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2월 혁명과 10월 혁명 시기의 정치신문
레닌의 정치신문과 현대사회(7)
본문요지
레닌은 2월 혁명이 발발하자 러시아사회는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주의 혁명으로 계속해서 나아가야 하며, 이를 위해 임시정부에 대한 불신임과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돌리자는 주장을 했다. 복간된 [프라우다]와 정치신문들은 레닌의 이 같은 ‘연속 혁명’ 사상을 노동자와 병사들 사이에서 널리 전파하고, 당시 복잡다단한 정치정세 하에서 실제 무장봉기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데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3.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과 10월 혁명 시기의 정치신문
1) 러시아 2월 혁명과 10월 혁명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불과 2년 만에 제정 러시아의 힘이 완전히 소진되었다. 1917년 들어 수도 페테르부르크는 매우 긴장감이 감돌았다. 2월 17일 페테르부르크 푸틸로프 공장의 한 작업장에서 파업이 일어나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2월 24일에는 약 20만 명의 파업이 벌어졌으며 경찰과 충돌해 사상자가 발생했다. 2월 26일 아침, 노동자들은 볼셰비키의 호소에 호응하여 정치파업을 봉기로 전환시켰다. 그들은 경찰의 무장을 해제시킨 후 자신을 무장시켰다. 다음 날 봉기가 온 도시를 휩쓸었으며, 봉기한 노동자들은 무기고를 점령했다. 사병들은 혁명 측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봉기자들은 감옥을 점령하고 정치범을 석방했다. 이 봉기의 성공은 마침내 차르의 전제제도를 전복시켰다.
봉기가 승리한 날(2월 27일), 볼셰비키는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를 세우자고 호소하였다. 이날 밤, 타블리다 궁전에는 각 기업과 부대에서 선출한 1차 대표가 통일적인 혁명조직인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노동자계급과 농민의 혁명적 민주독재를 구현하는 소비에트 외에도, 자본가계급 독재를 의미하는 ‘임시정부’도 등장했다. 국가두마(러시아 의회)는 수도에서 혁명이 승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임시위원회를 선출해 시내 ‘질서’를 바로잡기로 했다. 이 임시위원회는 소비에트 의장단 내에서 우세를 점한 사회혁명당원과 멘셰비키의 지지를 받았다. 이리하여 러시아 국내에는 두 개의 정권이 성립되었다. 임시정부와 노동자병사대표 소비에트는 각각 계급적으로 두 개의 독재, 즉 부르주아 독재와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 독재가 병존하는 독특한 국면을 형성했다.
차르제도의 전복은 러시아의 한 역사 시기의 종식과 새로운 역사 시기의 시작을 의미하였다. 새로운 환경은 볼셰비키당의 새로운 전략전술을 요구하였다. 이 같은 객관적 정세의 요구에 따라 4월 하순 볼셰비키 당 제7차 전국대표자회의가 열렸는데, 이 회의는 “부르주아민주혁명을 사회주의혁명으로 전환시킨다”는 기본노선을 확정하고, 이를 위해 권력을 노동자와 농민이 동맹한 소비에트로 넘기게 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1917년 3월 4일, 지하상태에서 벗어난 볼셰비키당의 중앙위원회는 대자본가계급과 귀족 대표들로 구성된 정부와는 어떠한 합의를 맺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볼셰비키당은 노동자들에게 혁명을 추진하고 노동자 적위대를 창설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두 개의 정권이 병존하는 국면에서 소비에트의 진정한 계급적 의미와 역할에 대해 모든 볼셰비키 당원들이 즉각 이해했던 것은 아니다. 어떤 볼셰비키의 지방위원회와 일부 고참 당원들은 임시정부에 대한 잘못된 입장을 취했다. 그들은 노동자들에게 임시정부의 모든 행동에 대해 ‘감독’하라고만 호소하였다. 예컨대, 유배지에서 돌아온 카메네프는 절반 정도는 멘셰비키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그는 복간된 [프라우다]에 투고한 글에서 멘셰비키가 주장하고 있는 “상황을 지켜보며 결정하자”는 류의 기회주의적 태도를 보였다. 그것은 자본가계급인 임시정부가 권력을 계속 장악하도록 허용하며, 대중으로 하여금 임시정부가 마치 혁명에 유리한 행동을 할 수도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들었다.
