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0년대 통선대, 통일 새세대에 말걸기

‘왕년의 통일선봉대’, 14일 통일비빔밥으로 하나되는 꿈 나눈다

2016-08-12     권미강 기자

1989년 8월15일, 금단의 선인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임수경씨가 학생의 몸으로 넘었다. 언론들은 간첩이라도 내려온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고 북한의 선전선동에 속은 어린양 대하듯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도했다.

분단 이후 남한의 대학생이 일본으로, 독일로 먼 이국의 땅을 넘어 처음으로 밟은 한반도 북녘의 땅,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 같았던 당시 상황을 지켜본 많은 학생들은 ‘통일’이 더는 금기시돼선 안 되는 문제임을 직감했을 것이다.

▲ 1989년 평양축전에 참가해 행진 중인 임수경씨[사진 출처 : 왕년의 통일선봉대 페이스북]

임씨가 ‘통일의 꽃’이 돼 금단의 선을 넘기 한 해 전인 1988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당시 의장 오영식)은 이미 통일선봉대를 조직하고, 국토순례대행진을 통해 통일만이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회복하는 길이라는 통일의 염원을 국민들에게 온몸으로 알렸다.

당시 학생운동은 5월 광주학살을 비롯한 한국의 온갖 사회문제가 한반도 남녘만의 문제가 아님을 국민들에게 알리고 또 그들의 응원을 받기도 했다. 88년 6월 전대협은 그해 서울대총학생회 선거과정에서 나온 남북학생회담 제안을 통일운동의 대중화를 위한 좋은 방안으로 생각하고, 6월10일 남북학생회담 제안일을 하루 집회가 아닌 학생은 물론 시민, 노동, 농민 등 전 국민이 참여하자는 취지를 가지고 한라산에서 서울까지 동·서군 대오를 만들어 국토순례를 계획한다.[기사 아래 붙임글 참조]

통일문제를 정부만이 아닌 국민 대중이 함께 열어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북한 동조세력이 아닌 한 민족으로서 통일을 염원하고 강대국 사이에서 분열한 나라를 지켜내자’는 젊은이로서 염원으로 통일의 길에 첫 발을 내디뎠던 통일선봉대(통선대).

통선대 활동은 당시 정부의 갖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통일’에 대한 세간의 관심을 증폭시키는 역할도 톡톡히 해내었으며 문화적으로도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통선대 이후 ‘내 나라 내 땅을 걸어서 가보자, 걸어서 품으로 느끼는 조국의 산하’ 등등의 감성을 전해주며 걷기를 통한 국토순례 열풍의 진원이 되기도 했다.

▲ 89년 전대협 집회[사진 출처 : 왕년의 통일선봉대 페이스북]
▲ 통일선봉대는 비폭력을 외치며 참가자들이 팔짱을 끼고 거리에 눕기도 했다.[사진 출처 : 왕년의 통일선봉대 페이스북]
▲ 8~90년대 학생운동은 민주화를 이끌어내는데 결정적 공헌을 했다. [사진 출처 : 왕년의 통일선봉대 페이스북]

8~90년대 20대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온 통선대의 주역들은 이제 4~50대 중년이 됐으며 우리나라 경제구조의 중추세력으로 자리잡았다. 그들에게 통선대는 젊은 시절의 추억이기도 했지만 부끄럽지 않게 살았던 자신만의 ‘훈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시대는 여전히 그들이 꿈꿨던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정치적으로도 아직 요원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의 희망을 놓지 않는 그들이 자식 같은 후배들에게 그들이 꿔왔던 ‘통일의 꿈’을 이어 전하고자 다시 뭉쳤다.

이름하여 ‘왕년의 통일선봉대.’ 전국대학민주동문회협의회, 전대협회동우회, 전대협동우회, 전대협조통위동우회, 10,28건대항쟁기념사업회(준) 등 한총련세대들이 다시 뜻을 모은 이유는 지난 20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8.15행사에서 땡볕에 전국을 돌며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고생하는 후배 통일선봉대들에게 ‘정성이 담긴 밥 한 끼를 먹이자’는 마음을 모아 만들었다. 처음에는 8~90년대 통선대 활동을 했던 10여명과 ‘통일의 길’ 회원 40여명이 모여 후원과 자원봉사를 자처하고 나서 500인분의 비빔밥을 준비했다.

