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총련 명예회복, 어떻게 할 것인가

응답하라 한총련 1991-1997 (5)

2021-01-01     신희주

필자의 변 - 

한 때 이적단체와 폭력시위로 악명(?)높던 한총련이 지금은 금기어 또는 투명인간이 되었다. 괴물만들기, 왕따, 투명인간 취급으로 이어진 '체계적인 기억 지우기'에 너무 둔감했던 것이다. 지금 당장 기억을 살려내고 기록을 남겨야 한다. 명예회복 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머리말. 분단체제와 미국식 양당체제를 뛰어넘을 힘을 어디서 찾을까

제1부, 불패의 애국대오 한총련을 소환한다

제1장, 90년대 학생운동은 왜 묻혀졌나?
-  의도적인 외면과 강요된 침묵. ‘민주화 운동’이란 틀 뛰어넘어야

제2장. 주사파? 친북? 종북? 그래서 어쩌라고…
-  주사파의 경계는 어디까지? 대한민국 검사가 브리핑한 20대 당시 나의 사상

제3장. 반수구세력 콘크리트, 70년대생 한총련 세대(현 40대)
-  절망을 딛고, 각성과 행동을 거쳐 결집된 한총련 세대

제4장. 한총련 명예회복, 어떻게 할 것인가
- 투명인간에서 벗어나 정치사회적인 복권을 받자

제1부, 불패의 애국대오 한총련을 소환한다

 

  제4장. 한총련 명예회복, 어떻게 할 것인가

   - 투명인간에서 벗어나 정치사회적인 복권을 받자

 

4.1. 한총련은 왜 금기어, 투명인간이 되었나

어느 순간 투명인간이 된 한총련

96~97년 쓰라린 패배 후, 나 역시 한총련에 대한 이야기는 가슴 깊이 묻고 살았다. 그래도, 한총련이라는 이름이 지금처럼 ‘금기어’ 또는 ‘투명인간’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투명인간 취급을 받기에는 너무 큰 사고(?)를 치고 다녔으니… 직접 활동했던 주체들이 나서지 않더라도, 조금은 중립적인 연구자 또는 언론들이 객관적인 평가를 해 줄 것이라고 막연히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한총련은 수구언론들에게 극심한 비난을 받다가, 어느시점부터는 말 그대로 왕따가 되고, 투명인간 취급을 받고, 잊혀진 이름이 되었다. 

필자는 2001년부터 2016년까지 중국에서 생활했다. 그래서, 나의 기억은 2001년 상태로 동결된 부분도 많다. 한총련 이야기를 시작하겠다고 하니, 주변 지인들은 기억력이 놀랍다고 하더구만. 그런데,  외국에서 생활했다는 것은 좀 특별하고 유리한 조건인 것 같다.

내가 중국으로 떠날때 쯤에는 언론을 통해 한총련의 악명(?)이 높았던 시절이다. 그런데, 2016년 촛불항쟁 와중에 돌아와보니, 한총련은 완전히 잊혀진 이름이었다. 악플보다 무플이 더 무서운 법, 체계적인 왕따와 매장은 때리고 욕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기억에서 지워나갔다.       

 

한국사회의 마지노선. 친북은 용납못해

한국 사회 주류(소위 말하는 좌파, 우파 모두 포함이다)는 진보이념 중에서도 급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젠더정치, 페미니즘, 성소수자문제 등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 오히려, 관심이 몰릴 때는 상업적으로 이용하기까지 한다. 사회주의 이념도 사민주의 정도는 권장(?)하는 것 같다.

그런데, 자주와 친북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잔인하게 짓밟는다. 한총련과 통합진보당이 그렇다. 물리적인 탄압이 통하지 않으면, 조직 내부에서 붕괴를 유도한다. 나에게는 96~97년 한총련의 쓰라린 패배와 2012년 통합진보당 분당사태는 겹쳐지는 부분이 많다. (김영환 일당의 한총련 파괴 공작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그리고, 통합진보당도 초기에는 온갖 혐오와 악담을 퍼붓다가, 이제는 한총련 처럼 체계적인 기억지우기 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관련 내용:  96연세대항쟁 05, 남총련은 15일 연세대에 진입하지 않으려 했다  블로그 [한총련과 민족전대] 중

 

‘헌법 안의 진보’라고? 길들여지던가, 침묵하던가

2013년 박근혜 정권이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사건을 터트리자, 심상정 씨는 ‘헌법 안의 진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박근혜 국정원의 수사에 동조했다. 그리고, 수구언론은 기다렸다는 듯, ‘종북세력, 진보에게도 버림받아…’ 이런 식의 멘트를 남기며, 정의당과 심상정을 띄워줬다. 그런데, 말은 바로 해야지, 헌법 운운하는 것은 참 비겁한 변명이다. 그냥 ‘국가보안법 안의 진보’라고 했어야지.   

