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종렬, 난파선을 다시…

故 오종렬 선생 생애(3)

2019-12-13     현장언론 민플러스
민중과 함께, 자주민주통일의 지도자 故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총회의장의 생애를 몇 편에 나눠 싣는다. 세 번째 이야기다. [편집자]

1999년, 난파선을 다시 세우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상임의장

1997년 9월 홍성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하고 몇 개월 지나지 않아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일부 지역에서 해산을 진행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전국연합의 해산은 북의 고난의 행군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고난의 행군 시기 북에 대한 많은 전문가들은 북이 조만간 소련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고 했다. 대중적으로 통일의 열기도 시들 해지고 있었으며 자민통 운동 내부도 극심한 사상적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당시 한충목 집행위원장과 인천연합, 울산연합, 광주전남연합 동지 등이 오종렬을 찾아가 전국연합 의장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한다.

▲ 1999년 2월, 전국연합 출범식에서 노수희 의장과 함께.

오종렬은 변혁운동의 주체는 통일전선체이기 때문에 전선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한다는 신념이 확고했다.

1998년에는 하반기부터 제주, 경남, 전북 등 지역연합이 해산을 시작하며 위기를 겪게 되는데 결국 1999년 오종렬은 전국연합 의장직을 수락하게 된다. 이에 난파선이 된 전국연합의 선장으로서 동국대에서 열린 8기 전국연합 대의원대회 의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자료도 없이 그 포효하는 듯 쩌렁쩌렁한 음성으로 일장 취임연설을 펼쳤다고 한다.

잠시 소개한다.

용사들이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타고 있습니다!

진용을 갖추었습니다. 말은 달리자고 굽이쳐 굽을 내딛고 있습니다. 용사들은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타고 있습니다.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조국의 미래를 위해서, 여러분들이 물려줄 자식들의 세상을 위해서 이제 다시금 떨쳐 일어섰습니다. 여러분들은 더 이상 장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모습,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주민주통일의 한길에 서 있습니다.
작은 것을 서로 나눕시다. 큰 것으로 하나 됩시다. 우리의 이상이, 우리의 큰 뜻이 한결같을진대 작은 다름이 어찌 큰 문제이겠습니까.

특히 청년학생 여러분!
우리의 미래는 여러분들에게 달려있습니다.
청년학생 여러분! 우리 조국의 미래는 여러분들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대들의 가슴이 크게 열릴 때, 그대들의 눈물이 그대들의 웃음이 함박꽃처럼 피어날 때 그 속에 조국의 운명이 달려있습니다. 간혹 방법에 있어서, 간혹 순서와 절차에 있어서 서로 다른 점이 약간 있다 하더라도 그대들의 통 큰 의지, 그대들의 통 큰 결의가 모든 것을 날려버리고 한길로 가리라고 굳게 믿습니다.
그대들을 믿습니다. 그대들이 있어서 우리가 있습니다. 다시금 이르노니 청년학생들이여! 더욱 아름다워라. 청년학생들이여! 더욱 겸손하여라. 청년학생들이여! 더욱 예절 바라라. 청년학생들이여! 조국을 구하는 그 애국의 대오로 더욱 든든하게, 더욱 결의차게, 더욱 당차게 앞서 나가라. 거듭 부탁드리겠습니다. 청년학생들이여.

자식을 가슴에 묻고 포한의 세월을 살아가시는 어머니 아버지.
어머니 아버지를 봬올 때 우리는 항상 죄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민족민주열사를 우리는 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민족민주열사는 우리를 대신해서 저세상으로 먼저 가셨습니다. 그분네들의 타오르던 시선, 그것이 바로 우리 자주민주통일 해방된 세상이올시다.
우리는 그 짐을 그 빚을 갚기 위해서, 어머니 아버지들의 눈물을 닦아드리기 위해서 이 한길을 함께 가고자 합니다.
기꺼운 마음으로, 사랑해주시는 마음으로 저희들 등을 쓰다듬어 주시고, 또 등을 밀어주시기 바랍니다. 어머니 아버님들 힘내겠습니다.