‘왕년의 통일선봉대가 쏜다, 2014 통일선봉대 밥먹고 힘내라’는 선배들의 애정 어린 슬로건으로 시작한 ‘왕년의 통선대’는 99%가 직장인이며 7~9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사람들로 구성돼 있다. 

▲ 왕년의 통선대는 지난달 16일 한반도 평화통일을 염원하며 지리산에서 기원제를 지냈다. [사진 : 왕년의 통일선봉대]

지금까지 3년째 행사를 진행하고 있는 이들은 8.15대회에 맞춰 열리는 ‘통일비빔밥’ 나눔행사를 중심으로 통선대 구성원들의 화합은 물론, ‘통일’을 염원하는 다양한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또 올해 행사를 위해 온라인 동우회를 결성하고 100여명의 추진위원을 뒀다.

올해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지난달 초, ‘왕년의 통일선봉대가 간다’ 모임을 갖고 8.15행사를 준비한 이들은 지난달 16일 영호남 지역 왕년의 통일선봉대 주관으로 지리산 노고단 정상에 모여 ‘한반도 평화를 위한 지리산 기원제’를, 같은달 24일엔 제주도 한라산이 보이는 시라오름 전망대에서 4.3항쟁 원혼을 위로하고 통일을 염원하는 ‘한라산 기원제’를 각각 가졌다.

▲ 통일비빔밥을 준비하고 있는 왕년의 통일선봉대 [사진 : 왕년의 통일선봉대]

기원제를 통해 지리산과 한라산의 에너지를 모아온 이들은 오는 14일, 8.15대회 행사장인 시청광장에서 ‘선배들이 쏜다! 통일선봉대 밥먹고 힘내라!; 세 번째 행사를 연다. 8~90년대 통일운동세대와 2016통일선봉대가 함께 통일비빔밥을 나누며 선후배 화합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남과 북, 평화와 통일이 버무려지는 따뜻한 비빔밥을 위해 50명의 자원봉사단이 1000명 분의 비빔밥을 준비하고, 통선대가 입었던 티셔츠 전시와 통선대 활동사진, 통일운동 관련 자료들을 볼 수 있는 전시도 준비했다. 또 임수경씨가 평양학생축전 당시 입고 행진했던 줄무늬티셔츠도 전시된다.

아울러 이날 늦은 저녁에는 왕년의 통선대들이 번개모임을 갖고 정부 외엔 금기시됐던 ‘통일논의’를 국민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장으로 만든 통일운동세대들이 ‘지-클랩밴드와 통일노래 함께 부르기’, ‘나도 한마디’ 등을 통해 추억의 통일마당을 펼칠 예정이다. 

28년 전, 민족통일염원을 위해 국토순례길에 오르고 온 몸으로 탄압의 길을 뚫었던 왕년의 통일선봉대들은 기성세대로 분류되는 자신들의 현장에서 세대간 소통과 교류를 통해 흡수나 대결이 아닌 평화통일의 담론을 확산시키는데 또 하나의 선봉대 역할을 해나가고 있다. 

통일선봉대 역사

1988. 3.29 서울대 총학생회 선거 유세과정에서 김중기 후보가 제안한 남북한 국토종단 순례대행진과 민족단결을 위한 남북한 청년학생 체육대회에 대해 김일성종합대학이 수락하자, 6·10회담 성사를 위한 투쟁이 전개되었다. 4.16에는 ‘한반도 평화와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위한 국민대토론회’가, 4.18에는 4·19 혁명 26주년을 기념하여 고려대-수유리 구간에서 서총련 산하 서울지역 대학생 2만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올린 통일구국대장정 마라톤 대회를 가졌다.

조국통일의 열기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5.14 전국의 6개 지역 120여 대학 학생대표를 비롯한 2만여 학우들이 참가한 가운데 고려대에서 전대협 주최로 ‘6·10 남북 청년학생 실무회담 성사 및 공동올림픽 개최를 위한 범시민학생 결의대회’가 열려 6·10회담이 소수가 아니라 대다수 애국 청년학도의 의지임을 확인하였다.

이날 전대협은 ‘남한의 백만 청년학도가 북한의 청년학도에게 보내는 3차 공개서한’을 통해 반통일주의자 미국과 노태우에 대한 투쟁선언, 통일의 당위성 선언, 회담의 구체적 안건과 실무대표단 구성 및 일시 등을 백만 청년학도의 이름으로 공식 확정하였다. 그와 함께 전국 각 대학에서는 남북 학생회담 성사를 지지하는 집회가 계속 열려 통일운동의 절박성이 점차 고조되면서 학우들의 참여가 가속화됐다.