국가보안법 안에서는 길들여지던가, 침묵하던가 두가지 방법 밖에 없다. (아니면 감옥에 가던가) 나 또한, 침묵을 선택했었다. 뭐 굳이 제도권에 들어가 길들여지면서 살 일이 있나. 그냥 저들이 투명인간 취급하면, 나 또한 그들을 무시하며 가늘고 길게 살고 싶었다. 그런데, 수구냉전세력이 세월호 아이들을 죽이고 사드 배치로 내 사업까지 발목잡아 싸움판으로 돌아왔다. 

헌법안의 진보라니... 비겁한 변명입니다. 뚜다다다

 

4.2. 기록되지 않은 것은 기억되지 않는다

한총련의 경험은 세계적으로도 특별한 것

한총련처럼, 좌-우 모든 진영에서 얻어맞은 조직은 찾아보기 힘들다. 살아오면서 ‘한총련 예쁘다’는 말은 유가협(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어머님들에게서만 들어본 것 같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한총련이 학생운동을 말아먹었나 보다’, ‘맞을 짓을 해서 맞았나 보다’ 하며 체념하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내가 가해자들의 논리에 길들여진 것이란 것을 느끼고 정신이 확 들었다.

한총련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역사이며, 거기에 참여한 개인들에게도 특별한 경험을 주었다. 유럽에서 그렇게 자랑하는 68혁명. 몇년이나 지속됐나? 꼴랑 2~3년이다. 일본의 학생운동 전공투도 반짝했다가 적군파로 무장투쟁한다고 넘어가서 폭망했다. 지속기간 대략 3년.

10 여년 동안 대학 내에 학생권력과 혁명적 자치를 만든 것은 한국의 학생운동이 유일하다. 지배권력과 비타협적으로 싸우며, 미제국주의에 맞서 새로운 사회를 만들겠다는 꿈으로 수만명의 활동가들이 헌신적으로 활동한 조직도 한총련이 유일하다.

벗들이여, 한총련 자랑스러워해도 된다. 한총련 깃발이 꺾인 것도 우리 탓이 아니다. 전세계가 미국의 패권과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미쳐돌아갈 때, 그렇게 버텨준 것만 해도 기적이다. 체계적으로 지워진 한총련의 기억을 살려내고 기록하자. 그리고, ‘90년대 한국의 대학생들을 보라’고 전세계 진보적 인류에게 자랑하자.    

 

조국과 청춘 노래듣기 / 이거 기억할려나. “전세계의 진보적 인민들이여, 지도를 펴고 한반도를 보라. 조국은 싸우고 있다. 백만 학도의 사랑, 투쟁, 영광, 오늘 청춘은 빛난다” 조국과 청춘 노래 앞에 붙인 구호다. (남총련만 했나?)  

 

기록과 토론, 사회적 복권, 법률 제도적 복권

우리 사회에서 왜곡된 민중투쟁사를 복원하고 명예를 회복하기까지는 보통 3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첫단계는 기록과 토론, 두번째 단계는 사회적 복권, 마지막으로 법률 제도적인 복권으로 이어진다. 사회적 복권이란 법적 제도적으로 인정받지는 않더라도 사회적으로 정당성을 인정 받는 단계를 말하며, 이것이 사회적 통념으로 자리잡히면, 법률 제도적으로 정비하여 명예회복이 완성된다. 

광주민중항쟁은 학살자들에 의하여 폭동으로 낙인 찍혔으나, 5년만에 체계적인 기록물이 나왔고 치열한 투쟁을 거쳐 87년 6월항쟁 이후 사회적인 복권을 이뤄냈다. 그리고, 93년 민주화운동으로 규정되었고, 95년에 전두환, 노태우를 감옥으로 보낼 수 있었다. 당대에 치열한 투쟁으로 얻어낸 성과다.

