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나대학에서 만난 부부사기단

조헌정 쿠바여행기(7)

2020-10-04     조헌정 언론협동조합담쟁이 이사장
▲ 민박집 건물 [사진 : 조헌정]

떠나기 전날 유명한 아이스크림 가게를 가기 전에 아바나대학을 방문했다. 그 전날 민박집에 세 명의 여자가 함께 왔었는데, 그중 한 명이 ‘미국 버클리 생물학과 부교수로 볼리비아 태생인데, 이곳 아바나대학에 한 주간 특별강좌를 인도하기 위해 왔다’고 하면서 자기가 들었는데, 대학 교정이 아름답다는 말을 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학생들의 얼굴에 비친 혁명의 기운은 어떠한지 알아볼 겸 수십 계단을 올라 교정을 들어섰다. 입구에서 사진을 한 두 장 찍고 걸어가는데, 남녀 한 쌍이 다가와 스패니쉬로 말을 건다. 내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자, 영어로 ‘저기에서 오늘 국제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어 특별강좌가 있어 거기를 가는 중’이라고 한다. 갑자기 영어가 들리니 대화를 좀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반가운 마음이 번쩍 든다.

아바나대학 역사학과 학생이라고 하면서 옆에 있는 자기 부인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학생치고는 나이가 조금 들어 박사과정에 있나 생각했다. 

그러면서 옆에 있는 건물을 가리키면서 ‘피델이 1959년 혁명을 일으키고 학생들과 함께 토론을 했던 건물’이라며 앞장을 선다. 뭐라고 답할 사이도 없이 따라갔다. 게시판에 붙여진 피델과 관련한 몇 개의 사진을 가리킨다. 혁명복을 입고 십여 명이 둘러앉아 있는 작은 사진이 있어 ‘체게바라도 여기에 있느냐’고 했더니 중앙에 한 사람을 가리킨다. 사진이 너무 작아 얼굴로는 구별이 안될 듯 싶은데, 한 사람을 지적하기에 역사학과 학생이라 다르기는 다르구나 감탄을 했다. 혁명이 이론으로는 옳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어려움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계속 혁명(레볼루찌온)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역시 역사학과 학생답게 주체성이 있구나 속으로 칭찬했다.

건물 주위의 몇 개의 오래된 얼굴 동상이 있는데, 그들을 한 명 한 명 언급하면서 저들이 이 학교에 기여한 일들을 얘기한다. 그때마다 아내 또한 한두 마디의 짧은 영어로 거든다. 아직 반대편에 보지 않은 학교 건물들이 더 있는데, 우리는 후문 앞에 서 있었다. 그래서 고맙다고 얘기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저기 조금만 가면 ‘피델 카스트로가 살던 집이 있는데, 가보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그가 살던 곳은 차를 타고 가야 하는 곳으로 알고 있었는데, 조금 걸어 가면 된다니 이거 웬 떡이냐 하며 따라나섰다. 조금 걸어가더니 찻집과 연결된 꽤 괜찮게 보이는 집을 가리키면서 저기 2층에서 살았단다. 그래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안으로 들어가더니 몇 개의 벽에 붙은 사진을 설명하면서 또 혁명을 얘기한다. 백인과 흑인 농부가 함께 앉아 있는 장면을 보여주면서 이것이 혁명의 결과란다. 그러면서 집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찻집에서 얘기를 계속한다.  그런데 둘러보니 이 찻집 한복판에는 피델의 사진은 없고 작년 9월 방문한 프란체스코 교황의 사진이 붙어 있다. 

대여섯 개의 테이블 중 창가에 놓인 한 테이블을 가리키면서 이 테이블에 바로 피델이 앉았고 저 창문에 학생들이 서 있었단다. 그러면서 자기가 먼저 자리에 앉더니 나보고 앉으란다. 앉았더니 음료수를 시킨다. 그동안 이 친구에게 어떻게 답례를 해야 하나 계속 고민을 하고 있었다. 학생으로 외국인에게 자발적으로 봉사하는 일이었지만, 가난한 학생이니 뭔가 도움을 주고 가는 것이 예의였다. 그렇다고 몇 불을 주기도 뭐해 고민 중이었다. 그래 음료수 한잔 사주는 것으로 대신하면 되겠다 싶어 잘 됐다 싶었다. 그러더니 15년째 들고 다니는 작은 디지탈 사진기를 보더니 거기에 한국 사진이 있느냐고 물어 몇 년 전 제주도 강정에서 찍은 사진 몇 개를 보여주면서 나름 열심히 설명을 하였다. 그런데 그는 자주 쿠바의 삶의 어려운 점을 얘기한다. 

나보고 뭘 하느냐고 하길래, 목사라고 했다. 차가 있느냐? 집이 있느냐? 하길래 교회가 제공하는 사택에 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여러 얘기를 한다. 북조선 얘기도 한다. 역사 시간에 배웠다고. 