우리를 1만 년 동안 먹여 살려오신 농민 여러분.
여러분들이 있어서 우리는 1만 년 동안 사람으로서, 사람의 종자로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땅을 파먹고, 여러분들이 그 땅을 파먹고 흘린 젖줄에 의해서 우리는 1만 년 동안 사람의 자식으로 이렇게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농민, 농업, 농촌이 궤멸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죽어갈 때, 이 나라 이 땅 미래의 농사가 죽어갈 때, 농촌이 죽어갈 때 여러분들이 죽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고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합니다. 우리 함께 우리의 대동세상, 우리의 자주적 독립의 세상, 해방된 세상을 엮어나갑시다.

이마에 흐르는 땀으로, 등줄기에 흘러내리는 땀으로 이 세상의 모든 생활품과 가치를 생산해내는 노동형제 여러분.
우리는 너무나 고초를 받고 살아왔습니다. 너무나 고초를 당해왔습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이제와서 이게 뭡니까.
국난, 대란의 그 모든 책임을 지고 이렇게 거리에 널부러져 계십니다.
형제 여러분 차마 눈뜨고 봬올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 손을 맞잡읍시다.
군살 굳게 배긴 그 억센 손 우리 함께 잡아봅시다. 이 세상의 모든 가치들은 여러분들의 손에 의해서, 여러분들의 땀에 의해서 생산되었고 여러분들의 슬기에 의해서 창조된 것 아닙니까.
노동형제 여러분 함께 떨쳐 일어섭시다.

이 나라 이 땅의 지식인 여러분.
지식인은 책무가 무겁습니다.
지식인은 그 지식 쪼가리 팔아먹고 사는 그런 장사치가 아닙니다.
지식인, 그것은 지고의 가치를 품에 안고, 지고의 가치를 등에 지고, 그리고 시련의 십자가를 함께 짊어지고 갈 그러한 숭고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지식인입니다.
지식인 여러분, 이 나라 이 땅의 지식인 여러분! 함께 갑시다. 고난의 길 함께 갑시다. 노동자의 눈물, 농민의 피땀, 청년학생들의 그 어려움 우리 함께 안고 갑시다. 그리하여 그대들과 함께 이제 자주민주통일의 대동한 세상을 열어갑시다. 지식인 여러분.

우리에게는 많은 스승이 계십니다.
수년 수십년 그 옥창에서도 자기 신념을 버리지 않고 우리에게 많은 지혜와 의지를 가르쳐주신 분도 계십니다. 전 세계 그 유례가 없습니다. 저는 그분네들의 신념이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자기 신념 하나에 자기 생애를 걸고 그렇게 오랫동안 지켜오실 수 있었을까요.
이 지구상에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 이 땅 우리의 스승처럼 그러한 생애를 엿볼 수 있었던지 한 번 예를 들어보라 하십시오. 누구 나와보라 하십시오.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선생님들의 가르침, 저희에게는 소중합니다. 우리 자식들에게도 소중합니다.
더욱 강건하셔서 저희들에게 조국통일의 대의를, 그리고 슬기를,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동지가 동지를 아끼고, 그리고 미워할 줄 모르면서 미움을 어여쁨으로 바꿔낼 수 있는 그런 사랑의 지혜도 함께 가르쳐 주시기를 간절히 부탁 말씀 올립니다.

끝으로 내 마음속의 한가지 것만 말씀 올리겠습니다.
저는 대중집회 때 몇 차례 신창균 선생님을 소개해 올린 적이 있습니다. 몰라서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몰라서가 아닙니다. 선생께서는 50여 년 전에 당시의 스승인 김구 주석을 모시고 남북협상을 위해 38선을 넘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스승은 흉탄에 쓰러지셨습니다. 그 후 50여 년 동안 당신 스승의 염원을 안고 한결같이 오셨다는 그것을 기리기 위해서, 그게 너무 아름다워서, 그게 너무 거룩해서 그래서 신창균 선생님을 그렇게 모신 것입니다.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올시다. 저에게도 많은 스승이 있었습니다. 정말로 많은 스승이 있었습니다.
그런 스승님들 뜻을 받들어서 모시고 그러면서 여러분과 함께, 여러분에게 이 한 몸 던졌습니다. 이 나무가 썩은 나무 같으면 조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돌이 썩은 바위 같으면 또 조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썩은 바위가 아니고 썩은 나무가 아니라면 여러분들 뜻대로 조각해 주십시오. 다윗이 되든지, 골리앗이 되든지, 아니면 사오정을 만들든지 여러분 뜻대로 만들어서 여러분 뜻대로 써주시기 바랍니다.
말씀드렸거니와 여러분들이 만들었으면 그다음 여러분들은 그 지도에 엄격하게 복무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저 한사람 얘기가 아니라 함께 하시는 노수희 공동의장님, 우리 홍근수 공동의장님 똑같습니다. 우리 세 사람, 삼위일체올시다.

