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가자 북으로(9)
사월혁명소설
이름이 좋아 수도 서울이고, 한양성 조선왕조 5백년 도읍지였다.
길에 내려서면 진흙탕이고 인도(人道)에 올라서면 온통 쓰레기와 먼지투성이였다. 행길가엔 연탄재가 나딩굴고 휴지와 온갖 쓰레기가 제멋대로 버려져 있었다. 거리의 하수구엔 분뇨와 오물을 마구 버려 악취가 진동을 했다. 서울 시가지 한복판을 관류하는 청계천변의 수많은 판잣집들에서 쏟아져 나오는 생활 오폐수는 그대로 하천으로 흘러들었다. 악취가 코를 찌르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조간신문을 펼치면 1면이 정치면인데, 이 나라 정치는 보나마나다. 정부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온통 세상이 뒤죽박죽 박죽뒤죽이었다. 국이 끓는지 장이 끓는지 알 수가 없는 세상이었다. 또 알아보아야 속수무책 대책이 없었다. 대가리 열두 개 달린 천재 귀신 통치자가 나타난다 해도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형편인 것이다. 운영되는 세상이 아니고 굴러가는 세상인 것이다.
신문 2면은 사회면인데 자고새면 생활고로 한 가족이 뭉텅이로 목숨을 끊는 풍조가 유행하고 있었다.
불광동 산동네 움막에 사는 47세 박정수씨 부부는 서울역 양동 뒷골목 판잣집에서 살다가 철거 당한 신세였다. 서울역에서 암표장사로 생계를 이었었다. 이제 암표장사도 못하게 되어 이를 비관 아들 딸 3남매 끌어안고 다섯 식구가 연탄불을 피워놓고 저 세상으로 갔다.
용산동2가 8번지 거주 30세 신호식씨는 실직을 당해 벌이가 없었다. 그러는 판에 지병을 앓는 아내의 신병이 악화되어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병원 데리고 갈 돈이 없었다. 죽어가는 아내를 보다 못한 신호식씨는 집앞 고목나무에 목을 매어 죽고 말았다.
청파동에 사는 노처녀 최선숙양은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에 합격을 했는데도 입학금을 낼 돈이 없었다. 몸저 누운 노모의 병환 치료비도 못 대는 형편이었다. 이를 비관 수면제를 한줌 털어 넣고 세상을 작별했다.
한강로 1가 71에서도 상왕십리 401번지에서도, 용두동 683-21에서도, 북아현동 32-21에서도 모두 생활고로 키니네를 먹고 목숨을 끊은 사건이 있었다.
강도, 깡패, 날치기 들치기, 절도사건은 날마다 헤일 수가 없어서 경찰이 미처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태에 있었다.
이런 일들이 모두 다 먹고 살 것이 없어서 벌어지는 생계범죄였다. 사흘 굶어서 남의집 담장 넘어가지 않을 자가 없는 것이다.
시골 벽촌에는 구십만명의 아이들이 춘궁기 보릿고개를 넘느라 밥을 굶고 있다는 통계다. 시골 국민학교들엔 배가 고파 학교를 결석하는 학생 수가 날로 증가 중에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풀뿌리 나무껍질로 배를 채우는 조악한 식생활과 불결한 생활환경 탓으로 시골마을엔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는 것이다.
전라북도 진안군 용담면 호계리 주민 65명은 집단 장티푸스로 마을 전체가 신음 중에 있었다.
이런 농촌의 빈곤과 극한적인 불행은 한창 정신과 육체가 건강하게 성장해야 할 농촌 청소년들을 병들게 하고 있었다.
누가 정든 고향산천을 떠나고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어쩔 수가 없어서, 부모님이 준 생목숨 못 끊고 젊디젊은 육신 앉아서 굶어죽을 수가 없어서, 농촌 청소년들이 살 길을 찾아서 무작정 상경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 경찰국의 공식 집계에 의하면 이렇게 무작정 상경하는 청소년들이 하루에 15,6명씩 서울역에 내린다는 것이다. 61년 들어 2월1일에서 3월 20일 까지 약 50일 동안에 7백50여 명이 정든 고향을 뒤로하고 밥을 벌어먹기 위해 서울행 열차를 탔다는 것이다.
공식집계가 이렇고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숫자일 것이라는 관계 공무원의 말이었다. 이 기간 동안 정처 없이 거리를 헤매는 농촌 소녀 120명을 남대문경찰서에서 귀향조치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상경한 시골 청소년들을 노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의 손에 걸려들면 십중팔구는 넝마주이나 좀도둑 날치기로 전락을 하고, 여자아이들은 대부분 매음굴로 팔려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런 세상을 누가 어떻게 구원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일본 놈들이 쌀 면화, 뒷산 소나무까지 다 베어 가버린 땅에 미국 놈들이 들어와서 전쟁으로 분탕질을 쳐댔으니 남아난 것이 없었다. 단군왕검이 물려준 금수강산이라 지만 어디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아무런 건덕지가 없었다.
