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대전 발발과 비합법 정치신문

레닌의 정치신문과 현대사회(6)

2020-10-26     김정호 북경대 박사

본문요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차르정부는 프라우다를 폐간시키고 볼셰비키 두마의원들을 체포했다. 전시의 삼엄한 계엄 하에서 볼셰비키당 국내외 조직 간의 소통은 큰 어려움을 겪었으며, ‘약한 연락’ 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처럼 합법적 공간이 대부분 차르 당국에 의해 파괴된 상황에서 비합법 ‘유인물(전단)’이 중요한 투쟁수단이 되었다. 당국의 검열을 거치지 않은 이 같은 유인물은 그 본질에 있어서 정치신문의 ‘초기 형식’이라 간주할 수 있다.

2.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 볼셰비키당의 정치방침과 정치신문

1)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볼셰비키당의 정치방침

1914년 7월 19일(서기 8월 1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것은 제국주의 양대 군사집단 간의 불의의 전쟁으로, 28개국 15억 명 이상의 인구가 잇따라 휘말려 전투에 만도 7400만 명이 동원됨으로써 민중에게 심대한 재난을 가져왔다. 이를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는 각국 사회주의 정당의 원칙성을 가르는 중요한 분수령의 하나가 되었다.

▲ 1904년에 열린 제2인터내셔널 암스테르담 대회

이 중대한 원칙적인 시시비비 앞에서 제2인터네셔널의 절대 다수 정당들은 기본적으로 자국 자본가계급의 정부가 수행하는 이 불의의 전쟁을 지지하였다. 반면 레닌이 이끄는 러시아의 볼셰비키는 전쟁과 평화 문제에 있어 맑스주의 원칙에 입각한 방침을 정하고 그것을 끝까지 견지했다. 노동자계급의 이익과 사회주의 사상에 충실한 볼셰비키는 민중들에게 전쟁에 반대할 것을 호소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전쟁이 가져올 모든 곤란을 이용해 차르제도를 전복시킬 것을 설득하였다. 이를 위해 당은 다음 세 가지 구호를 내걸었다. 첫째, ‘제국주의 전쟁을 국내전쟁으로’, 즉 이번 전쟁을 지배계급을 무너뜨리는 혁명으로 전환시키자는 것이다. 둘째, 차르 정부가 전쟁에서 패배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셋째, 이미 파산한 제2인터내셔널과는 완전히 결별한다는 것이다. 그중 첫 번째가 ‘기본 구호’이며, 이 시기 당의 총체적 정치임무를 대변하고 있다. 나머지 구호는 ‘실현 구호’의 성격을 지녔는데, 이상 세 개의 구호는 이 시기 볼셰비키당의 주요 정치방침과 임무를 구성하고 있다.

위의 제1차 세계대전 정치방침과 관련하여, 볼셰비키 당은 어떤 과정을 통해 그것을 확정했나? 비록 당시 레닌은 자타가 공인하는 당의 지도자였지만, 볼셰비키당의 그간의 관행을 보자면 객관적 정치상황에 중대한 변화가 있을 때는 통상 당 차원의 폭넓은 논의를 거쳐 당 대표자대회(당 대회)나 당 협의회 등 중요회의를 통해 당의 공식적인 정치노선을 확정하는 것이지, 몇몇 중앙위원이나 지도자 개인의 독단으로 결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시기 전쟁으로 인한 비정상적인 주변 환경은 러시아 국내와 해외 조직 간의 소통에 있어 큰 어려움을 초래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국내와 해외 조직이 각자 독자적인 역할을 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특수한 상황은 당시 해외와 국내 상황을 따로 살펴볼 필요가 있도록 만들었지만, 다른 한편, 당의 국내와 해외 부문 간에는 비록 연계가 극도로 어렵긴 해도 그렇다고 완전히 단절된 것은 아니었으며, ‘약한 연락’을 일정정도 유지하고 있었다.