여러분, 아낌없이 사랑해주시고 아낌없이 지도해 주시고 아낌없이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전국연합 의장 오종렬이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조직적으로는 해산된 지역연합을 복원해야 했고, 극심한 갈등 속에 놓여있는 통일운동 노선도 모아나가야만 했다.

이에 99년 ‘8.15 통일대회를 하나로!’ 대회를 성사시키자고 했다. 더 이상의 분열은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통일의 마중물을 위한 통일방북도 성사시켰다.

수감 중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잘 드러나듯, 시련 없이 승리 없다는 점을 의장 오종렬은 잘 알고 있었고 전국연합은 투쟁이라는 보검을 통해 분열의 상처를 보듬고 단결의 기운을 높여나갔으며, 통일 방북을 통해 통일운동의 약진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다.

2001년, 군자산의 약속, 정치 방침 발표

▲ 전국연합 10돌 행사.
‘자주적민주정부 수립’을 호소하는 오종렬. [제공 : 통일뉴스]

1997년 IMF 사태와 2000년 6.15공동선언은 한국 사회를 뒤흔들어 놓았다. IMF로 정리해고가 일상화되고 불안정노동이 확대되는가 하면 공기업 민영화, 금융의 자유화 등도 확대되었다. 한편 6.15공동선언으로 남북관계에서도 근본적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이는 전국연합이 시대적 요구를 반영한 새로운 운동노선과 전략을 세워야 함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이에 2001년 9월 전국연합은 ‘3년 안에 광범위한 민족민주전선과 민족민주정당을 건설하여 10년 안에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하고 연방통일조국을 건설하자’는 취지의 특별결의문(3년의 계획, 10년의 전망), 이른바 ‘군자산의 약속’ 또는 ‘9월 테제(9월 방침)’를 채택하였다.

변혁운동 승리를 위해선 전민항쟁과 선거의 결합을 통해 진보정당이 집권해야 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여기서 전민항쟁을 조직화하기 위해선 광범위한 민족민주전선을 구축해 나가야 하며, 전국연합에는 민주노총이 가입되어 있지 않은 한계가 있으니 민주노총이 가입된 상설적 연대 투쟁체를 구축해서 새로운 통일전선의 토대를 구축해 나가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3년 안에 광범위한 민족민주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6.15공동선언 발표 이후 통일연대를 구축하고 남-북-해외 연대사업을 전면으로 펼치면서도 민중연대를 구축하여 민주노총, 전농 등 대중조직을 포함하는 상설적 연대 투쟁체를 구축하고, IMF 이후 벼랑 끝에 내몰린 민중과 함께 투쟁하여 생존권과 기본권을 보장받고 나아가 변혁의 주체로 노동자, 농민을 세우고자 했다.

다른 한편, 전민항쟁이 결합된 선거에 승리하기 위한 진보정당이 필요한데 민주노동당을 노동자, 농민에 튼튼히 뿌리를 내린 진보정당으로 만들어 진보집권의 시대를 열어가고자 했다. 이후 전국연합은 깃발을 다시 세워 태세를 정비하고 9월 테제를 통한 전망과 계획, 노선을 마련하며 본격적인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2002년 여중생 투쟁

미군 장갑차에 의한 중학생 사망 사건은 한일월드컵 열기로 한국을 뜨겁게 달궜던 2002년 6월 발생했다. 2002년 6월 13일, 당시 조양중학교 2학년이던 신효순, 심미선 학생이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 소재 국도 갓길을 걷다 주한미군 미 보병 2사단 대대 부교 운반용 장갑차에 깔려 현장에서 숨진 것이다.

당시 14세인 신효순과 심미선 양은 사건 다음날이 효순양의 생일이기도 해서 여학생 다섯 명 이 모이기로 한 약속에 맞춰 가고 있던 길이었다. 미 보병 2사단 참모장 등은 피해 유가족에게 각각 위로금 100만 원을 전달하며 미군 측이 15일 장례식을 치르면 사단장과 면담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장례식을 마친 후 미군 측은 면담 약속을 파기하며 한국민을 기만하였다.

