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건설은 ‘주요모순’을 해결하는 과정
민주노동당 평가와 한국의 당 건설(10)
본문 요지
레닌의 견해에 따르면 당은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이 결합한 사회주의노동운동의 고급형식이다. 여기서 양자 결합의 곤란함은 '이론주체'와 '실천주체'의 분리로부터 나타나며,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은 과학적 사회주의가 어떻게 자신의 기본원리를 각국의 실정에 맞게 ‘구체화’ 하는지에 달려 있다. 한국에서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의 결합이 아직 ‘당’의 수준으로까지 발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선 기본적으로 ‘이론 구체화’에서 장벽에 부딪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제7장 당 건설은 ‘주요모순’을 해결하는 과정
1. 당은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의 결합
2. ‘이론 구체화’와 한국의 주요모순
3. 비정규직투쟁의 전략적 의미(1)― 노동운동적 측면
4. 비정규직투쟁의 전략적 의미(2)― 당 건설 측
1. 당은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의 결합
레닌은 <'노동자신문'을 위한 글>(1899년)에서 “사회민주당은 단순히 노동운동에 봉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의 결합체'이기 때문이다.”라고 적었다. 이 말의 의미는 그가 같은 해 말 썼던 <러시아사회민주당 중의 후퇴적 경향>(1899년)에서 더욱 명확하게 기술된다. 여기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유럽 각국에서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은 애초에 서로 상관이 없었다. 노동자는 자본가와 싸우며 파업과 노조를 조직하고, 사회주의자는 노동운동 밖에서 현대 자본주의와 자본가계급의 사회제도를 비판하면서, 이를 보다 높은 단계의 사회주의제도로 대체하라고 저술하였다. 노동운동과 사회주의는 서로 상관이 없을 때 둘 다 무기력하고 발전하기 어려웠다. 사회주의자의 학설이 노동자투쟁과 결합되지 않을 경우, 그것은 단지 일종의 공상(空想)으로 착한 소망일뿐 실생활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또 노동운동의 경우는 분산된 상태에 빠질 뿐으로, 정치적 의미도 없고 또 그 시대 선진적인 과학의 지도를 받지 못한다”(굵은 글씨는 인용자 강조)
이 인용문에서 보듯, 레닌이 당을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의 결합체라고 말할 때 '사회주의'는 주로 사회주의의 학설, 즉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창설한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노동운동'은 주로 노동자투쟁, 즉 노동자계급의 대중적 실천을 의미한다.
당에 대한 이 같은 레닌의 규정은 사회주의노동운동의 발전과 연관시켜 보자면 ‘동태적’이고 ‘발전적’ 관점에서 당을 파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레닌은 같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 각국은 갈수록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을 하나로 묶는 사회민주주의1) 운동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렇게 결합됨으로써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은 자본가계급의 착취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의식적 투쟁이 되었으며, 사회주의노동운동의 고급형식―독립적 사회민주주의노동자정당도 생겨났다.”2)
이는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이 결합해 생겨난 새로운 운동은 하나의 ‘동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같은 형식에는 높고 낮은 단계의 구분이 존재하며, 노동자계급정당은 이 운동이 어느 정도 발전한 뒤에라야 생겨나는 이 운동의 ‘고급형식’(즉 높은 단계)이라는 것이다.
과거 러시아혁명의 역사를 보자면, 러시아는 처음 ‘사회주의 선전단계’를 거쳤다. 즉 1883년 나로드니키(인민주의)파에서 분리해 나온 혁명적 소그룹인 ‘흑토재분배’가 맑스주의로 전환한 이래, 맑스주의 학설은 러시아의 지식인과 학생 그리고 소수 선진노동자들 사이에서 보급되었으며, 이때는 학습써클이 유행하였다. 이 사회주의 선전단계는 1895년 ‘페테르부르크동맹’이 결성된 시점을 경계로 ‘사회주의 선동단계’로 진입하면서 본격적으로 노동운동과 결합하기 시작한다. 이 단계는 정치신문인 [이스크라]의 창간을 기점으로 다시 ‘경제선동’과 ‘정치선동’ 두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대략 1895~1900년 기간인데, 이 시기에는 제각기 고립 분산적인 지방조직들이 경제선동을 중심으로 노동운동을 이끌었다. 후자는 1900년 [이스크라] 창간 이후를 말하는데, 이 시기에는 전면적 정치선동을 수행하면서 각지의 고립 분산적인 노동운동을 통일적인 전국적 변혁운동으로 한 단계 상승시켰으며, 진정한 전국적 사회주의정당이 이 무렵 탄생하였다.