이 같은 ‘약한 연락’은 전쟁 초기에는 두마 중의 볼셰비키 의원단의 합법적 신분을 이용해서 그들의 직접 왕래나 전보를 통해 이뤄졌다. 그러나 1914년 11월 4일 두마 볼셰비키 의원단이 모두 차르 정부에 체포되면서부터, 해외와의 연락은 주로 스웨덴 등 중립국에 파견되어 주재하는 당의 중개인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어떻든 비록 ‘약한 연락’일지라도 이런 연계가 일단 생기면 해외에서 레닌이 이끄는 당 중앙의 방침이 국내 조직에 전달될 수 있게 된다. 이는 필경 국내 조직들이 정치방침을 정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소련공산당 역사>는 “레닌의 테제는 일찍이 국가두마 의원인 페니 사 모일로프를 통해 러시아로 보내졌다.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할코프, 키예프 등지의 당 조직들은 모두 이 테제를 논의했다. 모든 당 조직이 이 테제에 찬성하면서 일부 수정 의견을 제시했다.”1)라고 적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당 전체 정치노선의 확정 과정을 보려면, 우리는 먼저 레닌이 있는 해외 당 조직과 관련된 상황을 주시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해외 볼셰비키 조직에서 전쟁과 관련한 정치적 방침을 정하는 과정은 어떠하였을까? 전쟁이 막 발발했을 때, 레닌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브로닝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현지 헌병들에게 체포되어 구류되었다. 이유는 그가 ‘수상한 러시아인’이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의 한 유력한 사회주의자의 주선으로 레닌은 다행히 별 탈 없이 석방될 수 있었는데, 석방 후 레닌은 스위스의 베른으로 갈 기회를 얻었다. 1914년 8월 말, 레닌은 베른의 한 볼셰비키 소조에서 그의 전쟁 관련한 테제를 발표하였으며, 이 소조의 기본적인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당의 공식 방침은 1915년 2월 스위스 베른에서 열린 볼셰비키 해외지부 대표회의를 통해 최종 확정됐다. 이 회의는 당의 전략전술을 토론하였으며, 전쟁문제에 관한 구호를 승인하였다. 이후 볼셰비키는 채택된 레닌의 방침에 따라 대중 속에서 혁명 사업을 전개하였다.

2) [사회민주당원]의 복간

당시 환경에서는 해외 조직에서 일치된 정치방침을 수립하기가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논쟁은 당내 투쟁의 성격을 띠고 있었을 뿐 아니라, 또한 국제적 성격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제 사회주의운동 내부에는 자국의 승리를 노골적으로 내세우는 ‘호국파’가 있었으며, 그 밖의 형형색색의 기회주의자들이 노동자계급이 이번 전쟁에서 정확하고 통일된 혁명노선을 정립하는 것을 방해하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카우츠키가 이끄는 ‘중앙파’의 해악이 가장 컸다. 왜냐하면 카우츠키는 교묘한 말로 그 추악한 행위를 감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편집장으로 있는 독일사회민주당의 [신시대] 잡지는 그 방패막이 역할을 하였다. “그의 이 같은 궤변술은 이미 매우 해롭고 비열한 수준”2)에 이르렀기 때문에, 만약 이들과 투쟁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이런 기회주의적 관점이 해외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내부로 침투될 위험성이 존재하였다. 

레닌은 볼셰비키 당 내부의 사상적 통일을 유지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현재 우리의 임무는 국제 기회주의와 그 비호자들(카우츠키)과 무조건적이고 공개적으로 투쟁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곧 출간할(대략 2면) 중앙기관지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방침이기도 하다.”3)

이리하여 1914년 가을 레닌은 해외에서 신문 복간을 서둘러서, 같은 해 11월 1일 [사회민주당원] 제33호 복간호가 제네바에서 출간되었다. 1917년 1월 31일까지 [사회민주당원]은 총 26호가 나왔는데, 레닌은 복간된 중앙기관지에 총 36편의 논문과 기사를 썼다. 이 논문과 기사는 마르크스주의 이론 문제와 볼셰비키 당의 전쟁과 평화 및 혁명에 관한 전략전술과 임무를 전면적이고 깊이 있게 논하는 것들이었다. 따라서 앞서 1915년 2월 베른회의의 성과는 기관지 [사회민주당원]의 활동과 분리할 수 없다. 