하지만, 48년 제주항쟁과 여순항쟁은 체계적인 기록이 나온 것은 대략 40년이 걸렸고, 7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명예회복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국가폭력이라고 법적으로 인정받아 사회적인 복권 단계라고 할 수 있지만, 항쟁의 정당성이 사회통념으로 자리잡지는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총련은 어느 단계에 와 있는가? 기록이 늦어지면, 한총련도 제주4.3항쟁처럼 70년이 지나도 명예회복을 못할 수도 있다.

 

기록되지 않은 것은 기억되지 않는다

기록되지 않은 것은 기억되지 않는다. 가슴 속에, 머리 속에 기억이 남아있고, 내가 살아있는 증거라고  해도 기억을 살리고 기록을 남겨야 한다. 물리적인 시간의 문제이다. 이미 한세대가 흘러, 당사자들의 기억은 계속 희미해지며, 한계점에 도달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이 남아있어, 민감한 부분을 기록하기 부담스럽겠지만, 평가는 후대의 몫으로 남기더라도 당대 학생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기록해야 한다. 

기록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후배들은 수구언론에 의해 왜곡된 정보를 갖게되고, 결국 빗나간 판단을 하게된다.

제대로 된 기록이 없으면 잘못된 기억으로 전해진다. 연세대항쟁이 이렇게 왜곡되어 있다니.... 

지난 2019년 페이스북에서 우연히 행사 관련 포스터를 보고 깜짝 놀랐다. 도대체 96년 연세대항쟁이 어떻게 기록되고 기억되어 왔길래, 오늘 대학생들이 이런 기획을 한 것일까. (만약 행사 이전에 포스터를 봤으면 참가해서 발언했을 것이다. 날짜가 지난 후 우연히 본 포스터라 당일 내용은 확인할 수 없다)  

일단, 세션2에서 한국 학생운동과 일본 전공투를 올려놓은 것은 기본적인 사실관계부터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수구언론과 일부 반북진보들이 연세대항쟁을 놓고 전공투의 도쿄대 야스다강당과 연결지은 것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가슴이 아프다. 일본의 전공투는 자신들이 직접 바리케이트를 쌓고 야스다강당을 점거했고, 한총련은 정권에 의해 쫓겨들어가 감금당한 것이다. 사안이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세션3에서 혁명의 성정치를 주제로 올렸는데… 96년 8월 연세대에서 성정치를 찾으려면, 국가 권력에 의해 체계적으로 벌어진 언어 폭력과 성추행을 다뤘어야 한다. 나는 당시 김영삼 정권이 벌인 성추행 만행은 ‘심리전 차원에서 벌어진 조직 범죄’라고 확신한다. 연세대항쟁 당시 공권력의 성범죄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다루겠다.

[관련 기사 ]성추행은 신종 시위 진압술? / 시사저널 19961024

이렇게 연세대항쟁을 다르게 인식하고 있는 것이 지금 대학생들의 잘못이겠는가. 제대로 기록을 남기지 못한 우리의 잘못이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 지금 당장 기록을 시작해야 한다. 

 

 

4.3. 활동가들 기억과 함께 정부 지원도 필요

 

보안수사대에 차곡차곡 정리된 자료들

한총련 활동에 직접 참여했던 활동가들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과 더불어, 정부 기관의 지원도 필요하다. 

필자가 94년 광주 보안수사대에 잡혀갔을 때의 일이다. 국가보안법 관련 혐의는 책들을 쌓아놓고 꽤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집회 참여 부분은 아주 간단했다. 어차피 한번 참여했다고 하나, 20번 참여했다고 하나 유/무죄를 다툴 수 있는 사안은 아니었기에 대부분 인정했다. (그래서, 내 판결은 국가보안법은 무죄,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 집시법 등은 유죄로 확정되었다)

집회 참여 부분은 수사관이 파일 무더기를 들고 왔는데, 각 집회별로 파일이 정리되어 있었다. 파일 내에는 집회 일시, 장소, 참가인원, 발언내용 등이 보고서로 정리되어 있었고, 당일 뿌려진 전단, 대자보 사진, 집회사진도 첨부되어 있었다. 뒤쪽에는 당일 집회 진압과정에서 부상당한 전경, 의경들 진단서까지 꼼꼼하게 챙겼더구만. 파일이 너무 많아서 어느 집회를 고를지 선택하기 힘들었는데, 그냥  7개 정도만 뽑아서, 참가한 걸로 정리했다.