이에 경기도 동지들을 중심으로 가장 먼저 투쟁이 시작되었다. 미군 부대 진입 투쟁을 시작으로 격렬한 투쟁이 전개되었으며 6월 26일 시민사회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500여 개 단체가 참여한 가운데 여중생 범국민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오종렬은 여중생 범대위의 공동대표를 맡으며 누구보다 먼저 투쟁에 나섰다. 중학생의 억울한 죽음이었고, 미군의 범죄라는 점에서 오종렬이 이 투쟁의 최선두에 선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미군 측에 재판권을 포기하라고 했으나 이제껏 미국이 “1차적 재판권을 포기한 전례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재판권 포기를 거부했다. 이후 11월 미 군사 법정에서 배심원단은 기소된 미군 2명에게 무죄 평결을 내렸다. 그리고 며칠 후 가해자는 미국으로 줄행랑을 쳤다. 국민의 분노는 하늘 찔렀다.

▲ ‘미군장갑차 살인사건 희생자 고 신효순, 심미선 49재 추모제’에서 헌화하는 오종렬. [제공 : 통일뉴스]

미국 당국자 그 누구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당시 부시 대통령은 촛불 시위가 전 국민적으로 진행되자, 허바드 주한미대사를 통해 또 한 번은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을 통해 간접사과를 했다. 그리고 12월 14일 ‘주권회복의 날’ 대규모 시위를 하루 앞둔 13일 밤, 김대중 대통령에게 전화로 사과표명을 했다. 그러나 이 사과도 여중생의 죽음에 대해 유감을 표할 뿐, 미군 측의 잘못은 인정하지 않은 것이었다.

2002년 11월 30일 토요일. 1만여 명의 시민이 광화문 네거리를 촛불로 밝혔고, 일주일 뒤인 12월 7일엔 5만여 개의 촛불이 켜졌으며, 다시 일주일 뒤인 14일엔 10만여 명의 사람들이 광화문을 ‘반딧불이의 바다’로 만들었다. 대중적 반미 투쟁이 한국에서도 시작된 것이고 그 앞에 오종렬이 있었다.

자주민주통일전사 강희철을 잃다

강희철은 학생운동가였으며 노동운동가였다. 그는 인천에서 운동을 시작했지만 인천지역에만 국한하여 활동하지 않았다. 1994년 한노협 결성부터 1996년 전국노동자통일대연석회의가 결성될 때까지 노동운동가로서 광주와 안산, 서울 등 각지를 다니며 전국 노동운동의 단결을 위해 애썼다.

강희철은 전국연합이 난파선이 될 위기상황인 1998년. 전국연합을 민족민주운동의 구심으로 세우기 위해 불같이 일어났다. 이러한 과정에서 오종렬을 만나게 된다. 강희철은 1999년 인천연합 조직위원으로, 2000년에는 오종렬의 부름을 받고 전국연합 조직위원장으로 선임되어 전국을 다녔다. 아침에는 서울, 점심에는 전주, 저녁에는 제주에 갔다. 모든 것을 쏟아 전선을 지키고자 했다.

그리고 그는 2001년 ‘3년의 계획, 10년의 전망. 광범위한 민족민주전선, 정당 건설로 자주적 민주정부를 수립해 연방통일 조국 건설하자’는 9월 테제를 만들고 확대하는데 온힘을 다한다. 전국연합의 주축이었던 전국농민회총연맹을 위시해 지역과 부문 조직에서 민족민주정당을 강화하기 위해 민주노동당에 입당해 힘을 보탰다. 16대 대통령 선거가 있던 2002년. 그 이듬해인 2003년 2월 강희철은 전국연합의 정치위원장에 임명되었다. 노동자·농민·청년학생들과 진보정당을 건설하는데 앞장서기 위한 선택이었다.

▲ 고 강희철 동지의 영결식에서 참배를 하고 있는 오종렬. [제공 : 민중의소리]

하지만 강희철은 2003년 4월 7일. 전국연합 중앙집행위원회 회의 도중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해 4월 13일 깨어나지 못하고 영원히 잠들었다.

오종렬은 강희철 동지를 “비밀을 간직한 별나라 소년처럼 표정 하나 변함없이 태연하게 일했다”고 했다.