회담이 임박하면서 6·10 회담의 정당성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높아지는 반면 노태우정권이 이를 막을 명분은 점차 사라져 갔다. 전대협과 남한지역 대표단은 6.4부터 5차례의 기자회견과 긴급제안서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며 학우들의 결의수준을 높여 나갔다.

이들은 “남한당국은 국무회의 발표대로 남북 청년학생의 상호교류를 인정하고 조국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6·10 남북 학생회담에 적극적인 지지와 협력을 보내야 할 것”이라 발표하며 이를 위해 ① 6·10 회담의 정당성 인정 ② 대표단의 인정, 대표단에 대한 수배조치의 해제 ③ 회담의 원천봉쇄 철회 및 판문점으로의 자유로운 통행 보장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노태우정권은 6·10 학생회담을 원천봉쇄하겠다는 입장을 거듭 밝히는 한편 현재 준비 중인 남북학생 체육회담을 취소하면 남북한 학생간의 교류를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히는 등 정권유지 차원의 이른바 ‘창구 단일화’ 원칙만을 되풀이하는 기만적인 모습으로 일관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6.9 오후 10시 연세대에서는 ‘6·10 남북 청년학생회담 성사를 위한 백만학도 총궐기대회’가 열렸다. 회담 당일인 10일 오전 10시에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문익환 의장, 불교계 대표 지선, 진관 스님 등 각계 인사들과 전국 각지의 2만여 명의 학우들이 참가한 가운데 출정식이 열렸다. 출정식을 통해 조국통일투쟁의 의지를 다시 한번 다진 청년학생과 시민들은 김중기 단장을 선두로 판문점을 향해 교문으로 나아갔다.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하느냐, 조국통일 가로막는 미국놈들 몰아내자!”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구호를 외치며 김중기 단장과 통일선봉대를 앞세운 행렬이 교문을 통과하려 하자 경찰은 다연발 최루탄을 발사하여 행렬을 저지했다. 경찰의 폭력 저지로 행렬이 흐트러진 뒤 학우들은 예고한 대로 오후 1시 30분 서울역 주변(1만여명)과 4시 홍제동 네거리(6천여명)에서 평화시위를 벌였다.

학우들은 서로 팔짱을 낀 채 “6·10회담 성사시켜 조국통일 앞당기자”는 구호를 외치며 문산행 기차역과 불광동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학우들은 경찰이 최루탄을 쏘며 접근하면 팔에 팔을 낀 채 도로에 드러누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목이 터져라 외쳤다.

비폭력 평화시위를 벌이며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는데도 경찰은 이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며 연행, 이 날 하루에 2명의 학우가 뇌를 다치는 중상을 입었고 15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연행된 학우가 1천여명에 달해 노태우정권의 폭력성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한편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이 역사적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출정식을 갖는 도중 연세대를 출발한 남한 대표단의 이창림(부산지역 대표), 정재교(경인지역 대표) 학우는 오후 2시쯤 문산에 도착, 판문점으로 향했으나 대기 중이던 경찰에 강제연행되었다.

노태우 정권의 방해로 6·10 회담이 무산된 뒤 연세대로 돌아와 철야농성에 들어간 학우들은 다음날인 11일 1시 ‘남한 학생회담 보고 및 공동올림픽 쟁취를 위한 범국민대회’를 열었다. 학우들은 대회에서 노태우정권의 폭력적인 방해 책동을 규탄하고 ‘정당·사회단체에 보내는 촉구문’을 통해 6월 18일 고려대에서 제2차 남북 학생회담 성사, 공동올림픽 성사, 정당·사회단체·학생의 통일문제 협의기구 구성에 관해 공개토론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6.18 전대협은 고려대에서 사회운동단체와 종교계, 평민당을 초청한 가운데 ‘조국통일을 위한 범국민 대토론회’를 개최했다. 이 날 2천 5백여명의 시민과 학우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집회에서 김중기 대표단장은 토론을 통해 노정권의 반통일적 정책을 규탄하고 8월 4일부터 15일까지 계획된 국토순례대행진을 예정대로 진행시키겠다고 밝혔다.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전대협>(돌베개, 1991, 61~65쪽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