지금도 쓸데없는 전쟁을 위해 70만명이나 되는 군대를 공짜로 먹여 살리고 있는 것이다. 7백명의 직원을 둔 생산 공장 1천개를 운영할 수 있는 노동력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요즘 실업자들이 외쳐대는 ‘실업자들의 살길은 통일에 있다’ 라는 구호는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는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짐승처럼 살아가는 것은 모두가 다 나라를 잘못 만났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나라만 제대로 돌아가는 나라를 만났드라면 우리 꼬라지가 이런 꼬라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금수강산에 태어난 우리 꼬라지가 요모양 요꼬라지가 된 것은 우리 인민 스스로의 잘못도 있지만, 보다는 힘센 놈들 큰 나라들의 억압과 침략, 불법 강점 자원수탈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3월 22일 ‘2대악법반대투쟁’ 은 그리 됐고... 내가 사라진 후 2월 25일 ‘민족자주 통일 중앙협의회’ 가 정식결성이 되었는데, 수천년을 두고 연면히 흐르는 민족정기가 동학혁명 삼일만세...그리고 또 한 번 솟구친 거야.”
강욱철은 오랜만에 김승국을 만나 감회가 깊은 듯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핫, 이 사람 갑짜기 대종교(大倧敎) 도사가 됐나?”
“아, 아니야... 요즘 부쩍 그런 생각이 들어. 박정희 따위한테 눌려 꼼짝 못하는 요즘 세태를 보면서 더욱 민자통(民自統) 생각이 나는 거지...”
“하긴 오죽하면 그런 생각이 다 들겠나?”
김승국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중화전 쪽의 먼 하늘에 눈을 주었다.
“적막강산이야. 민족 모순에 대해선...”
그러면서 강욱철은 4.19 때 탈취한 트럭을 타고 미아리 고개를 넘던 일을 생각했다.
경무대 앞에서 무차별적 총격으로 데모대를 밀어내기 시작한 경찰부대는 중무장 장갑차를 앞에 세우고 광화문까지 진격하고 있었다.
전투복들의 무자비한 실탄 사격으로 맨주먹의 시위 군중은 큰 파도 덩어리가 무너져 내리듯 움씰거리며 해무청 앞 광화문 세종로를 거쳐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 시청 앞 광장까지 밀려 내렸다. 광화문에서 미쳐 태평로 쪽으로 빠지지 못한 한 줄기는 안국동 한국일보 쪽으로 밀렸다. 시청 앞 광장에서 을지로 입구를 거쳐 종로 쪽으로 진출한 한 갈래가 광화문통 탈환을 시도 했으나 불가능한 일이었다. 강욱철과 김승국이 동승한 불자동차가 광화문 네거리로 나섰다가 경찰부대의 맹렬한 사격을 받기도 했다.
안국동 로타리에 밀린 데모대는 돈화문을 거쳐 원남동 로타리에서 종로4가 쪽에서 올라온 데모대와 합류했다. 이때는 벌써 비상계엄령이 내려 계엄군이 시내로 들어오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강욱철은 반공회관이 불타는 틈을 이용해 중부소방서의 데모진압용 불자동차를 김승국 등과 노획, 시가지를 질주하며 시위군중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있었다. 그는 머릿수건을 질끈 동이고 커다란 쇠몽둥이를 휘두르며 ‘타도 이승만!’ ‘살인 경찰!’을 외치고 있었다.
이곳저곳에서 총소리가 우짖고 여기저기 불타오르는 검은 연기가 서울의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귀를 찢는 듯한 싸이렌 소리와 함께 흰 광목에 싸인 시체들이 시발차나 불자동차 위에 실려 내리고 있었다.
강욱철은 그 날 원남동 로타리에서 종로 쪽에서 올라온 데모대와 합류 기세를 올리다가 창경원을 지나 혜화동 로타리에서 또다른 한 무더기의 데모군중을 만났다.
데모대의 주력은 종로, 동대문, 신설동 로타리를 오르내리며 기세를 올리가다 계엄군 땡크의 출현으로 고려대학으로 모두 몰려들었다.
이 무렵 강욱철이 소속한 혜화동로타리 데모대는 계엄군의 땡크에 밀려 그 일부가 결국 미아리 고개를 넘었다.
한밤중 서울시 일원은 이미 계엄군의 땡크부대에 모두 점령을 당했다.
더 이상의 저항은 계엄군의 땡크와 맞서는 일인데 매우 무모한 시도인 것이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붙잡히면 빨갱이 그물을 씌울 것이다. 일몰후의 난동(?)은 비상계엄 하에서 군대와 맞선 행동이 된다. 곧 반란행위 반란 분자로 낙인을 찍을 것이다. 데모대가 지나는 밤거리는 황량했다.