레닌은 아직 해외에 머물면서 <먼 곳으로부터의 편지>라는 제목을 단 일련의 글을 통해 ‘연속 혁명’ 사상에 입각한 전략 방침을 제시했다. 거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강조했다. 즉 혁명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완성된 것은 단지 혁명의 일단계일 뿐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영웅적 정신을 발휘하여 계속해서 혁명의 제2단계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 부르주아 정부가 경찰력을 재건하고 낡은 군주제를 구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반드시 노동자들로 구성된 경찰과 민병대를 창설해야 한다는 등이다.
레닌은 또 ‘연속 혁명’을 위한 구체적 전략 방침에 대해 “임시정부에 대한 신임을 완전히 버릴 것” 등 일련의 전술도 제시했다. 그가 귀국 다음 날인 4월 4일 당에 제출한 ‘4월 테제’는 바로 이러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볼셰비키당이 레닌이 제시한 전략 방침에 기초해 사상통일을 이루는 데에는 4월 4일부터 4월 29일까지 대략 3주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처음 당 내부의 토론은 순조롭지가 않았다.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 사회주의혁명으로 즉각 전환하자는 ‘4월 테제’의 발표는 모든 부르주아정당과 멘셰비키, 사회혁명당의 격렬한 반대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볼셰비키당 내부에서도 일각의 거센 반발이 일었다. ‘4월 테제’가 [프라우다]에 처음 발표된 다음 날 <우리의 불일치>라는 제목의 레닌 테제에 동의하지 않는 중앙위원 카메네프의 글이 실렸다. 카메네프는 이 글에서 레닌의 테제는 그의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며, [프라우다]나 당 중앙은 찬성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당내에 4월 테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카메네프 외에도 리코프, 피달코프 및 그들의 추종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러시아는 사회주의혁명을 실현할 만큼 성숙하지 않았다” 단언하였다. 4월 14일 페테르부르크에서 볼셰비키의 시 대표자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레닌의 입장은 첫 승리를 거두었다. 4월 24~29일, 볼셰비키 당 제7차 전국대표자회의(‘4월 대표회의’)가 페테르부르크에서 열렸다. 이 회의는 러시아 국내에서 처음 개최된 볼셰비키 대표회의인데, 그 중요성에 비추어 보자면 정식 당 대회에 버금간다고 할 수 있다. 이 전국대표자회의에서 토론 끝에 레닌의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됨으로써 당의 정치적 단합을 이룰 수 있었다. 이로써 당은 장차 맞게 될 ‘10월 혁명’을 위한 사상적 준비 작업을 완료했다.
볼셰비키가 이렇듯 3주 만에 레닌의 사상을 중심으로 단결할 수 있었던 데에는. 지난날 당이 겪었던 견결한 투쟁의 전통 외에도, 다음 두 가지 요소가 직접 작용하였다. 첫째, 4월 중 발생한 일련의 중대한 정치적 사건들이 레닌의 4월 테제의 정확성을 입증하였다. 예컨대 4월 18일, 밀류코프 임시정부 외무장관은 영국•프랑스 등 협상국에 각서를 보내 러시아는 완전한 승리를 거둘 때까지 계속해서 독일과의 전쟁을 수행할 것임을 재확인했다. 이는 즉각적인 전쟁 종식을 원하는 광범한 노동자와 사병들의 불만을 폭발시켰다. 4월 18일과 20일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는 두 차례에 걸친 대규모 노동자 항의시위가 벌어졌다. 페테르부르크 노동자들은 볼셰비키당의 호소에 호응하여 일을 멈추고 거리로 나왔으며, 10만 명 이상의 시위자가 행진했다. 이에 대해 자본가계급의 신문들은 볼셰비키를 향해 “내란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비난을 퍼부었다.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4월에 있은 이 같은 동시적 행동은, 이번 2월 혁명이 발발한 이래 처음으로 혁명의 평온한 발전 국면을 깨뜨렸다. 그것은 수많은 대중들에게 “어느 쪽을 따를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도록 하였다.