1주기 추모제에 참여해서는 “강희철 동지가 떠나간 지 10년도 훨씬 지난 것 같다. 나는 전국연합 상임의장으로 그에게 빚을 졌다. 제발 나보다 빨리 가지 말라고 간절히 소망했지만 그는 우리 곁을 떠났다”며 “그에게는 사생활이 없었다. 그와 같이 일했던 동지들은 안다. 누구에게도 비판을 아끼지 않았고 자신에게는 더욱 철저하고 혹독하게 비판했던 사람이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오종렬은 “그는 자주민주통일이라는 축을 언제나 가슴에 담고 사업을 기획하고 사람을 찾아 나섰던 사람”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비전향장기수 모임인 통일광장의 권낙기 대표는 “희철은 자주, 민주, 통일 세력들의 대동단결로 조국통일과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에 목숨을 건 혁명가였다. 누구보다 치열하면서 부지런하게 살았다”고 했다.

국가보안법 폐지 1000인 단식단 단장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노무현의 ‘정치적 중립성’을 이유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반발하는 가운데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 자유민주연합의 주도하에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가결했다. 국민들은 크게 반발했고, ‘탄핵무효 부패정치 청산 국민행동’을 구성한다. 전국연합은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은 국민 주권을 무시한 보수세력의 반격으로 규정하고 적극적인 대응 투쟁에 나섰다.

그 결과 4월 15일,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의석은 47석에서 152석으로 증가하였고 한나라당은 121석, 민주노동당은 10석을 얻게 되었다. 진보정당 최초로 의회에 진출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도 새천년민주당과 자유민주연합을 제치고 제2야당으로 올라서게 된 것이다. 2001년 전국연합 9월 테제의 방침이 현실화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는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기각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현직으로 복귀하게 된다. 이에 탄핵 국면을 딛고 국회 과반의석을 확보한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참여정부는 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과거사 진상규명법, 언론관계법의 4대 개혁입법을 추진하게 된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겠다는 정부 여당의 움직임에 2004년 12월 전국연합은 국가보안법폐지 국민연대와 함께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에 사활을 걸기로 하는데, 12월 6일 오종렬 상임의장, 범민련 남측본부 나창순 의장, 이종린 명예의장 등 무려 300명이 집단 단식농성을 시작한다.

단식농성 참여자는 일주일 만에 560명을 넘기며 보름 만에 1000명이 넘는 규모로 늘어났다. 국가보안법 폐기 여론도 확대되고 전국교수대회가 개최되는가 하면 강만길 상지대 총장, 리영희 한양대 대우교수, 한승헌 변호사(전 감사원장) 등 학계·종교계·법조계·여성계 원로 74명도 기자회견을 열고 국가보안법의 연내 폐지를 촉구하기도 했다.

12월 29일, 단식 24일째에는 경남지역 12명, 울산 37명, 부산 14명, 전주-완주 10명, 서울 18명 등 지역·단체별로 발표된 ‘결사단식단’ 총 219명이 중대발표를 통해 물과 소금도 끊는 결사 단식을 진행하기도 했다.

▲ 2004년 12월 14일, 국가보안법 폐지 단식농성 확대 기자회견에서 발언하는 모습. 이날로 단식 참가자는 500명을 돌파했다. [제공 : 통일뉴스]

오종렬 공동농성단장은 “우리가 여의도 아스팔트 위에서 곡기를 끊는 것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바로잡기 위함”이라며, 참가자들에게 “깊은 존경과 감사”를 표했다. 오종렬은 “국가보안법이 양심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고 표현의 자유를 가로막아 왔음은 지난 56년의 역사가 증명한다”고 잘라 말하고,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통일인사, 민주인사들이 학살되고 고문받았나, 100만 원귀가 대한민국 하늘을 떠돌고 있다”고 절규했다. 특히 국가보안법 폐지에 반대하는 한나라당과 조중동에 대해 “권력과 부를 독점하던 시대로 회귀하고자 하는 것”이라 비난하고, “오늘의 투쟁은 대한민국이 이런 잔재를 떨치고 자주적 민주정부로 가는 대장정의 영마루”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러한 처절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의 강력한 반대와 함께 열린우리당 지도부가 한나라당과 시간을 끌며 타협하면서 결국 국가보안법 폐지는 무산되고 만다.

2005년 전용철·홍덕표 농민 열사 범국민대책위 공동대표

전국연합은 2005년 반미 투쟁을 전면화했다. 5월 미국의 광주 송정리 페트리엇 기지 철거 투쟁, 7월 대추리 미군기지 건설 저지 투쟁, 9월 맥아더 동상 철거 투쟁 등 격월 간격으로 격렬한 투쟁이 전개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쟁 시기마다 수만 명이 집결했다.

