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보호조약≫의 강요, 대한제국의 폐절

조선에서 본 일본의 역사(7)

2019-12-30     강성은 조선대학교 조선문제연구쎈터장

1. ≪보호조약≫의 강요

1905년 9월의 포츠마스강화조약은 제2조에서 ≪러시아제국정부는…일본제국정부가 한국에서 필요로 인정되는 보호 및 감리 조치를 취함에 있어서 이를 저해하거나 간섭하지 않음을 약속한다≫고 규정하여 러일전쟁의 결과 일본은 조선을 보호국으로서 지배하게 된다. 이를 조선에 인정시키려고 한 것이 동년 11월에 강요한 ≪한국보호조약≫이었다(조약조인서에 정식명칭이 기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제2차 일한협약≫, 조선에서는 ≪을사5조약≫,또는 ≪을사늑약≫이라고 일반적으로 부르고있다). 이 조약의 제1조는 ≪일본국정부는 도꾜에 있는 외무성을 경유하여 금후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지휘≫한다고 하여 한국정부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도꾜에 있는 대일본제국의 외무성이 이를 취급한다고 규정하였다. 보호조약이란 외교권의 박탈을 의미하였다.

▲ ≪한국보호조약≫조인서(정식명칭이 기입안되고있다)[사진 : 필자 제공]

그런데 일본에 의한 한국≪병합≫은 쌍방의 ≪합의≫에 기초하여 ≪평화적≫으로 실시되었고 유미렬강에 의한 식민지와는 다르다고 하는 것이 당시부터 일관된 일본측의 주장이었다. 지금도 그러한 의논을 하는 사람이 그치지 않는다. 사실 1910년의 ≪병합조약≫의 시점에서 이제 공공연한 반대를 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지고 있었다. 그러나 식민지화의 출발점이 된 ≪보호조약≫의 체결과 그 후의 과정을 보면 그러한 의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명백하다.

한국정부에 ≪보호조약≫의 체결을 강요하기 위하여 메이지천황의 칙사를 스스로 맡은 자가 이또 히로부미(伊藤博文)였다. 당대 제일의 실력자인 이또가 스스로 나간 것은 조선지배가 일본에 있어서 중대한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러일전쟁 후에도 계속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대포를 쏘는 속에 1905년 11월 9일 서울에 도착한 이또는 15일의 회담에서 고종황제에게 조약안을 들이대고 ≪본안은 제국정부가 여러 가지 고려를 하여 이제 어떠한 변통의 여지가 없는 확정안이고(중략) 오늘의 요는 다만 폐하의 결심만이 있다. 이를 승낙하겠는가, 또 혹은 거절한다고 하여도 방자하지만 제국정부는 이미 결심한 바이니 그 결과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아마 귀국의 지위는 이 조약을 체결하는 것보다 곤난한 경우에 빠지고 더욱 이익하지 못하는 결과를 각오하여야 한다≫고 동갈(* 을러대며 위협함, 편집자 주)하였다.

▲ 조약무효를 호소하는 영국황제앞으로의 고종황제의 친서[사진 : 필자 제공]

17일 오전 일본공사관에 정부대신들을 소집하고 조약의 조인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은 용이하게 응하지 않았다. 즉결을 서두른 일본은 그날 오후에 왕궁내에서 어전회의를 강행하였다. 일본공사관에서 왕궁으로 가는 도중에 도망하는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호위라는 명목으로 일본헌병을 사전에 수배하였다. 고종이 입석한 어전회의에서도 역시 거절을 결정하였다. 대기하고있었던 하야시 곤스께(林權助) 일본공사는 어전회의가 마치고 귀가하려는 대신들을 별실로 감금하고 이어 이또 히로부미, 하세가와 요시미찌(長谷川好道) 한국주차군 사령관, 고야마(小山)조선헌병대 대장이 뛰어들어와 이또가 대신 한사람, 한사람에게 찬부를 물어 과반수가 찬성했다고 하여 조인을 강행하였다. 도대체 아무런 권한이 없는 이또가 타국의 대신들을 감금하는 상태 속에서 ≪각의≫라고 칭하고 사회를 하는 것 자체가 비정상이고 대신들은 최후까지 반대의 입장을 지켰다. 조약조인의 한국측 책임자였던 외부대신 박제순은 나라를 팔아먹은 5명의 대신 ≪5적≫중에서도 가장 평판이 나쁜 인물이지만 이 장면을 자세히 쓴 이또의 공식보고서 ≪견한대사 이또 히로부미 봉사일기≫에서는 이렇게 나와 있다.