둘째, 당의 중앙기관지인 [프라우다]의 역할이 컸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기화로 차르 정부가 강제 폐쇄시켰던 [프라우다]는 1917년 3월 5일에 복간되었다. 4월 5일 귀국한 지 이틀 만에 레닌은 이 신문의 편집위원회에 참여하였으며, 4월 7일 [프라우다]에 4월 테제를 게재하였다. 이후 이 신문은 그것을 널리 홍보하면서 각지의 학습 상황을 여러 차례 소개하였다. 예컨대, 4월 12일에는 울코프의 당위원회 책임자인 수릭 이바노프가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4월 테제에 관한 강연을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 소식에 따르면, 매번 강연회에 참가한 사람은 대략 천 명 정도 이었으며 청중들은 모두 레닌의 대담한 계획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4월 20일 [프라우다]는 우랄에서 온 소식을 전하면서, “우랄 지구당대회 대표 65명은 43개 당 조직과 당원 1만 4천 명을 대표한다. 그들은 4월 테제에 찬성하였으며, 당 중앙위원회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유일 지도자인 레닌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보도하였다. 4월 23일자에서는 “발트함대 당위원회가 4월 테제를 당의 지도 강령으로 승인했다”1) 는 크론스타트로부터의 소식을 전했다.
[프라우다]는 이 밖에도 평론을 발표하였으며, 각지 책임자들이 직접 나서서 4월 테제를 홍보하고 그에 관한 학습이 심도 있게 진행되도록 요구하였다. [프라우다]의 이러한 보도들은 이 테제가 많은 당원들과 노동자들 사이에서 신속히 알려지도록 하였으며, 당 전체가 4월 테제에 대한 심화 학습을 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만약 [프라우다]의 이러한 활동이 없었더라면, 당시 부르주아 신문과 호국분자들의 언론이 볼셰비키를 맹공격하고 있는 상황에서 당은 수동적인 상황에 처하거나 당내 이견이 크게 증폭되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4월 대표자회의’는 부르주아민주혁명을 사회주의혁명으로 전환한다는 기본 노선과, 정권을 노동자와 농민의 소비에트로 넘긴다는 방침을 확정했다. 이 방침의 기초 위에서 당은 군중 속에서 거대한 작업을 전개해 나갔다. 그렇다면 이런 기본방침의 실현은 어떻게 보장되었던 것일까?
노동자와 병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가 서남부전선에서 취한 공세에 실패한 것을 계기로 발생한 ‘7월사건’ 이후, 노동자계급이 평화적인 방식으로 정권을 탈취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이제 무장봉기만이 볼셰비키당의 기본방침을 실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됐다. 이 때문에 레닌은 소비에트 내부의 힘 관계의 변화를 봉기 시점 선택의 가장 결정적 요인으로 주목했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봉기가 성공하려면 반드시 ‘대중적’이어야 하며, 그 조건은 바로 봉기를 지도할 수 있는 ‘대중적 지도기관’의 출현임을 잘 알고 있었다.