그러더니 여기 들어올 때 한국 돈으로 환전했느냐고 묻는다. 아니다. 한국 돈을 미국 달러로 그리고 다시 쿠바 달러로 환전했다고 말하자 갑자기 달러가 있느냐고 한다. 어 이것 봐라? 웬 갑자기 달러 얘기? 아 나 달러 없다. 지금 나는 쿠바에 이 주간 이상 머물고 있는데,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물가가 너무 비싸 돈이 다 떨어졌다. 

그는 약간 실망한 빛을 보이더니 선물은 샀냐고 해서 못 샀다고 했다. 그러자 럼은 뭐가 좋고 커피는 무슨 브랜드가 좋단다. 그러면서 상표 이름을 종이에 적는다. 나중에 혹 사더라도 그 상표를 사라고 하는 줄 알았다. 그러자 그는 덧붙이기를 대학 구내매점에서 이것을 파는데,  시중 값의 절반이란다. 그러면서 학생증이 있느냐고 묻는다. 한국에서 온 여행객에게 웬 학생증? 그리고 웬 대학 구내매점에서 술을? 그때 눈치를 완전히 챘어야 했다. 물론 반쯤은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체 게바라의 얼굴이 새겨진 3페소짜리 동전을 주더니 나보고 가지라고 하면서 자기가 학생증이 있으니 커피를 대신 사주겠다고 벌떡 일어난다. 뭐라고 말릴 사이도 없었다.

주문한 콜라를 마시면서 조금 기다렸더니 두 개의 조그마한 커피 봉지를 가져왔는데, 얼마나 싸구려인지 커피봉지가 터져 조금씩 새고 있었다. 10불이라고 한다. 나도 돌아갈 때 커피를 좀 사가지고 갈까 하여 이미 상점에서 봐 둔 물건이 있었다. 이보다 더 크고 훨씬 튼튼한 팩에 든 커피도 1불 50전이 안 되었다. 이건 순전히 바가지였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미 신세를 졌는데 어쩔 수 없이 10달러를 줬다. 기분이 상해 음료값이나 내고 헤어지려고 종업원에게 얼마냐고 했더니 말로 답해도 될 것을 부러 계산서를 가져온다. 콜라 석 잔에 12달러였다. 한 잔에 4달러였다. 이보다 더 큰 잔에 맛있는 맥주 값이 3불인데, 기껏해야 1불이면 될 것을, 4불 바가지를 또 씌운다. 종업원 이것들까지 다 한 패구나, 갑자기 열이 올랐다. 그러나 싸울 수는 없었다. 저쪽에는 아까부터 나를 계속 주시하고 있는 떡대같은 남성 종업원 두 명이 앉아 있었다. 

스페인말도 못하는 동양인 노인네 혼자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경찰을 부를 수도 없었다. 화가 치밀어 돈을 주면서 일어섰다, 그러면서 목사로서는 쓸 단어가 아니었지만, 영어로 '쿠바 혁명 엿 먹어라' 하며 가게를 나섰다. 그놈들을 향해 '지옥에나 가라' 한 마디 더할 것을 못내 아쉬워하면서 ㅠㅠ. 물론 서울 강남 찻집에 갔다면 이보다 돈은 더 들겠지만. 쿠바 부부 사기단에 걸려든 셈이었다. 물론 따지면 이만 원 쓴거니까 사기당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힘들지만. 

하얀 수염 때문인지 아니면 나이 때문인지 외국 여행을 혼자 다니다 보면 소매치기들의 표적이 자주 된다. 그래서 주머니에는 돈이나 카드를 넣고 다니지 않는다. 이번 여행에도 만일을 위해 비상용 호르라기도 가지고 왔고, 호신용으로 끝에 쇠가 달린 등산용 스틱도 하나 가져왔다. 그러나 거리를 다니다 보니 그럴 필요를 전연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쿠바의 모든 가게와 집들은 창문마다 철장을 다 했다. 좀도둑이 많다는 증거이다. 민박집 도착한 날 주인이 당부한다. 주머니에 돈이나 패스포드를 갖고 다니지 말고 집이 안전하니 놓고 다니라고, 그러면서 목에 거는 작은 가방도 등 뒤가 아닌 앞으로 매고 다니라며 손수 시범까지 보여준 바 있다.

▲ 쿠바의 차들 [사진 : 조헌정]

쿠바의 치안은 일단 좋다. 곳곳에 경찰들이 서 있고, 골목길을 다니다 보면 종종 순찰 경찰차들을 목격하곤 한다.(물론 이것이 범죄가 자주 일어난다는 반증이 되기도 하겠지만) 그러나 한밤중 골목길을 혼자 걷다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밤에 해변가에서 길가에서 술을 먹는 사람들이 많아 더욱 그렇다. 물론 가게에서는 오후 6시가 지나면 술은 팔지 않지만, 저들은 돈만 있으면 언제든지 살 수 있다.