필자를 비롯하여, 당대 활동가들은 자료를 제대로 보관할 수 없었다. 맨날 문건이나 책들 모아놓고 태우는 것이 일이었다. ㅠㅠ   그런데, 세금으로 월급받으며 공무원들이 열심히 자료를 정리해 놓은 것을 보았으니 탐이 날 수 밖에... 보안수사대와 국정원의 자료실에 차곡차곡 정리돼 있을 자료를 꺼내보는 것이 나의 꿈이다. 

 

‘과거사위원회’ 다시 출범 - 국가보안법 철폐와 통일운동 재평가

한총련의 사회적 복권과 제도적 복권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국가보안법 이다. 한총련이 명예회복 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리고 운명적으로 국가보안법과 맞서 싸울 수 밖에 없다. 

일단, 91년 오월투쟁 30주기를 계기로 한총련에 대한 기록과 사회적 복권을 시작하고, 국가보안법 철폐와 과거사위원회를 다시 출범시켜, 민간 통일운동과 국가보안법 관련 주요 사건에 대한 재평가에 들어가 명예회복 해야한다. 


(가칭)‘통일운동기념사업회’도 국가기구로 만들어져야 

현재 민주화운동기념사회는 국가 기구로 운영되고 있다. 대략 반유신운동부터 80년대 군부독재 타도 투쟁까지는 포괄하지만, 90년대 자주통일투쟁은 같은 범주로 묶기에 애매하다.

한총련과 자주통일운동에 대하여 사회적인 복권이 어느정도 이루어지면, 국가기구로 (가칭)통일운동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제도적으로 명예회복을 완성하기를 바란다. 

 

4.4. 1부를 마치며

       - 우리에게 90년대 학생운동은 무엇이었나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후반

87년 6월 항쟁 이후

열린 공간에서 

새로운 세상을 직접 만들어나가던 

가장 역동적인 시기.

 

87년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분배에서 노동자의 몫이 늘어나

중산층의 비중이 역사상 가장 높았던

한국 자본주의의 황금기

 

공동체와 연대의 정신이 살아있었던

응답하라 드라마 시리즈에서 계속 소환하는

다양한 대중문화가 본격적으로 자리잡고

아날로그와 디지털 감성이 교차하던 시기

 

사회주의 붕괴와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몰아치던

세계사의 흐름과 시대적으로 엇갈린 것은 아쉽지만

북미평화협정 체결과 남북관계 정상화를 통한

새로운 한반도를 만들고자했던 고민과 실천은

21세기 615선언으로 이어졌고

한총련은 시대의 선각자였다고 할만하다.

 

우리는 한 때

혁명의 막차를 탔다고 한탄했다.

소련 붕괴를 보며 

김주석의 죽음과 이후 닥친 고난의 행군을 보며...

IMF체제, 신자유주의 반동 시대를 맞아

스스로 인지부조화가 아닌가 

끊임없이 자기 정체성을 고민하며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우리는 기어이 살아남아

전세계가 미쳐돌아갈 때

아들딸 손을 잡고 촛불항쟁을 일으켜

새로운 시대를 주도할 기회를 얻었다.

 

86세대들은 수구냉전세력을 박멸하는 

역사적 소임을 다하도록 도와주고

한총련 세대들은 

우리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과 함께, 

분단체제를 해체하는 역사적 과제를 실현하자. 

 

 

한영애 - 너의편 /

1부를 마치며, 2020년을 보내며 벗들에게 노래 하나 띄웁니다.

건강해야 합니다. 

몸관리 잘해서, 팔팔한 몸으로 통일조국 구석구석 구경다닙시다.

 

< 2부로 계속 >
응답이 없으면, 필자의 전투력이 떨어집니다. 전투력이 떨어지면 속도가 늘어지겠죠. 댓글, 메일, 공유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