한국에서도 1980년대 들어 맑스와 레닌의 원전들이 번역되어 소개되면서,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을 결합하기 위한 시도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1985년 구로공단 연대파업투쟁의 성과를 기초로 결성됐던 ‘서울노동운동연합(약칭: 서노련)’을 그 최초의 ‘맹아적’ 조직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당시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의 영향을 받았으며, 비록 아직까진 사회주의를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로서는 매우 선진적으로 노동운동이 ‘정치투쟁’을 수행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한 조직적 기반으로서 우선 지역적 차원에서 선진노동자 조직을 건설할 것을 제창하였다. 이후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약칭 인민노련, 1987년 결성), '민족통일민주주의노동자연맹'(약칭 삼민동맹, 1987년 결성) 등 수도권 각 지역에 유사한 조직들이 만들어졌으며, 나중에 생겨난 조직일수록 좀 더 의식적으로 사회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띠어 갔다.
한국에서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의 결합에 있어 한 획을 긋는 사건은 사회주의 대중적 선동을 공개적으로 실천한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약칭 사노맹)의 출현이다. 1989년 11월 전국노동자대회에서 정식 출범선언을 한 이 조직은, 앞서 열거한 조직들이 사회주의에 대해 소수 엘리트 혹은 선진분자들만의 내부 학습이나 토론, 혹은 암묵적 지향성에 국한되었던 것과는 달리 조직 명칭에 ‘사회주의’를 공식 명기한 최초의 조직이었다. [노동해방문학]이라는 합법 월간지를 발행하였으며, 수도권과 영남에 지방위원회를 두는 한편 충남과 전남 등지에는 그 준비위를 결성하였다. 학생운동에는 서울지역민주주의학생연맹(약칭 서민학련, SDSL)과 '전국민주주의학생연맹'(약칭 전민학련, JDSL)과 같은 후비대를 구축하였다. 사노맹은 한 때, 정식 조직원이 300명에다 적극적 지지자들을 포함할 경우 조직대오가 1500여명에 이를 정도로 해방 이후 최대 규모의 전위조직을 구성하였다.3)
하지만 이 조직은 광범위한 현장 대중과 결합에 실패함으로써 전국적인 당 건설에까지는 이르지 못한 채 중도에서 와해되고 말았다.