8월 하순 경 볼셰비키가 이끄는 수도 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와 민중들은 총사령관 코르닐로프의 군사반란을 분쇄했다. 이 사건은 마침내 이러한 대중적 봉기 지도기관이 출현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이 반란이 분쇄됨으로써 국내의 계급 역관계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는데, 9월부터 러시아 전역에 소비에트의 ‘볼셰비키화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각 지방 소비에트의 대의원 수에 있어 볼셰비키당원들은 다수파를 차지하였다. 이는 대중들의 정치적 각성이 새로운 차원으로 성장한 것을 의미하였으며, 8월 코르닐로프 반란사건을 겪으면서 노동자와 농민이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의 본질, 즉 그들이 지키고자 한 것은 자본가계급과 지주계급의 이익이었음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음을 의미하였다.
전선에 있는 사병들도 자본가계급과 지주계급의 대변자인 케렌스키 임시정부가 유혈전쟁을 더 질질 끌고 갈 것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절대다수 대중은 이처럼 자신들의 체험에 근거하여 볼셰비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대중은 소비에트 내의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 대표를 파면시키고 대신 볼셰비키 대표를 내세웠다. 이렇듯 소비에트가 볼셰비키화한 것을 보게 되자, 레닌은 정권을 탈취할 조건이 충분히 성숙하였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9월 12~14일 중앙위원회에 “당은 봉기를 조직”할 것을 호소하는 편지를 연속으로 썼다.(이 무렵 레닌은 ‘7월사건’으로 수배되어 잠시 인근 핀란드로 도피 중에 있었다) 중앙위원회는 9월 15일 레닌의 제안을 받아들였으며, 치밀한 준비 끝에 11월 7일(러시아력 10월 25일) ‘10월 혁명’을 성공리에 완수하였다. 11월 8일 새벽 동궁이 함락되고 케렌스키 임시정부가 와해되었다. 그에 앞서 11월 7일부터 9일까지 전(全)러시아노동자•병사소비에트 제2차 대회가 스몰리니 궁에서 개최되었으며, 대회는 임시 소비에트정부 격인 ‘인민위원회’를 선출하고 레닌은 인민위원회 의장에 당선되었다.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2) 정치신문의 역할
1917년 2월 혁명이 발생한 이후 전체 과정을 되돌아보면, 대중의 정치적 각성과 소비에트의 변화는 한순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최소한 다음 3번의 중요한 전환점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첫째는 ‘4월사건’이다. 이 사건을 통해 볼셰비키와 선진 노동자들은 임시정부의 계급적 본질을 깨달았으며, 이 자본가계급정부가 제국주의 전쟁을 계속해 나가려는 의도를 분명히 인식하게 되었다.
둘째는 ‘7월사건’이다. 이 사건은 임시정부가 서남부전선에서 군사공세에 실패한 것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수도의 노동자들과 병사들은 정부가 모험적이고 불의한 전쟁 정책을 계속하는 것에 대해 대규모 시위를 벌이며 항의했다. 하지만 이런 반발은 오히려 임시정부가 볼셰비키를 탄압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이 사건으로 임시정부와 소비에트 두 개의 정권이 병존하는 상태가 종식되고, 자본가계급 독재정권이 수립되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셋째는 ‘8월사건’이다. 볼셰비키당의 지도하에 노동자들이 코르닐로프 반란을 성공적으로 분쇄함으로써 전국의 소비에트가 볼셰비키화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상 3가지 중요 사건들은 모두 대중의 정치적 각성을 크게 촉진시켰는데, 이들 중요한 전환점 뒤에는 모두 [프라우다]의 활약이 있었다. 아래에서 대표적인 사례 몇 가지를 소개하도록 하자.