“외부대신 박제순 : 본 조약안에 대하여 단연 동의하지 못하며 이를 외교담판으로서 본 대신에게 그 교섭을 하여 타협하는 것은 도저히 못하겠으나 혹시 명령이면 할 수 없다.
이또 : 그 명령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폐하의 명령이라면 이에 복종하고 조인한다고 하는 의견으로 해석해도 좋은가
박외무대신 : ......(침묵)
이또 : 그러면 귀 대신은 절대적으로 본 협약안에 반대한다고 볼수 없다.“

고 기록되고 있다.

박제순은 결코 찬성한 것이 아니라 혹시 황제의 명령이 있더라도 반대하는가고 한 이또의 힐문에도 ≪침묵≫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절대 반대가 아니라고 하여 ≪찬성≫의 부류에 들어간 것이다. 다른 ≪찬성자≫도 거의 같았고 잘 읽어보면 찬성자는 이완용 혼자였다고 할 수 있다.

조인서에 찍는 외부대신의 직인(職印) ≪외부대신지장(外部大臣之章≫도 빼앗겼다. 일본공사관의 마에마 교사꾸(前間恭作)와 누마노 야스따로(沼野安太郞)가 일본군과 함께 외부대신관저에 가서 외부고문 스티븐스으로부터 직인을 받아 왕궁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고꾸부 쇼따로(國分象太郞)에게 넘겼다. 이리하여 18일 오전 1시 30분 ≪한국보호조약≫이 강제조인되었다.

▲1907년 헤그밀사(왼쪽으로부터 리준,리상설,리위종)[사진 : 필자 제공]

2. 조약의 무효성

냉전종결 후 일본의 전후보상을 요구하는 운동이 국제적으로 전개되는 속에서 ≪한국병합≫에 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연구에서는 실질적으로 식민지로 된 ≪한국보호조약≫ 조인에 관한 사실규명과 법적효력에 대하여 논해지고 거의 ≪부당・불법론≫과 ≪부당・합법론≫으로 갈라졌다. 그러나 논쟁에 대한 일본학계의 반응은 일반적으로 방관자적인 경향에 있었다. 그 최대 이유는 당시의 국제법은 ≪강자의 법≫이기 때문에 법적효력에 관한 의논은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것이나 정치와의 긴장관계를 담보하자는 자세가 결락(* 있어야 할 부분이 빠져서 떨어져 나감, 편집자 주)한 학계의 아카데미즘의 학풍과도 관련되고 있었다. 그들은 똑같이 역사인식과 법적논의는 별개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역사인식과 법적인식이 동일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만 양자의 대화를 통하여 서로 접근하거나, 동일하게 될 경우도 있다. 우선 사실규명이 선결이고 그 사실을 당시의 법이념에 비추어 심판하는 것이다.