이후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붕괴를 틈타 정통적인 ‘과학적 사회주의’ 계열에서 이탈한 각종 아류 변혁이론들이 노동운동과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트로츠키주의자와 그로부터 파생한 ‘국제주의’를 기치로 내건 IS그룹(현 ‘노동자연대’)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들도 과거 사노맹이 도달했던 수준 이상을 보여주지는 못하였으며, 여전히 범 사회주의 진영 내 개별 분파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물론 비록 지금 형식상으론 노동당, 변혁당, 진보당 등 당적인 형식과 당명을 가진 여러 조직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들을 한국 노동자계급 전체를 대표하는 진정한 노동계급정당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의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은 여전히 레닌이 말한 양자 결합의 ‘고급형식’으로서의 당의 단계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생각만큼 양자의 결합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 어려움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양자 결합의 어려움은 우선 과학적 이론으로서의 사회주의가 노동자계급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획득되어질 수 없으며, 외부로부터 ‘도입’될 수밖에 없다는 사정에 기인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노동자계급이 변혁적이라고 해서 자신의 계급적 존재에 상응하는 과학적 이론을 직접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실제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의 탄생은 소수 진보적 지식인이 떠맡았다. 그 창시자 중 한 사람인 엥겔스는 <공상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 발전>(1880년)이라는 책에서, 과학적 사회주의는 19세기 들어 공공연하게 표면화된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계급투쟁’, 그리고 당시 이미 드러난 자본주의의 무정부적 생산으로 야기된 ‘경제 위기’라는 두 가지 측면에 대한 고찰의 결과라고 적은 바 있다.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실천과 자본주의 경제위기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같은 당대의 선진적 지식인들이 일생을 다 바쳐 사회 현상 이면에 존재하는 본질에 대한 고찰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그 과정에서 인류역사 발전의 기본법칙과 노동자계급 해방의 조건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은 레닌이 <맑스주의의 세 가지 기원과 3대 구성요소>(1913년)에서 밝혔듯이 헤겔에 의해 집대성된 독일의 변증법 철학, 생시몽 등이 발전시킨 프랑스의 사회주의 정치이론, 그리고 영국의 아담 스미스에 의해 창시된 근대경제학이론 세 가지를 그 기원으로 한다.
과학적 사회주의 탄생의 이 같은 과정은 비록 혁명적 실천이 과학적 이론의 탄생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바로 그 실천주체인 노동자계급이 저절로 자신의 계급적 본질을 자각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 그리고 자신이 짊어져야 할 계급해방이나 인류 구원에 대한 원대한 혁명적 실천 전망 역시 저절로 획득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이 때문에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의 생성과 보급은 초기에는 역사의식과 상당한 학문을 지닌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이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사회주의와 노동운동 양자 결합의 곤란함은 바로 이 같은 '이론'과 '실천 주체'(노동자계급)의 분리로부터 나타난다.4)
이 때문에 맑스와 엥겔스가 창설한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은 다른 잡다한 사상•이론과 경쟁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경쟁을 통해서 자신이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가장 유효한 이론임을 입증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이 분리될 수 있는 갖가지 가능성이 생겨나는 것 또한 어쩔 수가 없다.
자본주의의 산물이자 앞으로 그 무덤 파는 역할을 하게 될 노동자계급의 주변에는 이 계급에 대한 정신상의 헤게모니를 노리는 수많은 사상과 이론들이 배회한다. 그리고 지배계급인 자본가계급은 노동운동에 대해 본능적으로 높은 경각심을 갖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 항상 엄격한 통제와 상시적인 압력 그리고 갖가지 회유를 가한다. 이처럼 일상적으로 '탄압'과 ‘회유’ 속에 처한 노동운동은 자연스럽게 원칙으로부터 이탈하여 개량주의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사민주의가 오늘날 서구에서 유행하게 된 배경에는 이처럼 자본가계급이 가하는 위협과 회유에 대한 굴종이 존재한다.5)
다른 한편, 자본주의사회에는 중소상공인, 영세자영업자, 농민 등 소자산계급(쁘띠부르주아지)의 수자가 매우 많다. 그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몰락하여 끊임없이 노동자계급으로 유입되고, 반대로 노동자계급 중 일부는 쁘띠부르주아지로 전환하기도 한다. 이처럼 이들 계급은 노동자계급과 복잡하고 긴밀한 연계를 갖고 있는데, 이에 따라 각양각색의 소자산계급 사상이 각종 채널을 통해 노동운동 내에 침투하여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상의 사정 때문에 ‘과학적 사회주의’는 다른 잡다한 배경을 가진 사상•이론과 경쟁을 할 수밖에 없다. 치열한 경쟁을 통해 자신이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유일한 이론임을 입증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적 사회주의’는 어떻게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자신이 그들의 해방 사업을 위한 진정한 지도사상임을 믿고 따르도록 할 수 있을까? 객관적으로 이러한 신뢰는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맑스는 <‘헤겔법 철학비판’ 서언>(1844년)에서 “이론은 대중을 장악하면 물질적 힘으로 변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이론이 대중을 장악한다는 것은 “이론이 사람을 설득”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론은 어떻게 사람을 설득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맑스는 “이론이 철저하기만 하면 사람을 설득할 수 있다. 철저하다는 것은 사물의 근본을 파악하는 것이다.”라고 답한다. 그렇다면 다시, 이론의 ‘철저성’은 어디에서 나오며 사물의 근본은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해 맑스는 계속해서 답하지는 않는다.
