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대 총선 : 여소야대와 3당합당 국회
대한민국 총선의 역사(13)
1. 민주정부수립 실패
1987년 10월 29일 6공화국 헌법이 공포되었다. 87년 헌법은 6월항쟁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6.29선언을 통한 기만과 항쟁의 개량화를 노린 산물이기도 했다. 게다가 청산대상인 민정당과 함께 만든 헌법이었으니, 대체로 군사독재의 안전한 퇴각을 반영하는 요소들이 들어가게 되었다.
87년 헌법은 5년 단임 대통령 직선제를 도입했다. 5년 단임제안은 국민의 요구가 아니라 정략의 산물이었다. 또한 87년 헌법은 5·18민중항쟁과 6월민주항쟁의 결과였지만, 전문에 반영되지 않았다. 그리고 행정, 의회, 사법간의 견제와 균형의 강화, 국민의 기본권 강화, 군의 정치적 중립, 최저임금제 도입, 언론 자유 등의 조항들이 강화되었지만, 완전한 노동3권, 노동자의 경영참여권, 이익균점권 등 노동자 권한 확대는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야권분열로 민주정부수립에 실패한 것이었다. 1987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유권자의 36.6%의 지지를 획득한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말았다. 민주당의 김영삼 후보와 평민당의 김대중 후보는 각각 28.0%와 27.1%를 획득하여 2위와 3위에 그쳤다. 이에 따라 민주진영은 광주항쟁, 6월항쟁에도 불구하고, 군사독재세력에게 권력을 헌납하고 말았다.
5공 군부세력은 대선 마지막에 대한항공 858편 여객기 폭파사건까지 이용하여 6월항쟁의 성과를 무력화시키며,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2. 여소야대국회
1988년 4월 26일 전체 299명을 선출하는 13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었다. 6월항쟁 이후 첫 총선이 이 선거는 소선구제를 도입하여 지역구 224석, 전국구 75석을 뽑게 되어 있었다. 지역구는 40명 늘어나고, 전국구는 17명 줄었으나 제1당에 전국구 의원 절반을 배정하도록 되어 있었다. 선거에는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한겨레민주당, 민주한국당, 신한민주당, 한국국민당, 민중의 당, 제3세대당 등이 참여하였다.
선거 결과, 민정당 과반 무난이라는 예측을 깨고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소야대 정국이 초래되었다. 민정당은 지역구 87석(34.0%)에 전국구 38석을 더해 겨우 1당을 유지했지만 과반확보에 실패했다.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은 부산을 석권하고 그 외 지역을 합해 득표율은 23.8%로 2위를 차지했지만, 소선거구제 영향으로 의석에서는 지역구 40석, 전국구 13석으로 59석을 얻어 3위에 그쳤다.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은 득표율은 19.3%로 3위에 그쳤지만, 지역구 54석, 전국구 16석으로 전체 70석을 확보하여 2당에 올라섰다. 김종필의 공화당은 35석(지역구 27석, 전국구 8석)을 확보했다. 한겨레민주당은 6월항애에도 불구하고 1석에 그쳤다.
13대 총선은 완벽한 민정당의 패배였다. 야당은 득표율에서 66%로 34%인 여당에 비해 거의 두 배에 달하는 압승을 거두었고, 의석수에서도 172:125로 1.4배에 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른 바 여소야대국회가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88년 4.16총선은 향후 지역구도가 고착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선거프레임은 민주 대 반민주에서 호남 대 비호남으로 설정되어 호남고립구도를 기반으로 진행되는 지형이 형성되었다.
3. 3당합당국회
13대 국회는 야당이 주도하였다.
16년 만에 국정감사가 부활되었다. 1988년 7월 임시국회에서는 ‘헌법재판소법’, ‘안기부법’, ‘정당법’, ‘집시법’등 16개의 개혁입법이 공동 발의되고, 89년 2월 국회에서 ‘정당법’, ‘집시법’, ‘사회보호법’ 등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야당은 각종 특별위원회 설치를 주도하였다. 특히 ‘5공 비리 특위’ 9회 청문회, ‘광주 특위’ 18회 청문회가 국민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1990년 1월 22일 당시 집권당의 노태우(민정당)와, 김영삼(민주당), 김종필(신민주공화당)은 청와대 회동 직후 3당 합당을 발표하였다. 그 결과 여소야대의 4당체제가 한순간에 해체되고, 민주자유당(약칭민자당) 거대친미보수대연합 독재체제가 들어섰다.
당시 통일운동과 노동운동을 위시한 민중운동의 급진화와 중산층의 보수화 속에서 보수세력의 위기의식이 심화되고 있었다. 더 이상 군사독재로 통치할 수 없었던 친미독재세력들은 3당합당이라는 정치쿠데타를 통해서 6월항쟁이 이후 새로운 지배체제, 군사독재의 안전한 퇴각을 위한 체제를 구성해 나갔다.
3당 합당이 이후 개혁입법은 실종되었다. 국가보안법과 안기부법 개정을 포함한 악법 개폐는 모조리 폐기되었다. 그리고 공안통치가 본격화되었다. 문익환 목사, 임수경 학생의 방북을 계기로 조성된 공안정국은 경찰에게 총기를 지급할 정도로 강도 높은 공안정국을 조성하고 강경대 열사 타살로 이어졌다. 순식간에 민주화 성과가 송두리째 뿌리뽑히는 것을 저지하고자 여러 열사들이 죽음으로 맞선 것에는 유서대필 사건을 조작하고, 서강대 박홍 총장의 주사파 발언으로 공안분위기를 더욱 강화하였다. 또한 전노협 탄압, 무노동무임금강행, 파업요건 강화 노동법 개정을 시도하며, 급성장하는 노동운동에 가혹한 탄압을 가했다. 6월항쟁 2년반 만에 친미독재잔당은 민주화운동을 분리분할하고, 변절자들을 끌어들여 암흑의 반동통치의 길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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