10월 말에는 정부와 정부 여당인 열린우리당을 중심으로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가 질서유지권을 발동해 ‘쌀 관세화 유예 협상 비준동의안’을 통과시켰고, 국회 통과를 예고했다. 비준동의안은 쌀 관세화 개방 유예를 조건으로 밥쌀 수입을 대폭 확대하겠다는 것으로 농민들의 분노가 전국 각지에서 터져 나왔다. 농민들은 12월 초로 예정된 WTO 후속 협상인 도하개발아젠다협상(DDA) 이후 비준안을 처리해도 늦지 않다고 강변했지만 정부는 선제적으로 안을 마련해야 한다며 강행 처리했다.

11월 15일 여의도에서 WTO 쌀개방 저지 투쟁이 전개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경찰의 과도한 폭력으로 인해 전용철, 홍덕표 농민이 사망하게 되고 당시 허준영 경찰청장이 전용철, 홍덕표 농민의 사인이 경찰 폭력이 아니라고 발뺌하며 노동자, 농민들의 분노를 사는 일이 발생한다. 이에 11월 18일 APEC 부산 정상회담 저지 투쟁을 거쳐 WTO 각료회담이 열리는 홍콩에서 투쟁을 이어가기로 하고, 청와대 앞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중심으로 전용철, 홍덕표 농민 사망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투쟁이 진행되는 동시에 저 멀리 홍콩에서는 12월 11일 WTO 각료회담 저지 투쟁이 진행된다.

이 자리에 맨 앞에 오종렬이 서 있었다. 홍콩 원정 한국투쟁단의 대표는 정광훈과 오종렬이었다. 당시 한국투쟁단은 농민 1000여 명과 민주노총 130여 명 등 1100여 명이 함께 했는데, 홍콩 언론은 한국투쟁단을 처음에는 폭도로 소개했다. 이때 오종렬은 자기 헌신적 방식으로 호소하고 홍콩시민도 함께 할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라고 강조한다. 이렇게 기획된 투쟁은 전농 소속 농민 130여 명이 바다로 뛰어들어 WTO 각료회담장 앞 50여 미터 직전까지 헤엄을 쳐서 각료회의장 진입을 시도하는 등의 결사투쟁을 벌이는 것이었고 촛불 집회 방식과 삼보일배도 병행했다.

▲ 2005년 12월 15일, 홍콩에서 ‘WTO 각료회의 저지를 위한 한국민중투쟁단’에서 진행한 규탄 기자회견에서 발언하는 모습. 백발노인의 3보 1배는 시위대에 부정적이던 홍콩 시민들의 마음을 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한국투쟁단의 헌신적인 모습에 홍콩시민들이 동참했고 언론의 논조도 서서히 변화했다. 한국투쟁단에 대한 현지 언론의 관심은 뜨겁고 폭발적이었다. 오종렬 상임의장은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걷고 한번 절하는 게 3보 1배”라고 전 세계 민중들에게 친절히 설명한 뒤 “제국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난폭자가 아니다! 가장 존엄한 생산자이고, 민중이다! 오늘 우리의 존엄성을 만방에 보여주자”라고 호소했다. 정광훈 의장님의 ‘DOWN, DOWN, WTO! DOWN, DOWN, USA!’ 구호도 여기서 등장했다.

그러던 와중 홍콩 투쟁을 채 다 마치기도 전에 오종렬은 한국으로 귀국해야 했다. 전용철, 홍덕표 농민 열사 투쟁 때문이었다. 국가 인권위 조사 결과 전용철, 홍덕표 농민의 사인은 경찰의 폭력 때문이라고 밝혀졌고, 노무현 대통령도 12월 27일 사과했지만 정작 허준영이 책임을 회피하자 오종렬은 허준영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농민들의 뜻도 같았다. 농민들은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에도 경찰청 앞에 눌러앉아 허준영이 책임지고 사퇴하라고 요구했다. 허준영 당시 경찰청장은 임기가 보장되어 있다며 사퇴를 거부했지만 영하 15도 아래로 내려가는 날씨에도 노숙 농성으로 그렇게 이틀을 버티자 허준영은 결국 여론에 밀려 자진 사퇴 하고 만다.

