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헌법행위는 이렇게 저질러졌다

1. 민간인 학살사건 -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민주자료관 관장

2016-07-20     한홍구 교수

민플러스는 지난 13일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가 공개한 1차 검토대상자 자료를 토대로 반헌법행위에 대한 각 영역별 사건과 내용, 반헌법행위자 선정기준 및 이유를 담은 자료를 5회에 걸쳐 매주 수요일 연재한다. 첫 자료는 민간인학살영역으로, 집중 검토 대상자에 대해서는 ‘반론권과 인격권을 보장하고 열전이 보다 공정하게 제작될 수 있도록 이의신청을 접수’한다는 열전편찬위의 방침을 존중해 공개하지 않는다.[편집자] 

과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 핵심 관련자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민간인 학살 분야를 담당했던 위원과 조사관들, 민간인 학살 분야의 연구자들 등이 여러 차례 모여 토론을 진행하였습니다.

● 2015년 11월 13일(목) 전 진실화해위원회 상임위원 김동춘 교수 초청 간담회

● 2016년 2월 26일(목) 전문가 간담회 (장소: 대전 NGO센터)

● 2016년 4월 24일(일) 전문가 2차 간담회 (장소: 대구)

● 2016년 6월 4~5일(일) 전문가 워크숍 (장소: 마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의 특징은 수십만이 죽었음에도 죽은 자만 있을 뿐 죽인 자는 없다는 점입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민간인 학살 분야의 조사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안타깝게도 가해자 부분에 대한 조사가 극히 미흡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편찬위원회는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성과에 크게 기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후 국가배상 소송 과정에서 추가로 밝혀진 부분이 일부 있고, 또 진실화해위원회의 활동 종료 이후 각 지역의 전문가나 유가족들에 의해 추가로 밝혀진 부분이 있습니다만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성과를 크게 넘어서는 것은 아닙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에서 가해자 부분은 대개 000으로 익명처리 되었는데, 본 편찬위원회는 이제 떨리는 마음으로 그들의 이름을 부르려합니다.

민간인 학살로 얼마나 죽었는지 우리는 아직 모릅니다. 연구자마다 제각각인데 누구는 30만이라 하고 누구는 50만이라 하고 또 누구는 관행대로 100만이라 합니다. <반헌법행위자 열전>에 대략 300명이 수록된다고 할 때 민간인 학살 관련자는 잘해야 100명 안팎일 것입니다. 민간인 학살 희생자를 아무리 적게 잡아도 30만, 그렇다면 희생자 3천 명 당 가해자 1명을 기록하는 셈이니 그저 황망할 뿐입니다.

1) 선정 기준

1948년 제주 4.3사건 이후 한국전쟁 기간까지 발생한 여러 민간인 학살사건에서

- 민간인 학살의 계획을 수립한 자

- 민간인 학살을 지시한 자

- 민간인 학살의 지휘계통에 있었던 자

- 현장에서 학살을 집행한 현장책임자

- 직접 민간인을 학살한 자

- 학살을 방조한 자

- 학살을 은폐한 자

2) 1차 집중검토 대상 반헌법 사건

 

<제주 4·3학살사건>

▲ 1947년 3월 1일 경찰은 시위군중에게 발포해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해 4.3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다. (사진 출처 : 4.3평화공원 영상 켑처)

제주 4·3사건은 1947년 3월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3일 발생한 군중시위를 포함해 1954년 9월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1947년 3월1일 경찰은 시위군중에게 발포해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해 4.3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후 남로당 제주도당은 3.10총파업을 일으키는 등 경찰발포에 거세게 항의했고, 이승만 정부는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를 전원 외지사람으로 교체하고 응원경찰과 서북청년단 단원 등을 대거 제주로 내려 보내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전개했다. 검속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4.3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으며 테러와 고문이 잇따랐다.

이에 1948년 4월3일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하면서 경찰과 서청의 탄압중지, 단선․단정 반대, 통일정부 수립 촉구를 내세운 무장봉기가 시작됐다. 이승만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고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에 앞서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 이후 군과 경찰, 서북청년단에 의한 학살이 계속되었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등이 또 다시 학살되었다.

