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전쟁의 교훈: '시계를 가진 자와 시간을 가진 자'
9월을 하루 남기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은 철수를 완료했다. 예정한 시간보다 24시간 앞당겨 이루어졌다. 몰려드는 아프간 난민을 감당할 수 없었던 미군은 테러 위험을 들어 카불 공항에 난민의 접근을 차단한 후 남은 미국인만 데리고 도망치듯 귀환했다.
9.11테러 주범으로 지목한 오사마 빈 라덴을 내놓지 않는다고 아프간을 침공한 미국은 20년 만에 패전국이라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만약 빈 라덴을 사살했다고 발표한 2011년 5월, 그때만이라도 철군했더라면 이렇게까지 체면을 구기지 않았을 것을. 하지만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
제국의 무덤, 아프가니스탄
정규군도 아니고 겨우 소총과 유탄으로 무장한 탈레반에 세계최강을 자랑하는 미군이 1,000조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이고도 왜 전쟁에 패배했을까?
2011년 당시 탈레반의 부지휘관 중 한명인 무자히드 라만(28)이 뉴스위크 기자에게 한 말에서 아프간 전쟁의 승패를 가른 요인이 무엇이었는지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당신들은 시계를 가졌지만 우리는 시간을 가졌다.
당신 시계는 배터리가 닳으면 바늘이 멈춰 서겠지만 우리의 투쟁 시계는 멈추는 법이 없다.
결국은 우리가 이긴다.
아프간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지리적 요충지인데다 석유와 천연가스가 풍부해 수백년 세월 제국의 먹잇감이 되어왔다. 자연히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한 무장세력이 자라났다. 이들을 ‘무자헤딘’이라 부른다.
무자헤딘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80년대 소련의 아프간 침공 때다. 소련은 수도 카불에 친소 정권을 세웠으나 얼마 되지 않아 무자헤딘에 패퇴한다. 당시 미국은 무자헤딘에 무기와 돈을 지원했다. 빈 라덴의 알카에다와 미국의 인연도 이때 맺어진다.
친소 정권이 물러난 자리에 친미 무자헤딘 군벌들이 카불을 점령해 탐욕과 부폐를 일삼자, 1994년 무자헤딘 80%를 통합한 탈레반이 카불을 공격해 2년 만에 탈레반 정부를 수립한다.
5년 후인 2001년 이번엔 미국이 직접 아프간을 침공한다. 이때도 침공 1달 만에 친미‧카불 정부를 손쉽게 세웠다. 하지만, 미국은 아프간을 왜 ‘제국의 무덤’이라고 부르는지, 장차 그 무덤의 수렁에 빠져 20년을 허우적대리란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시계를 가진 자와 시간을 가진 자
아프간 전쟁 발발 때부터 줄곧 취재한 뉴스위크 기자는 전쟁을 보는 양측의 시각이 너무도 다르다며 2011년 탈레반 전사와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당신네는 시계를 가졌지만 우리는 시간을 가졌다.” 포로로 잡힌 한 탈레반 전사가 했다는 이 말에서 그들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탈레반은 알라와 시간이 자신의 편이라고 확신한다. 나머지는 한낱 조건일 뿐이다.
또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은 경제적, 재정적, 정치적 제약을 두고 고민하지만 탈레반은 그런 문제에 매달리지 않는다. 숫자나 통계, 일정은 그들에게 별 의미가 없다. 언젠가는 반드시 승리하리라 확신하며 그쪽에만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침략 전쟁에 동원된 미군은 처지가 달랐다.
“미군이 이곳에 도착하면 바로 스톱워치를 눌러 귀국할 때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시간부터 잰다”고 전 탈레반 정부 각료가 말했다.
그런 미군과 달리 “우리 젊은 전사들은 모터바이크, AK47 소총, RPG(로켓추진유탄), 긴 머리, 그리고 목숨을 걸 가치가 있는 성스러운 명분으로 이상적인 삶을 산다. 그들은 시간이나 희생을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승리를 향한 끝없는 투쟁만 생각한다.”
그는 젊은 전사가 시간을 잴 때는 머리카락 길이로만 잰다고 말했다. “머리가 50cm 정도 자라면 약 1년이 지났다는 사실을 안다.”
전쟁을 대하는 미군과 탈레반의 이런 차이에 대해 미국의 국방 관련 연구소 세스 존스 박사는 한 세기 전 영국군의 아프간 공격 때 고전한 경험을 상기하며 “이곳의 시간은 몇 개월, 몇 년이 아니라 몇 십 년 단위로 인식된다. 서양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이다.”라고 경고한다.
탈레반의 신념과 어린 신규 전사의 증원
탈레반이 최강의 미군을 상대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은 어떤 어려움이나 고문을 당해도 전향하거나 투쟁을 포기한 탈레반 지휘관이 한명도 없고, 어린 신규 대원들도 계속 증원돼 탈레반의 생명수를 채운 데 있다.
뉴스위크가 보도한 탈레반 전사들의 인터뷰를 보자.
고참 전사들에 따르면 그들 대다수는 근래 역사도 모르고 과거나 미래에도 관심 없다. “우리 전사의 60%는 너무 어려 9·11이나 탈레반의 붕괴를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고 고참 탈레반 대원 자비불라(가명)가 말했다.
“그들은 단지 침략자가 있고 그들의 앞잡이가 나라를 통치하며, 얼마나 오래 걸리든 그 적들을 격파해야 한다는 사실만 생각한다.” 그런 마음가짐이 탈레반의 힘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투쟁에 걸리는 시간과 불리함을 걱정했다면 탈레반은 이미 수년 전에 끝장났으리라는 설명이었다. “미국은 우리가 B52 전략폭격기, 무인 공격기, 네이비실, 끝없는 자금 공급에 맞서 이처럼 오래 버티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제반 여건의 불리함과 시간을 따진다면 탈레반의 존립은 불가능하다.”
미 해병대에 의해 고향 마르자에서 쫓겨난 탈레반 전사 자바르는 아내와 세 자녀를 만나지 못한다. 가끔 집에 전화를 걸지만 그런 일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전화 때문에 위치가 추적되면 미군 특공대나 무인 공격기의 표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바르는 자신이 전사하면 아들이 성장해 탈레반에서 자기 자리를 물려받기 바란다.
“내 아들이 어른이 됐을 때도 우리의 싸움은 끝나지 않겠지만, 아들은 내 자리를 물려받으면 자랑스러워 할 것이다.” 2011년 현재 그 아이는 겨우 여섯 살이다.
바이든 미 대통령은 미국 전쟁사에서 가장 긴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밝혔다. 아프간 20년 전쟁은 이렇게 미국의 패전으로 끝났다. 침략전쟁은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진리가 또다시 증명되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 때처럼 미국은 이번에도 패배를 인정하기 싫은 모양이다. 어쩌면 미국이 71년째 한국전쟁에 종전을 선언하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