자유당관계 건물이나 관공서는 습격을 당했다. 특히 경찰파출소는 남김없이 파괴되고 불을 질러버렸다.
미아리 고개를 넘어온 데모대를 향해 강욱철이 말했다.
이들은 이승만 타도!를 외치며 하루 종일 사선을 넘나들며 거리를 질주했던 전사들이었다.
“동지들, 우리는 이제 꼼짝없이 반란군이 되었소. 오늘 하루 살아보니 온 세상이 내 것 같았소. 이 보잘 것 없는 내가 이 세상의 주인인 것 같았소. 아니, 내가 바로 이세상의 참다운 주인이었소.”
강욱철은 이 땅의 주인 자리를 다시는 빼앗길 수가 없었다.
이승만은 반공을 내세워 종주국 미국을 업고 남녘민중의 주인자리를 가로 타고 권좌에 앉아 있었다. 빼앗긴 주인자리를 찾아야 한다. 바닥 민중의 힘으로 말이다.
“자, 갑시다!”
강욱철이 탄 차량을 선두로 다섯 대의 추럭이 부릉부릉 시동을 걸었다.
미아리 고개 넘어 길음동 다리거리에서 앞으로의 진로를 협의하기 위해 잠시 멈추었던 추럭들의 데모행렬이 어둠을 뚫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계엄군의 땡크에 밀려 일단 미아리 고개를 넘어선 다섯 대의 차량데모대는 정릉으로 갈라지는 길음동 미아극장 앞에 차들을 세웠었다. 한밤중 어둠 속에 미아리 고개를 넘어온 차량데모대의 앞으로의 진로는 진퇴양난이었다.
여러 의견이 분분했으나, 머릿수건을 질끈 동이고 커다란 쇠몽둥이를 들고 불자동차의 앞자리를 지키고 서서 지금까지 데모대를 선도해온 강욱철의 꿋꿋함을 그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김승국의 도움도 컸지만 대체로 강욱철의 의견에 따르기로 각 차량별 리더들이 찬성을 표해 주었다. 데모대를 만재한 추럭들은 라이트를 밝게 켜고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정릉천변 길을 따라 속력을 높이고 있었다.
“이승만을 타도하자!”
“살인 경찰 때려잡자!”
구호소리도 드높았다.
이들은 이미 피를 보았고 파출소를 때려 부수고 기름을 끼얹어 불을 질렀다. 이들 중에는 파출소 습격중 미처 총기를 수습하지 못하고 도망을 간 경찰들의 무기를 노획하여 소지한 대원들도 있었다. 경무대 경찰들의 무차별 사격이후, 데모분위기가 완전한 혁명상황이 되었을 때 이들은 이른바 ‘폭도’ 가 되어 있었다. 극렬하게 경찰과 맞서 피를 흘리며 목숨을 걸고 싸웠던 젊은 전사들이었다.
앳된 얼굴의 중 고등학생들과 거리의 청소년들이 대부분이었다.
‘전우에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누가 먼저인지도 모르게 전우가의 합창이 터져 나왔다. 자신들의 비장한 각오와 싸움을 멈출 수가 없다는 현재의 마음가짐의 표현이었다.
‘원한에야 피에 맺힌 경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떨어져 간 전우야 잘 자거라!’
피 끓는 젊은이들이 나라를 위해 부를 만한 행진곡 하나가 없었다.
우선 급한 대로 격한 감정을 삭이느라 발을 구르며 노래가사를 고쳐서 불러대고 있었던 것이다.
“김동지! 그날 사일굿날 말이야... 어떻게 그렇게 딱 만났지?”
“어헛, 이 사람... 지금 우리 사는 것 덧 목숨... 덤으로 사는 것 아닌가.”
그 해 여름방학으로 잠시 헤어졌다가 7.29 선거가 끝나고 만났을 때에도 김승국동지와 오늘과 똑같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효자동 종점에서 민가의 담장을 넘어 뛰어든 이야기. 자정을 넘긴 시간에 미아리 고개를 넘던 이야기. 정릉뻐스종점에 추럭을 버리고 숲 속 계곡으로 숨어들던 이야기...
상황이 사실 너무 급박했었다.
다시 미아리 고개를 넘자니 화약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격이었다.
중무장한 계엄군의 땡크가 아가리를 벌리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의정부 쪽으로 빠지자니 북쪽에서 출동한 계엄사단이 계속 서울을 향해 진격 중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바엔 대담하게 마음을 놓아 버리는 것이었다.
붙잡히면 반란분자, 반란군으로 몰리는 건 빤한 이치였다.
궁하면 통한다고 강욱철은 그때 신통한 생각을 했었다.
정릉에서 수유리 쪽 릉선을 넘어 동장대, 백운대에서 인수봉으로 통하는 우이동쪽의 험준한 산등성이로 스며들 계획이었다. 백운대 인수봉 서북 송추쪽을 넘나들면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