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를 떠나는 날
조헌정 쿠바여행기(10)
손님은 왕인가?
떠나기 전날 민박 주인에게 택시를 부탁했다. 아는 택시 운전수에게 전화를 걸어 예약을 했다. 올 때는 25불(내가 만난 멕시코 친구는 40불)을 지불했는데, 갈 때는 20불이라고 한다. 어제 떠난 친구는 15불에 택시를 예약했다고 한다. 나도 한번 시도를 해보았는데, 내가 떠나는 시간은 출근 시간이라 그 가격에 가능하지 않았다. 그 친구는 새벽에 떠나기에 가능했다.
운전수는 1957년형 폰티악 차를 끌고 왔다. 나이는 거의 70세에 가까운 인상이 무척 좋은 백인이었다. 한 40분 운전을 한 끝에 아바나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예약 티켓에 4시간 전에 도착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그런데 아무리 화면을 보아도 내가 타야 할 아메리칸에어라인은 보이지 않는다. 안내에게 물으니 마이에미로 떠나는 아메리칸 에어라인은 국제항공 터미날 3이 아닌 국내항공 전용인 터미날 2라고 한다. 내 티켓에는 터미날2라고 되어 있었지만, 도착한 공항터미날에는 국제공항이라는 팻말은 있었지만, 3이라는 표시가 없었다. 당연히 국제공항이거니 생각했다.
안내는 말하기를 밖에 나가서 택시를 타라고 한다. 3킬로정도 떨어져 있다고 한다. 택시비는 얼마냐고 하니까 10달러 이상은 지불하지 말라고 한다. 날은 무덥고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고 스패니쉬는 할 줄 모르니 당연히 택시를 타는게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가진 돈도 막바지였고(달랑 출국세 25불만 있었다.) 시간은 넉넉하고 남이 다 하는 것은 별로 따라 하지 않는 성격이니 3킬로 정도는 트레킹 삼아 걸어가기로 했다. 20킬로 가까이 되는 배낭 두 개를 짊어지고 따가운 태양 볕 아래, 인도 길이 없는 차길 옆길을 따라 손가락으로 지시해 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한 10분을 걸으니 땀이 나고 후덥지근하여 택시를 탈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약간 들기도 했지만, 내친 걸음이니 그냥 걸어갔다. 걷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찻길이 갈라지는 곳에서 보니 왼쪽으로 국내공항 표시가 있었다. 그래 그쪽 방향으로 대로변을 따라 10분을 걸어갔다. 가다 보니 샛길이 보이는 것 같아 그쪽으로 걸어가려고 하자 어느새 내 뒤를 따라 걸어오던 어떤 사람이 영어로 어디고 가느냐고 묻는다. 보니 항공사 제복을 입었다.
터미날 2로 간다고 했더니 반대 방향이란다. 갑자기 황당했다. 순전히 착각 속에 걸어온 것이다. 혹 인생에도 이런 일이 생기면 어떡하나? 아까 갈라지는 곳에서 오른편으로 갔어야 했다. 돌아서서 다시 10분을 걸어갔다. 차들이 몇 대 쌩쌩 지나간다. 갑자기 빵빵 소리가 들린다. 건너편 길에 운전수가 차를 세우고 나에게 신호를 보낸다. 길을 건너 가까이 가보니 아까와 같은 항공사 제복을 입은 친구였다.
터미날 2로 간다고 하니까 타라고 한다. 참 이렇게 친절한 쿠바인도 있구나. 쿠바의 마지막 인상을 좋게 남기려는 쿠바 수호신이 보낸 천사였다.
수속은 때로 지루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수속을 모두 끝내고 나니 두 시간이나 남아 있다. 그러면서 생각한 게 하나 있다. 나는 그동안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손님은 왕이다라는 관념에 젖어 있었다. 그런데 쿠바에 오니 가게 주인들이 자기 할 일 다 마치고 나서 물건을 팔지 내 뜻대로 빨리빨리 움직이지를 않았다. 기다리는 사람들 또한 이를 당연히 여겼다. 난 너무 돈을 쥐고 있는 손님 왕이라는 자본주의 관념에 깊게 젖어 있었다.
사람이 먼저라는 사회주의에서 왕은 물건을 파는 가게의 주인에게 맞는 말이지 손님이 왕일 수는 없다. 그건 돈이 주인이라는 노예의식의 산물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