1) 각 계층 조선인의 구조약 무효화투쟁의 논리

조선에서는 각 계층의 사람들이 구조약의 무효화투쟁을 연면히(* 혈통, 역사, 산맥 따위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잇닿아 있게, 편집자 주) 전개하였다. 그들은 당시의 국제법에 비추어 자기의 무효화투쟁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당시는 제국주의의 시대이고 국제법은 서유럽제국간의 협조외교의 수단으로서, 특히 제국주의열강에서는 비유럽제국에 대한 침략의 도구로서 기능하고 있었는데 왜 조선에서는 ≪강자의 법≫인 국제관습법을 조약무효의 근거로서 원용하였는가, 그것은 조선에서의 만국공법의 수용과 실천에 있어서 일본과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 관련된다.
조선에서의 국제법의 수용은 실정(實定法)법적인 측면보다도 규범적・자연법적인 측면을 보다 많이 수용하였다. 그것은 유교적 가치관에 비추어서 실정법을 이해하였다는 것도 있었으나 조선을 둘러싼 국제관계의 현실속에서 국제법의 기만성(≪승냥이의 법≫)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국제법의 법리(≪양(羊)의 법≫)에 기대를 걸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의 국제법의 이해의 방식은 당시의 피압박민족의 입장으로부터 보는 국제법 이해와 연결되고 있고 근대로부터 현대에 걸치는 국제법의 발전이란 식민지지배의 변용과 함께 ≪양의 법≫이라는 법이념의 측면이 점차 확대해나가는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2) ≪한국보호조약≫ 무효의 학설

일본에 의한 ≪한국보호국≫화는 식민지지배의 세계사에서 19세기의 폭력적인 식민지지배의 최후의 시대, 동시에 식민지지배의 새로운 단계-일방에서는 ≪보호국≫, ≪병합≫, ≪자치령≫이라는 ≪세련≫된 식민지지배에로의 세계사적인 전환, 타방에서는 극단한 동화주의, 인종주의에 의한 새로운 폭력체제의 출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보호국≫이 당시의 식민지지배체제의 최신의 레벨이었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이 시기는 유미의 국제법에서도 법의 규범성을 둘러싸고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난다. 1899년・1907년 헤그평화회의의 전쟁법규나 국가대표자에 대한 강제조약은 무효로 한 관습법은 그것을 단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이 원칙에 의거하여 ≪한국보호조약≫의 무효를 주장한 학설로서 프랑스의 국제법학자 프랑시스・레이 논문(1906년), 같은 프랑스의 페랑자겥 논문(10년)이 있다. 레이 논문이 후의 하바드 보고서(35년)나 월더크 보고서(63년) 등 조약관련법제화에 계승된 것도 이 학설의 신뢰도가 높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제적인 국제법학계에서는 국가대표자에 대한 강제의 예로서 ≪한국보호조약≫을 널리 소개한 것은 전통적 국제법(근대국제법)의 시대로부터 현대 국제법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국제법학자들 사이에서 동조약의 무효가 통설로 되고 있었다는 것의 반영이었다.

3) ≪식민지책임≫, ≪식민지범죄≫

식민지지배에 의한 피해를 배상한다는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법개념에서는 생각하지 못했다. 2차 대전 후의 국제군사재판에서는 종래의 ≪전쟁범죄≫ 이외에 ≪평화에 대한 죄≫, ≪인도에 대한 죄≫를 포함한 새로운 전쟁범죄개념을 재판소 조례에 포함시켜 개인의 책임을 주구(* 재물을 강제로 빼앗다, 편집자 주)하였다. 그러나 ≪인도에 대한 죄≫의 개념이 나찌스범죄, 특히 유태인의 희생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낸 소위인지 일본의 전쟁범죄를 재판한 도꾜재판에서는 그것은 실제 거의 적용되지 않았다. 더구나 식민지를 영유하는 전쟁제국이 자국의 식민지지배의 역사에 이 개념을 적용한다는 것은 문제 밖에 있었다. ≪인도에 대한 죄≫의 개념이 그 성립과정에서 얼마나 식민지주의적인 작용이 있었는가 하는 것을 이는 잘 보여준다.

