 명의 군대를 집결시켰다.
일본은 조선에서 농민군이 일어서자 참모본부 성원들을 비밀리에 조선에 파견하여 정세를 탐지면서 군대 파견 준비를 서둘렀다. 4월 29일 조선이 농민군 진압을 위하여 원세개에게 출병을 요구한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일본은 <긴급 내각회의>를 소집하고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시기, 청나라에게 치욕을 당했는데, 그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서울로 청나라보다 더 많은 병력을 보내어 청나라군을 물리치자’라는 강경한 방책을 결정하여 천황의 승인을 받았다. 청나라 군대가 아산에 도착한 바로 다음 날 일본은 청나라에 조선 출병을 통고하고 인천에 상륙하여 그날로 서울로 진입하였다. 5월 중순이 되면 인천과 서울에 5000명이 넘는 일본군이 밀려들었으며 6월 초까지 인천 부산 등의 일본군은 총 1만여 명에 달한다.
<전주 화의> 이후 일본군은 난처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 조선에 주둔할 명분이 없어진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군이 철수하지 않자 조선 정부는 물론 조선 주재 각국 공사들도 일본군 출병에 대해서 속셈을 의심하며 주시하게 되었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독일 부영사는 일본공사관으로 직접 찾아가 일본군의 조선 출병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조선 주재 일본공사 오토리 자신도 일본군의 조선 출병이 명분이 없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오토리 공사는 이러한 상황을 일본 정부에 보고하는 한편 단독 결심으로 원세개와 철병을 협상하였다. 협상 결과 이미 상륙한 일본 육군 병력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50명을 인천에 주둔시키고 청나라군은 5분의 1인 400명 만 아산에 남기며 청일 나머지 병력은 모두 본국으로 즉시 철수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5월 10일 오토리에게 공동철병 협상을 무효화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일본군을 철병시키지 말 것을 지시하였다.
철병하자니 조선 침략의 기회를 잃는 것으로 되고, 청나라와 전쟁을 하려고 해도 적당한 이유가 없는 조건에서 일본은 또 얄팍한 술책을 부리기 시작했다. 즉 청나라와 일본이 공동으로 조선을 개혁하자는 <내정개혁안>이었다. 이 <청·일 공동 내정개혁안>은 일본 내각회의에서 정식 결정되어 청나라에 통보되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조선의 내란을 일·청 양국의 군대가 협력하여 진압하며 내란이 평정되면 조선을 개혁하기 위하여 일·청 양국에서 상설위원 몇 명을 조선에 파견하여 재정을 조사하고 중앙과 지방관리를 새로 임명하여 필요한 경비병을 설치함으로써 국내의 <안녕>을 유지한다."
일본은 청나라의 확답을 받을 때까지 철수하지 않을 것이며, 만일 청나라 공동 <내정개혁>을 거절하면 일본 단독으로 <내정개혁>을 단행하겠다고 하였다. 이는 청나라의 거절을 예견하고 사실상 조선에 대한 독점적 지배를 실현하겠다는 것을 의사를 밝힌 것으로, 청·일 전쟁 도발의 명분을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공동 내정개혁안>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이 있다고 주장해온 청나라로서 동의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5월 19일 청나라가 <공동 내정개혁안>을 거부하는 회답을 보내자, 일본은 청나라에 일방적인 <절교장>을 보낸다.
미·영·일의 결탁으로 청일전쟁 도발을 위한 국제환경 마련
일본이 철병 요구를 묵살하고, 조선에 주둔하며 청나라 침략 명분을 마련할 시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 일본군 주둔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이는 <전주 화의> 성립 1주일 후인 5월 15일 서울주재 미국 공사 씰이 미 국무장관 그래샴에게 보낸 보고서를 통해 알 수 있다. 보고서는 <현재 조선에 있는 일본인이 서울에 5,000명, 제물포에 4,000명, 원산에 약 1만 명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일본의 출병은 전적으로 옳다.... 일본인이 1884년(갑신정변)에 약 60명, 1882년(임오군란)에 약 40명 이상이 죽었다는 사실로 보아 거류민과 공사관 보호를 위한 정당한 조치>라면서 일본군 출병을 적극 비호하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미국의 태도는 일본군의 조선 주둔을 정당화하려는 일본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미국은 <청일 공동 내정개혁안>도 적극 지지하였다. 5월 19일 미 국무성은 조선 주재 미국 공사 씰에게 <조선과 조선사람의 번영을 위하여.... 조선에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가능한 노력을 다하라.>고 지시한다. 일본의 속셈을 훤히 들여다보며 지지하는 내용이었다. 미국이 일본의 침략적 의도가 분명한 <내정개혁>을 지지한 것은 일본의 간섭이 강화될수록 조선과 만주에 대한 미국의 침략적 진출에는 유리한 조건이 조성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 뒤 일본이 단독으로 조선에 <내정개혁안>을 강요했을 때에도 미국은 이를 지지한다.
미국에 대한 환상이 강했던 고종은 주미공사를 통하여 <조미통상조약>의 규정을 거론하며 미 국무장관에게 <조선 문제에 대하여 열강 회의를 소집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미국은 <조선과 청나라에 대하여 엄정중립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국의 영향력은 일본에 대해서는 우의적인 한도에서만 행사된다. 우리는 제3국과 공동으로 개입할 수 없다>라면서 거절하였다. 5월 26일 씰은 미 국무장관에게 <일본은 조선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주며 조선인을 계몽하고 조선의 관리들에게 기쁨을 주며 개혁을 촉구하여 독립 국가의 지위를 강화한다>는 보고서를 올려 일본의 <내정개혁안>을 노골적으로 지지하였다. 미국은 언론을 이용하여 일본의 조선 출병을 지지하면서 유럽의 반대가 있더라도 <내정개혁>을 추진하라고 선동하였다. <뉴욕 헤럴드>지 등 미국 관변 언론들은 일본의 조치를 찬성하며 일본이 조선을 개혁하는 내용을 세계 상업 시장에 널리 소개해 달라는 기사를 썼다.
한편 일본은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영국의 지지를 받기 위한 외교교섭을 시작했다. 영국은 당시 세계 최강의 패권 국가로서, 일본은 영국이 반대하면 청나라를 치기 곤란했다. 당시 영국은 러시아의 극동 진출을 우려하며 청나라와 일정한 협조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영국은 청나라가 러시아 동아시아 진출의 방패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청일전쟁이 발발할 상황이 되자 청나라에서 누리던 영국의 이권과 관련하여 다시 저울질하게 된다. 처음에는 청일 간에 협상 중재를 통해 영국의 기득권을 보호하려고 했으나, 전쟁이 불가피해지자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일본 편을 드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였다.
영국은 < 만일 전쟁이 개시되면 상해를 비롯한 장강 유역을 전쟁 제외지역으로 하며, 영국의 이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협상안을 일본에 전달하였다. 이렇게 되자 일본은 만일 청일전쟁이 일어나도 영국은 청나라 편을 들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일본은 6월 중순 청·일 전쟁을 기정사실로 하면서 영국에게 <청일전쟁 개시 이후, 조선은 청일양국의 공동보호국으로 만들어 러시아의 남침을 조기에 견제한다>라는 안을 제출한다. 이렇게 하여 청일전쟁 개시를 눈앞에 둔 1894년 6월 14일 영국과 일본 사이에 <신영일조약>이 맺어진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