그리고 어느 도시에나 그렇듯이 여행객을 향해 한두 푼의 적선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만나곤 한다. 웬만한 유럽 나라에 다 있다. 서울에 그런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게 신기하기도 하고 자랑스럽다. 어제저녁에도 밤늦게 숙소로 돌아오는데, 식당 일을 끝내고 아내인지 애인인지의 손을 붙잡고 앞치마를 두른 채 지나가던 친구가 말을 건다. 처음에는 일본말로, 그리곤 짧은 영어로 얼굴이 불그스레한 걸 보니 한잔을 걸쳤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한국이 야구를 잘한다고 칭찬을 한다. 그러더니 갑자기 1달러를 달라고 한다. 음료 한잔 먹게. 아내의 손을 붙잡고 가면서 모르는 외국인에게 돈 1불을 달라는 이 친구,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하나도 없다. 돈이 없다고 냉정하게 뿌리쳤다. 

그런데 아바나대학에 들렸다가 부부 사기단에게 걸린 것이다. 돈이 없어 더 이상 털릴 것도 없었고, 애당초 교정 안내에 대한 감사의 몫으로 5불 내지 10불을 그냥 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저러나 전부 해서 여유 돈이라고는 삽 십불 밖에 없는데, 무려 22불을 여기서 뜯기고 만 것이다. 세상 살면서 별의별 일 다 겪고 여행하면서 다양한 일을 겪었지만, 속으로 생각했다. '야 헌정아! 넌 아직도 멀었어. 이 순진한 목사 친구야!'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 내가 쿠바를 방문하고자 하였던 공식적인 목적, 쿠바 사람들을 돕기 위한 목적은 실천한 셈이다. 속아서 주긴 했지만 저들에게는 적어도 며칠 동안 생계에는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고 스스로 위안을 삼기로 했다. 

십오 년 전 평택 미군기지 확장 건설을 반대하는 시위에 나섰다가 내 옆에 서 있던 젊은 친구를 경찰 대여섯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끌고 가길래 내가 이를 막아서면서 특수공무집행 방해죄로 재판을 받은 바 있었다. 일심에서 벌금 300만 원, 이심에서 150만 원 그리고 대법원 확정 벌금 판결을 받은 후 이 벌금을 몸으로 때우느라 교회에는 특별휴가를 내고 서울 구치소에 십오일동안 머문 적이 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 교회로 누가 찾아왔는데, 구치소에서 나와 같은 동에 있었다고 하면서 얼마 전에 출소했는데, 폭력단에 쫓기고 있다고 하는 친구에게 속아서 약간의 돈을 준 적이 있었다.(이 친구는 제법 나름대로 교회가 관련한 치밀한 이야기를 하나 꾸며 사전 작업까지 이미 해 두었다.) 나중에 그 친구의 얘기를 반추해 보니 이 친구가 구치소에서 나를 본 게 아니라, 나와 관련한 한겨레 신문기사를 보고는 그렇게 사기를 쳤던 것이었다. 그때 사기꾼들의 수법이라고 하는 것이 나의 상상을 초월하는(요즘 일어나는 전화사기단 일들이 일어나기 훨씬 전이었다.) 것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번 경우에도 그렇다. 아바나대학 역사학과 학생이라고 쿠바 혁명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얘기하고, 마치 피델 카스트로가 그 자리에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유창한 영어로 말하니 하느님인들 속아 넘어가지 않을 수가 있었을까?

혁명의 나라 쿠바! 나는 부부 사기단과 찻집이 한 통으로 연계된 전연 새로운 방식의 혁명적 사기를 경험했다. 혁명은 계속되고 있었다. 작은 사진에서 체 게바라를 구별해내는 것은 역사학이 아니라, 사기학이라고 하는 것을 왜 몰랐을까? 지금 생각하니 피델이 살았으면 어느 정도의 기념물이 있고 소개 사진이라도 있었어야 했는데, 그가 앉으라고 한 나무 테이블이 기껏해야 1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왜 그때 나는 60년 전 피델이 앉았던 테이블이라는 그의 얘기를 믿었을까? 나는 오히려 그 순간 평양 김일성대학을 방문했을 때에 김주석이 앉았다 간 책상이라고 특별 표시를 해놓았던 기억이 떠올랐었다. 그러면서 아무런 표시도 남기지 않은 피델 카스트로의 민중적 혁명성에 내심 감탄을 했었다.

아! 그런데 이게 모두 사기였다니. 혁명은 이론으로만 존재한다는 그의 얘기를 귀담아들었어야 했는데....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