우선 ‘4월사건’ 관련한 사례이다. 4월 20일 임시정부는 협상국과의 약속을 지켜 러시아는 독일과 끝까지 싸우겠다는 각서를 공표하였다. 이에 대해 [프라우다]는 당일 레닌의 <파산했나?>라는 글과 당 중앙의 관련한 결의를 실었다. 4월 20일 시위에서 “타도 밀류코프!” 구호가 출현하였으며, 4월 21일 시위 때도 “임시정부 타도!” 구호가 나왔다. 이에 대해 중앙위원회는 즉각 이들 구호의 좌편향적 오류를 경고했다. 그 같은 결의 내용은 4월 21일 [프라우다] 제37호와 4월 23일 [프라우다] 제39호에 게재되었다. 4월 21일 페테르부르크 10만 노동자들의 시위 후, 모든 자본가계급과 쁘띠부르주아 신문들은 일제히 볼셰비키가 내전을 획책한다고 비난하였다. 이날 당 중앙은 결의문을 통해 부르주아신문과 사회혁명당•멘셰비키 신문이 볼셰비키가 내전을 일으키려 한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린 것에 대해 통렬한 반격을 가했다. 다음날 [프라우다] 제38호에 중앙의 결의문 전문이 실렸다.
다음은 ‘7월사건’에 관한 사례이다. 6월 중순~7월 초 임시정부는 볼셰비키와 대중의 일치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남부전선에서 맹목적인 러시아군의 진공을 감행하였지만 실패로 끝났다. 이로 인해 노동자와 병사들의 불만과 대규모 시위를 불러일으켰다. 임시정부는 오히려 이를 계기로 노동자와 병사들의 시위를 진압하고, 7월 5일에는 [프라우다]를 강제 폐쇄시켰다. 이후 부르주아신문은 볼셰비키가 “무장폭동을 일으켜 합법정권을 전복시키려 한다.”고 대대적인 공세를 퍼부었으며, 레닌을 ‘독일 간첩’으로 몰아 재판에 넘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볼셰비키는 즉시 명칭을 바꿔 계속 신문을 내기로 결정한 후 7월 6일 [프라우다 타블로이드판]이 나왔다. 이 신문은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의 <노동자 병사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을 실었는데, 7월 3일 시위에 참석하려는 노동자와 병사들은 즉각 공장과 병영으로 복귀함으로써 도발자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도록 자제를 촉구했다. 여기에 레닌의 글 4편이 실려 자본가계급의 볼셰비키당에 대한 각종 모략을 체계적으로 반박하였다.
이렇듯 볼셰비키당은 잠시 퇴각이 필요했던 시점에서 정치신문을 통해 자본가계급 신문과 맞서는 여론전을 전개하는 한편, 혁명대오를 제대로 이끌면서 그 역량을 효과적으로 보호함으로써 다가올 국면 전환에 대비할 수 있었다.
끝으로, ‘8월사건’에 관한 사례이다. 8월 27일 코르닐로프가 무장반란을 일으켜 임시정부에 최후통첩을 보내 총사퇴를 강요하고 권력을 자신에게 내주라고 요구하였다. [노동자신문]([프라우다]가 개명한 신문)은 당 중앙의 지시에 따라 ‘호외’를 발간해 다른 모든 신문 가운데서 가장 먼저 이 소식을 보도했다. 도시 전체 민중들에게 무장하여 반군에 저항할 것을 호소함으로써 반군을 분쇄하는 데 혁혁한 공헌을 하였다.
이 시기 [프라우다]가 노동자와 인민에게 미친 실제적 영향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이끄는 전 러시아소비에트 제1차 대표자대회가 6월 3일 열렸다. 그 대회는 육군장관 클론스키의 공격명령을 승인하였으며, 볼셰비키 당 중앙의 호소 아래 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와 병사들은 6월 10일 시위를 벌일 예정이었다. 그러나 6월 9일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다수파를 점한 소비에트는 시위 금지를 결의했다. 그런데 이미 예정된 시위를 하루 만에 갑작스레 취소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소비에트의 결정에 불복하게 되면 그것은 자칫 상호 대립하는 결과를 낳게 되므로 곤란하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이날 밤 늦게 볼셰비키당은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회의가 끝나자마자 레닌은 차를 몰아 [프라우다] 편집부로 달려갔다. 그때는 이미 10일 새벽 2시로 당일 신문은 인쇄를 시작한 상태였으며, 1면 전체는 거리로 나가자는 호소문으로 채워져 있었다. 레닌은 편집부에 그 글을 즉각 철회하고 방금 통과된 중앙위원회의 긴급 결정으로 바꿀 것을 요구했다. 그 결정문은 레닌이 직접 쓴 것으로, 단지 72개의 단어로 구성되어 있을 뿐이었다. 이리하여 조판 후의 신문에는 큰 여백이 남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동이 틀 무렵이었고, 중앙위원회의 새로운 지시는 제 시간에 맞춰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전달되어야만 했다. 레닌은 즉각 결단하여 일면에 큰 공백을 남겨둔 채 출간토록 하였다. [프라우다]의 이 같은 보도 덕택으로 당일 어떠한 단체도 시위에 나서지 않을 수 있었다.