필자가 보기에 이 문제는 결국 ‘실천’과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이론의 기원은 ‘실천’이며, 인민대중의 사회적 실천이야말로 바로 변혁이론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위의 맑스의 말을 다음과 같이 해석해야만 한다. 즉, 인민대중의 실천과 긴밀히 연계된 변혁이론이야 말로 그 철저성과 근본성으로 인해 노동자 대중을 설득하고 그들의 의식을 장악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적시에 인민대중의 실천을 정확하게 포착하여 ‘총화’하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투쟁지침을 제시할 수 있는 이론이야말로, 그 이론의 유용성을 입증할 수 있음으로 인해 노동자 대중을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과학적 사회주의가 어떻게 자신의 기본원리를 ‘구체화’ 하는지의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원래의 ‘과학적 사회주의’의 일반적 원리만 가지고서는 각국의 노동자계급이 처한 상황과 그들의 투쟁에 맞는 구체적인 지침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와 노동운동 양자 결합의 고급형식인 노동자계급정당은 이론의 구체화와 관련된 나름의 '주관적 관념체계'를 지니고 있다. 예컨대 그 구체화 정도에 따라 배열한다면, 그것은 강령, 노선, 전략, 전술, 정책의 개념 서열을 형성할 수 있다. 이 같은 개념 서열에 따르면 당 이론의 구체화의 첫 번째 순서는 ‘강령’이다. 하지만 이론이 강령으로 변화할 때, 이론은 아직 추상적 성분을 많이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강령은 당의 “총체적 지도 사상과 정치적 주장의 이론적 개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론이 더 구체화 되어 ‘노선’으로 바뀔 때, 그것은 더 많은 구체성을 획득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경로와 방법”을 지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론이 최종적으로 ‘정책’으로 바뀔 때, 그것은 “정당의 임무, 노선이 현실로 전환되는 중요한 지점”이 된다. 이때의 이론의 구체성은 이미 “행동 준칙과 조정 수단”의 정도로까지 도달한다.6)
이러한 사정에 비추어 볼 때, 한국에서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의 결합이 그 고급형식인 ‘당’의 수준까지 이루지 못하는 것은 우선 기본적으로 ‘이론 구체화’에 문제가 있음을 말해준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한국 변혁운동에 있어 과학적 사회주의가 여전히 추상적 일반이론 수준에 머무르고 있거나, 아예 방향을 잘못 잡는 경우 둘 중 하나임을 뜻한다.
한국 변혁운동 좌파는 대체로 전자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서구 좌파이론의 영향을 많이 받아 한국사회를 인식하는데 있어서도 서구식의 고전적 자본주의 모델을 그대로 들이댄다. 정세분석에 있어서도 단순히 자본가계급 대 노동자계급의 이분법적 대립구도를 즐겨 사용하는데, 이 때문에 중간에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가 개입하여 반동부르주아지, 변혁적 노동자계급 이렇게 삼자가 형성하는 복잡한 정치정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경제이론을 적용함에 있어서는 그들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법칙’이라는 일반이론을 들이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맑스는 이미 그것이 ‘경향적’으로만 관철된다고 밝힌 바 있으며, 또한 슘페터 ‘혁신이론’에 의해 자본주의는 매번의 기술혁신이 일어날 때마다 기존의 생산력을 파괴하고 새롭게 이윤율이 제고된다는 사실이 밝혀진 바 있다. 따라서 다시 과잉생산이 일반화할 때까지 단기적이지만 상당 수준의 이윤율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매번의 자본주의 경제 공황에 대해 똑같은 잣대만을 들이댄다. 이처럼 아직까지 ‘일반이론’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좌파 맑스주의자들은 언제부터인지 소위 ‘국제주의자’들의 ‘세계 동시혁명’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차용함으로써 특히 국제정세 분석에 있어서는 더욱 무능력함을 보여준다.