이 시기 레닌은 여전히 그의 글 속에서 당 기관지가 노동자계급을 격려하고 단결시키는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레닌은 1915년 3월 29일 [사회민주당원] 제40호에 발표한 글 <러시아사회민주당 노동자의원단에 대한 재판은 무엇을 증명했나?>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전쟁 발발 후 처음 몇 달 동안 러시아 노동자들의 자각된 선봉대는 사실상 중앙위원회와 중앙기관지 주변에 단결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4)

레닌은 또 1916년 6월 10일자 이 신문 제54-55호에 실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가 사회당 제2차 대표회의에 제출하는 제안>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끝으로, 반드시 대중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그들이 만약 비밀조직과 전시 검열을 받지 않는 비밀신문을 스스로 창간하지 않고서는, 이미 시작된 혁명투쟁을 효과적으로 지원할 수 없으며, 이를 촉진시키고 그것의 개별적 발걸음을 비평하고 그것의 잘못을 시정하며, 이 투쟁을 끊임없이 확대 강화시켜 나갈 수 없다.”5)

▲ 덴마크 코펜하겐. 1910년. 국제사회주의자 8차회의. 앞에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왼쪽)와 클라라 제트킨(오른쪽)

1915년 4월 8일, 크루프스카야는 술요푸니코프(스톡홀름에 파견된 볼셰비키)가 당시 [사회민주당원] 편집부에서 근무하던 티노비야프를 러시아로 보내달라는 요청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중앙기관지 편집부를 파괴해서는 안 되며, 우리의 일반적 해외기지를 파괴해서는 안 된다. 중앙기관지는 어느 때보다도 힘들게 전시(戰時)에 진지를 하나 이상 차지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중앙기관지 편집부는 국제적으로 적지 않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제는 불필요한 겸손은 제쳐두고 이 점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다. 중앙기관지 편집부 없이는 [공산당원](이론적 잡지-주)도 출판할 수 없다.”6)

물론 이는 크루프스카야 개인의 의견만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녀가 당내 다른 동료들과 하는 연락서신은 대부분 레닌의 의뢰로 작성되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출간된 [사회민주당원]이 국내 볼셰비키 조직에 전달되는 것은 레닌과 해외 볼셰비키의 의견이 러시아 국내 조직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통로였다. [사회민주당원] 복간 직후인 1914년 11월 14일, 레닌은 매우 기뻐하며 “중앙기관지는 국경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옮겨졌고, 머지않아 계속 수송될 것”7)이라는 편지를 칼빈스키에게 보냈다. 레닌은 1915년 7-8월 <사회주의와 전쟁>이란 글에서, “해외에서 출간된 중앙기관지 [사회민주당원]의 글이 페테르부르크에서 복사돼 각 성으로 보내졌다”고 썼다.8)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비상환경 속에서 해외에서 출간된 [사회민주당원]은 해외 당 조직은 물론 러시아 내 당 조직에 대한 올바른 정치방침 확립과 사상적 통합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당시 해외 조직과 러시아 국내 당 조직의 연결은 ‘약한 연락’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러시아 국내 당 조직의 상황을 단독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은 러시아 국내 당 조직에 지대한 어려움을 가져왔다. 차르 당국은 볼셰비키 당에 대해 유례없는 박해를 가했다. 볼셰비키 당원들은 경찰의 마구잡이 체포를 당해 파괴되지 않은 당 위원회가 없을 정도였다. [프라우다]를 포함한 볼셰비키의 모든 신문이 강제 폐간되었으며, 노조 조직은 대부분 해체됐다. 