이 에피소드는 당시 [프라우다]의 영향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당의 다른 시스템이 채 작동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정치신문을 통해서 중요한 대규모 대중시위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공개적인 신문이 당시 볼셰비키 중앙이 당원 및 군중 전체를 이끄는데 있어 관건적인 수단이었음을 보여준다. 혁명의 고조기에는 대중의 정치적 수준과 정치 참여에 대한 열기가 전례 없이 높아진다. 다른 한편으론 각종 정치세력의 활동이 매우 활발해지면서 정세 변화 역시도 빠르게 발생한다. 이 같은 비상한 여건 속에서 급변하는 정치정세에 맞춰 투쟁에 필요한 방침이 가장 빠르게 대중에게 전달될 필요가 있는데, 이를 위한 단 한 가지 방법은 공개적 일간지를 통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을 통해 당원과 대중 사이가 ‘하나의 과정’으로 최대한 좁혀지게 된다.
이하의 사례에서는 군대에 대한 [프라우다]의 영향력을 엿볼 수 있다. 2월 혁명 직후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의 ‘1호 명령’과 [프라우다]의 적극적인 선전을 통해 전국 거의 모든 부대에 ‘병사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자본가계급은 군대와 노동자 사이를 이간질하기로 결심하고, 3월에 페테르부르크의 수십 개에 달하는 부르주아신문을 통해 전선에서 러시아군의 실패 원인이 포탄 부족 때문이며, 그것은 노동자들의 파업 때문이라는 유언비어를 대대적으로 퍼뜨렸다. 이런 내용의 신문들이 전선으로 흘러들어가자, 진상을 알지 못하는 많은 병사들은 노동자들에게 불만을 갖게 되었다. 후방의 부상한 병사들 중에서도 자본가계급의 선동으로 인해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시위가 잇달아 나타났다. [프라우다]는 이러한 유언비어에 대해 일격을 가하였다.
<노동자와 병사는 형제>라는 란을 만들어 현장에서 보내온 편지들을 일일이 게재하고, 노동자와 사병들이 직접 겪은 사실로써 자본가계급이 퍼뜨린 소문의 진상을 파헤쳐 주었다. 동시에 [프라우다]는 병사 대표와 노동자들의 상호 방문을 제안하고, 그들의 소감들을 게재하였다. 노동자와 병사는 상호 폭넓은 접촉을 통해 양쪽의 이익이 완전히 일치하며, 공동의 적은 다름 아닌 자본가계급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병사들은 잇달아 [프라우다]에 편지를 보내 감사의 표시를 전했다.