변혁운동의 우파의 경우 그들은 한국사회의 예속성을 주목하는데 있어 좌파보다는 한국적 특수성에 대한 이해가 깊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예속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과거 식민지 사회와의 차별성을 잊어버릴 정도가 되었다. 이리하여 외세(현대제국주의)의 한국사회에 대한 규정성에 대한 인식이 과도하여 자칫 계급이론으로부터 멀어진 ‘민족주의’ 이론으로 향해가는 경향을 보여준다.
과학적 사회주의의 기본원리는 오직 ‘구체화’에 성공할 때라야 비로소 각국 노동자계급과 일반 민중의 현실에서의 실천적 요구에 응할 수가 있다. 따라서 한국 당 건설 문제의 일차적 과제는 아직까지 추상적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과학적 사회주의가 일반이론 차원을 넘어선 ‘한국적 구체성’을 어떻게 획득하느냐에 있으며, 기존 변혁 정파들은 우선 이 같은 ‘이론 구체화’ 단계에서 장벽에 부딪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변혁이론이 요구하는 진정한 구체성은 과연 무엇일까?
본문 주석
1) 여기서 말하는 ‘사회민주주의’는 1차 대전 이후 자본주의체제 내로 포섭되어 변질된 ‘사민주의’와는 의미가 다르다. 레닌이 이 글을 쓸 때까지만 하더라도 ‘사회민주주의’는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결합하는 용어로 ‘변혁적’ 의미를 담았다.
2) <레닌전집>제4권, 인민출판사 1984년판, p213. 인용문 중 굵은 글씨체 강조는 인용자에 의한 것임.
3) 조희연, 1992년 가을, < 사노맹, 비합법 전위조직에 대한 조직사회학적 분석>, 역사비평.
4) 루카치가 그의 대표작 <역사와 계급의식>(1923년)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 역시 이 문제와 일정한 관련이 있다.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은 성공했으나 다음해의 독일혁명과 1919년의 헝가리 혁명은 모두 실패했다. 자신의 조국인 헝가리 혁명에 참가했던 루카치는 이 혁명이 좌절한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 그 당시 마르크스주의의 주류는 이미 변절한 제2인터내셔널의 이론가들이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기계적 유물론에 입각하여 인간의 의식이나 행동을 오직 객관적인 사회의 존재 양식으로부터 설명하려 하였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의 인간의 능동적 역할을 분명하게 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루카치는 역사의 변혁에 있어서 의식이 수행하는 적극적 역할을 중시하고,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식’만이 역사의 방향을 올바르게 파악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자본주의 물신화(物神化)로 인해 사람들이 풍요로운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허위의식을 극복할 필요성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그는 왜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존재로부터 즉자적으로 역사적 계급의식을 형성할 수 없는가와 관련하여, 과학적 사회주의는 외부로부터 ‘주입’될 수밖에 없으며 이를 위해선 ‘조직’이라는 매개가 있어야 한다는 데까지는 나가지 못했다.
5) 사민주의의 원조 격인 독일사회민주당은 원래 맑스주의를 지도이념으로 삼는 변혁적인 정당이었다. 그것이 결정적으로 오늘날과 같은 사민주의적 의회주의 정당으로 변질되게 된 직접적 계기는 1914년 1차 대전 발발 직전 ‘전시공채’ 발행과 관련하여 독일 통치계급, 그리고 자본가계급 매체의 선동에 의한 군중의 ‘애국주의’ 물결의 위협에 못 이겨 찬성표를 던지면서 부터이다.
6) 이상, 인용부호 안의 인용문은 <중국공산당역사 대사전>(총론·임무), 중공중앙당학교출판사2001년판,pp32-36에서 따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