이러한 역사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교전국간의 관계에 한정되지 않는 ≪인도에 대한 죄≫개념의 성립은 그때까지 국가간의 관계로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국제법상의 ≪전쟁≫으로 보지 않았던 ≪식민지전쟁≫이나 식민지지배하의 ≪평시≫에서 생긴 여러 폭력을 종래의 ≪합법성≫의 틀에서 끌어내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식민지책임≫・≪식민지범죄≫론이라는 새로운 의논의 틀거리가 생기고 식민지화, 또는 식민지체제하에서 일어난 대규모폭력, 식민지주의를 비판하는 개념으로서 ≪전쟁책임≫・≪전쟁범죄≫론에 있어서 심화발전시켜온 ≪인도에 대한 죄≫, ≪제노사이드의 죄≫라는 법개념이 원용되고 있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책임・식민지범죄는 식민지화.식민지지배, 계속되는 식민지주의라는 일련의 과정을 시야에 놓은 유형으로 구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4) 도의적 책임과 법적 책임

현재 일본의 학계에서 과거의 청산문제에 대하여 법적인 차원보다 도의적인 차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보인다. 과연 ≪법≫에 관한 의논을 비켜가는 것이 대립의 해결책으로 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지 아니할 수 없다. 피해자측의 책임추구에 대하여 일본정부는 ≪합법≫이라는 좁은 주장을 의연히 되풀이하고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아시아여성기금이나 강제연행피해자의 소송도 바로 ≪법≫의 대립이 눌러 앉아있다. 식민지주의・식민지지배의 청산이라는 근본적인 과제의 해결이 저애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를 둘러싼 대립이 ≪법≫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일본정부가 ≪법적으로 유효≫라는 태도를 고집하는 것은 법률론이라기보다 정치적 이유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

구식민지 종주국은 식민지지배의 ≪법적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도의적 책임≫이라는 레트릭을 빈번히 사용해왔다. 이러한 레트릭은 ≪도의≫라는 말의 본래의 의미를 부정하는 의도적인 오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본래의 ≪법≫의 상위개념으로서의 ≪도의≫의 인식에 기초하여 새로운 입법이 이루어지고 ≪도의적 책임≫이 새로운 ≪법적 책임≫을 낳는데 이어간다고 생각한다. 식민지지배 일반을 불법으로 선언하는 새로운 법적틀의 구축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으나 ≪인도에 대한 죄≫를 적용하는 것으로 식민지지배・식민지범죄의 법적 책임은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도이췰란드 나찌스범죄를 재판한 ≪인도에 대한 죄≫는 사후법(事後法)으로 생겨난 것처럼 정치적 결심만 있으면 사후법으로 식민지책임・식민지범죄를 처벌하는 새로운 입법은 가능할 것이다.

내년에는 ≪한국보호조약≫ 강제조인 115주년, ≪한국병합조약≫ 강제조인 110주년을 맞는다. 오늘 식민지책임・식민지범죄를 추구하는 운동은 더반회의(반인종주의・차별철폐세계회의)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세계적인 조류로 되어가고 있다. 조선과 일본과의 관계의 경우 식민지지배의 부당성을 ≪도의≫의 레벨에 그치지 않고 식민지화, 식민지지배, 계속하는 식민지주의라는 일련의 과정을 시야에 넣은 식민지책임・식민지범죄의 법개념으로서 정립하는 것이 요구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 

<필자 강성은 조선문제연구센터장 약력>

1950년 일본 오사까에서 2세로 태여남
1973년 조선대학교 졸업
그후 조선대학교에서 교원을 함.조선대학교 력사지리학부 학부장,도서관장,부학장을 력임,2017년 정년퇴직,현재 조선대학교 조선문제연구쎈터 쎈터장으로 있음

전공은 조선근대사

주요 저서
『一九〇五年韓国保護条約と植民地支配責任―歴史学と国際法学との対話』創史社、2005年刊、2刷2010年。2008년에 선인에서 번역본이 출판(한철호역) <1905년 한국보호조약과 식민지지배책임-력사학과 국제법학의 대화>

『朝鮮の歴史から「民族」を考える―東アジアの視点から』<明石ライブラリー139>、明石書店、2010年刊、2刷2016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