페테르부르크 경비구역에서 경비를 서는 일부 병사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프라우다]의 배달부 역할을 하였다. 서부전선 사령부 인쇄소에서 근무하는 피렉이라는 병사는 자신의 직무상의 편의를 이용해 [프라우다]에 실린 중요 기사들을 몰래 복사해 병사들에게 배포하였다. 병사들은 은밀히 [프라우다]를 읽고 서로 소식을 전하였으며, 오직 볼셰비키만이 자신들에게 평화와 땅과 빵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게 되었다.2)
이상의 모든 사실은 대중의 정치적 각성은 객관적 사건의 존재뿐만 아니라, 신문과 같은 대중매체의 보도와 정확한 해석이 필요하다는 점을 말해준다. 레닌은 이에 대해, “만약 일간지가 없었다면 선거는 여전히 암울했을 것이며, 선거가 갖는 대중에 대한 정치교육의 역할은 절반으로 줄거나 심지어는 그보다 훨씬 줄어들었을 것"3)이라고 말한 바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1905년 혁명 당시 소비에트가 대중 앞에 처음 등장했을 때 그것은 파업을 이끄는 ‘자발적인 대중기관’에 불과했다. 오직 레닌과 당의 ‘정치교육’ 하에서만, 그것은 파업을 이끄는 기관에서 봉기를 지도하는 기관으로 변모할 수 있었다. 1917년 3월 소비에트가 다시 등장했을 때도,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들의 지도하에서는 그것은 기껏해야 ‘정부를 감시하는 기관’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레닌과 볼셰비키의 지도하에 그것은 혁명적 기관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정치신문은 그러한 교육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4)
이 시기 레닌의 활동은 여전히 당 기관지 사업과 밀접하게 연계돼 있다. 1917년 2월 말 스위스에서 2월 혁명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자, 레닌은 즉각 당에 신문을 발간할 것을 지시했다. “현재 중요한 일은 신문을 발간하는 것이며, 노동자를 혁명적인 사회민주당으로 조직하는 일이다.”5)라고 말하였다.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후 그는 당 중앙위원회와 [프라우다]에서 일하였으며, ‘7월사건’이 발생할 때까지 [프라우다] 편집장으로 직접 편집부 사업을 이끌었다. 또 각종 회의에 참석해야 했기 때문에 아내인 크루프스카야조차 그와 만날 시간이 별로 없었다. 당시 편집부 사무실은 작은 방 두 개가 전부였는데, 비서실 한 칸과 편집실 한 칸이 있었다. 레닌은 이곳에서 매일 같이 가장 가까운 동지들과 회의하고 당의 절박한 문제를 토론하는 한편, [프라우다]의 편집계획을 논의하였다. 이곳에서 레닌은 노동자•병사•농민 대표들을 접견하였으며, 각지로부터 전달 된 편지에 답신을 보내기도 했다.
1917년 3월 초~7월 5일까지 레닌이 [프라우다]에 투고한 글은 174편에 달하였는데, 때로는 한 호에 2~3편의 글이 실리기도 하였다. ‘7월사건’ 이후 임시정부의 체포명령으로 할 수 없이 지하로 잠입해 핀란드로 도피하였지만, 그러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그는 [프라우다]와의 연락을 끊지 않았다. 7월 6일부터 10월 25일까지 [프라우다]에 발표한 글만 해도 33편에 달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정치신문은 러시아 혁명기 전반에 걸쳐, 즉 평상시든 혁명이 무르익던 시기이든지를 불문하고 당 전체 사업 중 가장 핵심적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본문 주석]
1) 이상, 赵水福‧ 傅显明 공저:《레닌과 신문사업》,베이징방송학원출판사 1986년판, p134, 베이징.
2) 이상 군대와 관련된 사례는, 위의 책, pp.139-140 참조.
3) 《레닌전집》 제21권, 인민출판사 1990년판, p381, 베이징.
4) 그 논리적 관계는 다음과 같다. 즉 대중적 봉기기관인 ‘혁명적 소비에트’는 봉기의 성공에 있어 필수적인 요인이다. 그런데 이런 기관의 등장은 당에서 노동자와 민중을 대상으로 한 장기적인 정치교육의 실시 결과이다. 그리고 인민 대중의 정치의식의 향상은 또한 신문이 ‘중개하는’ 정치적 경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정치신문은 ‘혁명적 소비에트’의 산파이며, 이 같은 정치신문 없이는 그 같은 소비에트도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5) 《레닌전집》 제47권, 인민출판사 1990년판, p565, 베이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