오종렬은 2005년 마지막 날에 진행된 전용철 홍덕표 농민 영결식에서 “이제야 떠나보낼 수 있어 송구스럽다”는 이야기를 꺼내며 열사를 살려내자고 강조했다. “열사를 살리자는 말은 시신을 되살리자는 것이 아니라 민족농업의 근본적인 회생을 뜻한다”면서 “민족농업의 회생은 전 민족의 대단결로만 해낼 수 있다”고 말한다.

2006년 한미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 연초부터 일본은 앞서가고 중국은 우리를 추격해 온다며 새로운 성장동력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서비스 산업 발전에 한국 미래의 명운을 걸어야 한다며 이를 위해선 서비스 산업이 가장 발전된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이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노무현 정부는 4대 선결요건을 미국에게 내주었다. 스크린쿼터 축소,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재개, 건강보험 약가 현행 유지, 자동차 배기가스 기준 적용 유예 등이다. 퍼주기 협상인 데다가 피해를 보는 다수 국민뿐 아니라, 국회에까지 철저하게 협상 내용을 공개하지 않아 밀실야합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국회와 시민사회가 그 내용과 효과를 제대로 검증할 기회조차도 갖지 못했고 그 결과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 경제주권 등을 침해하는 여러 독소조항들도 손보지 못했다.

이에 한국의 전체 시민사회와 민중진영 뿐 아니라 각계가 절박하게 대응에 나서야 했다. 우선 영화인과 농민들이 중심이 되어 ‘스크린쿼터사수 한미FTA저지를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준)’(범대위)가 2월 15일 발족했는데 이 자리에서 오종렬은 “(한미FTA는) 결국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라고 맹비난했다. “그들(정부행정관료들)의 세계화이자 국가발전전략”을 보면 “구한말 일본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 개방만이 살길이라고 주장했던 친일파들이 떠오른다”며 “너무나 닮아있는 그들만의 정부, 한미FTA는 제2의 한일합방, 제2의 내선일체”라고 주장했다.

▲ 2007년 1월 16일, 한미FTA저지 범국민대회에 참석한 모습.

6월 오종렬은 한미FTA 저지 투쟁단 단장으로 미국에 방문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한국 정부는 자국민인 한국투쟁단을 폭도로 몰아붙이는가 하면 미국 정부는 한국투쟁단의 노동자, 농민들에게 비자를 발급하지 않는 등의 발악을 일삼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여 명의 투쟁단은 ‘평화집회 평화시위’의 원칙 아래 삼보일배와 촛불시위, 국회 앞 집회까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고 이러한 투쟁은 3차 협상이 열린 시애틀에서도, 5차 협상이 열린 몬태나에서도 계속되었다.

2006년 11월 22일에는 전국동시다발 총궐기가 있었다. 반대여론이 찬성여론을 크게 앞질렀고 가면 갈수록 까면 깔수록 노동자, 농민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협상인 한미FTA를 무리하게 강행하려는 노무현 정부에게 노동자, 농민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전국광역도시별로 수만 명의 집회가 열린 것이다. 10여 개가 넘는 광역도시에서 노-농-빈 수만 명이 운집하는 집회가 열리니 경찰력이 이를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다. 정광훈 의장님의 말씀처럼 총궐기 혁명 축제의 난장이 되었다. 이 집회로 인해 수십 명이 구속되고 한미FTA 저지 범국본 박석운 집행위원장과 주제준 상황실장은 수배를 받게 된다.

오종렬은 한미FTA 타결의 막바지 시점에서도 3월 광화문 열린시민마당에서 단식농성에 돌입한다. 바람막이 하나 없는 맨바닥에 장판을 깔고 8일째 단식 중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우렁차고 확신에 찬 목소리의 오종렬은 “밀실야합으로 협정이 체결된다면, 정부는 민중항쟁과 민중봉기의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10여 명으로 시작한 단식농성단이 1주일 만에 100여 명으로 늘었다. 이제 곧 100명이 1000명이 되고 1만 명이 될 것이다. 민중들이 일어서면 반드시 FTA는 막을 수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2007년 4월, 온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협상은 타결되고 그 과정에서 허세욱 열사가 “한미FTA 폐기하라”를 외치며 분신하였고 오종렬과 정광훈은 7월 4일 한미FTA 협상 저지 투쟁으로 인해 구속되고 만다.

▲ 고 허세욱 열사 분향소에 함께 한 오종렬과 고 정광훈 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