전쟁 초기엔 국가두마 중의 볼셰비키 대표가 당 활동과 외부 연락에 있어 큰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여러 산업 중심지를 방문하고, 수많은 당 위원회를 복원하고 새로 건설하였으며, 노동자집회를 여러 차례 소집해 전쟁반대 결의를 채택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14년 11월 4일 경찰이 볼셰비키 두마 대표들을 모두 체포하면서 당이 공개적으로 투쟁을 영도할 수 있는 수단이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이 대중투쟁을 지도하는 것은 주로 비합법적인 ‘유인물’에 의존하였다. 전쟁이 발발한 지 일주일 만에, 페테르부르크, 에카테리노슬라프, 하르코프, 키에프, 모스크바, 우파, 투라, 사마라 등지의 볼셰비키 조직은 반전(反戰) 전단을 뿌렸다. 페테르부르크 위원회는 전쟁기간 동안 90여 종의 전단을 살포했는데, 월평균 3종 꼴로 총 30여만 부가 살포되었다. 이 같은 페테르부르크 위원회의 전단은 러시아 전역에 퍼졌다. 매우 불완전한 통계에 근거할 때, 대전 기간 중 40여 개 당 조직이 삐라를 살포한 바 있다. 또 에카테린부르크, 줄라토우스트, 이바노보보네센스크, 클라스노야르스크 등지의 당 조직과 돈바스, 카랑슈타트, 니더타운, 톤하안, 로스토프, 리가, 바쿠, 디플리스 등의 당 위원회도 이에 포함되었으며, 그들이 뿌린 전단은 모두 400여 종이었다.9)

1895~1897년 사이에 유인물(삐라)은 러시아 노동운동에 있어 대표적인 선동 형식이었다. 당시에는 러시아 노동운동의 지방 혁명조직들이 막 생겨날 무렵이었다. 이때의 유인물은 노동자계급의 대규모 파업이 러시아에서 발발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번에는 다른 합법적인 공간이 대부분 차르 당국에 의해 폐쇄된 조건에서 유인물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전단지를 포함한 당의 모든 비밀활동은 전쟁 환경하에서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대중적인 투쟁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1914년 8월 대전이 발발한 후 그해 말까지 대략 70회의 파업이 발생하였으며, 35,000명 가까운 노동자들이 참가하였다. 1915년에는 정부의 축소된 공식 통계를 적용해도 파업이 1,000회를 넘어섰으며, 50여만 명이 참가하였다. 유인물은 공단뿐 아니라 군대에도 출현하였다. 예컨대,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할코프, 키예프, 에카트리노슬라프, 리가 등 많은 산업중심지의 당 위원회는 전단을 군대에 살포했다. 볼셰비키는 병사들에게 후방의 파업 운동을 알려 주었다. 대중 속에서 혁명적 열정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을 말해주면서, 연합하여 차르 제도를 반대할 필요성에 대해 설명하였다. 아울러 전선에서 적국 사병과 함께 연합하여 항거할 것을 호소하였다……전쟁이 2년 째 접어들자 (적국 병사와의-주) 친목사건이 잦아졌다. 많은 부대에서 당 조직이 만들어졌다.”10)

이처럼 유인물은 당의 군대에 대한 사업에 있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역할을 했다. 당이 군대에서 사업하는 것이 큰 의미를 갖는 것은, 군대에는 수천수만 명의 농민이 집결되어 있었으며, 그들은 대부분 빈농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볼셰비키당 전단에는 ‘평화문제’ 뿐만 아니라 ‘토지문제’도 언급되었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기 러시아 국내 당 조직의 활동은 비밀전단과 분리될 수가 없다. 1897년 말 레닌이 유배지 슈신스코에서 쓴 소책자 <러시아 사회주의자의 임무>에서, 자신의 ‘페테르부르크 노동자계급해방투쟁동맹’의 경험을 총 결산하면서 이 조직이 채택했던 수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 ‘투쟁동맹’은 1895~1896년에 설립됐을 뿐이고, 그들이 노동자들에게 호소한 수단은 오프셋 인쇄와 석판 인쇄 기술을 사용한 유인물뿐이었다. 그러나 만약 이 조직이 최소한 몇 개의 러시아 노동자운동의 가장 큰 중심지를 포괄하였다고 한다면.......혁명적 기관지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면, 러시아 노동자들 사이에서 ‘투쟁동맹’처럼 페테르부르크 노동자들 사이에서 그런 위상을 누리고 있었다면, 그렇다면 이 조직은 현재 러시아 최대의 정치적 요소가 되었을 것”11)이다.

여기서 레닌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유인물의 인쇄와 살포는 노동자들의 정치적 자각과 노동자들의 단합을 촉진시켰으며, 이것은 유인물이 갖는 ‘집단적 선전자’와 ‘집단적 조직가’로서의 역할이었던 것이다. 사회주의 신문의 역사를 연구했던 옛 소련의 한 학자는, ‘페테르부르크투쟁동맹’이 발간한 당국의 검열을 거치지 않은 유인물은 그 본질에 있어‘노동자신문의 초기 형태’라는 주장을 하였다.12) 우리는 여기서 노동자언론이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간단한 형식에서 복잡한 형식으로 발전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레닌은 [사회민주당원]을 지도하는 활동 이외에도, 다른 중요한 이론 작업을 했다. 1915년 여름 [공산당원] 잡지에 장편 논문 <제2인터내셔널의 파산>을 발표하였으며, 지노비에프와 함께 <사회주의와 전쟁>이라는 책을 준비했다. 1915년 말부터 1916년 7월까지 그는 유명한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최고단계>(일명 ‘제국주의론’)라는 저서를 썼다. 그리고 1916년 가을과 1917년 초, 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변증법’에 관한 문제 등 이론 작업에 모든 정력을 기울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반기의 레닌의 삶에 대해 크루프스카야는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일리치(레닌의 본명-주)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쓴 것처럼 매우 ‘조용’ 하였다. 우리와 현지 교민들과의 왕래는 많지 않았으며, 도서관에서 매일 연구에 몰두하였다.”13)

레닌의 이 같은 이론작업은 말할 것도 없이 곧이어 다가올 거대한 혁명에 대한 조용한 준비 작업이었다. (계속)


[본문 주석]

1) [소련] 보에니 보노마료프 주필: 《소련공산당역사》, 인민출판사 1960년판, p194.

2)  “슬레프리코프에게 보낸 서신(1914년 10월 17일)”, 《레닌전집》 제47권, 인민출판사 1990년판, p16. 

3) 위의 책,p16.

4) 《레닌전집》 제26권, 인민출판사 1988년판, p177.

5) 《레닌전집》 제27권, 인민출판사 1990년판, p302.

6) 크루프스카야,《레닌의 추억》,인민출판사 1960년판, p283.《공산당원》은 레닌이 주도한 잡지로, [사회민주당원] 편집부가 1915년 제네바에서 출판하였는데 단지 1호만 발간되었다.

7) 위의 책,p260.

8) 《레닌전집》 제26권, 인민출판사 1988년판, p344.

9) [소련] 보에니 보노마료프 주필: 《소련공산당역사》, 인민출판사 1960년판, p199.

10) 위의 책, p201.

11) [소련] 보에니 보노마료프 주필: 《소련공산당역사》, 인민출판사 1960년판, p201.

12) [소련] 발레츠키 등 공저:《레닌은 어떻게 신문을 만들었나?》,신화출판사 1983 년판, pp.136—137.

13) 크루프스카야: 《레닌의 추억》,인민출판사 1960년판, p2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