▲ 4.3사건을 다룬 영상 중 한 장면 (사진 출처 : 4.3평화공원 영상 켑처)

1947년 3.1절 발포사건부터 1954년 9월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기까지 7년 7개월 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자행된 무자비한 학살은 그 피해 규모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고, 사건이 끝난 후에도 연좌제로 인한 피해와 정신적․육체적 후유증이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국회는 1999년 12월26일 본회의를 통하여 제주도민들이 고대하던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을 통과시켰고, 2003년 10월5일 ‘4.3특별법’에 의해 구성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이하 위원회, 위원장 고건 국무총리)에서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었다. 2003년 10월31일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뤄졌음을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했다.

▲ 4.3항쟁을 다룬 영화 '지슬' 포스터

 

<경산코발트광산 학살 사건>

한국전쟁 발발 후 경산, 청도, 대구, 영동 등지에서 끌려온 국민보도연맹원 및 요시찰 대상자들과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재소자 중 상당수가 경산․청도지역 경찰과 경북지구CIC 경산․청도 파견대, 국군 제22헌병대에 의해 1950년 7~8월경 경상북도 경산시 평산동에 위치한 코발트광산 등지에서 집단 사살된 사건이다.

이 사건의 경위를 살펴보면 국민보도연맹 경상북도연맹 및 충북도연맹 산하 경산시, 청도군, 대구시, 영동군 연맹에 가입되었던 보도연맹원 및 요시찰 대상자 중 많은 수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 검속되어 경찰서 유치장 및 인근 창고 등지에 구금되어 분류과정을 거쳤으며 이후 대구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상당수의 재소자들과 함께 1950년 7월 중하순 무렵부터 8월 중순경까지 경산코발트광산 등지에서 군경에 의해 집단 사살되었다.

▲ 경산 코발트광산 앞에 있는 안내문(사진출처 : 나무위키)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경산코발트광산 등지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자수를 1800명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유가족들은 3500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이 사건의 희생자들은 비무장 민간인들이었으며 좌익에 협조를 하거나 남로당에 가입되어 좌익 활동을 하다는 이유로 보도연맹에 가입되었거나 경찰에 의해 요시찰 대상자로 분류되어 예비 검속된 사람들과 보안법위반 등으로 대구형무소에 미결 또는 기결수로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과거 좌익경력으로 인해 남하하는 인민군에 협조할 위험이 있는 잠재적 적으로 간주되었으며 인민군들이 남하하기 직전 군경에 의해 사살되었다.

2005년 설치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06년 4월 25일 조사를 시작해 2009년 11월17일 경산 코발트 광산 등지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사건은 군․경에 의한 집단 학살이라고 판정했다.

 

<후방 학살 사건 중 11사단 사건>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과 서울 수복 이후 전황이 불리하게 된 인민군 주력은 소백산맥, 태백산맥을 경유하여 북으로 퇴각하지만 미처 퇴각하지 못한 1만여 명의 인민군은 호남과 영남의 산악지역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유격전을 전개하면서 후방지역을 교란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216호에 의거 후방지역 토벌작전을 전담할 제3군단(군단장 이형근 준장)을 창설하고 후방지역 빨치산 토벌작전을 전담할 제11사단을 창설하여 제9연대, 제13연대, 제20연대를 배속시켰다.

이들은 담양. 장성, 함평, 화순, 영암, 고창, 나주, 순창, 완주 등 호남지역, 거창, 산청, 함양 등 영남지역에서 토벌작전 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이 부역혐의 혹은 빨치산 협조자란 명목으로 살해되었다.

▲ 빨치산을 토벌한다는 이유로 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사진출처 : 나무위키백과사전)

이중 거창 민간인학살 사건은 거창 출신 국회의원 신중목의 집요한 추적으로 사건의 진상이 국회에 공개되어 1951년 제11사단 제9연대장 오익균, 제3대대장 한동석은 무기징역, 김종원은 3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승만 대통령은 김종원을 특사로 석방 후 경찰간부로 채용했으며 오익균, 한동석도 형집행정지로 석방했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관련 사건 중 일부만을 조사할 수 있었고, 후방학살로 추정되는 유해 집단매장지를 발굴하였으나 추가적인 조사를 진행하지 못한 채 활동이 종료되었다.

 

<국민방위군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은 정부가 1950년 11월20일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만17세에서 40세 미만의 장정들을 제2국민병으로 편성하였으나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빼돌린 고위 장교들의 부정으로 인해 이들 중 약 9만 명에서 12만 명이 아사하거나 동사하여 사망한 사건이다.

1950년 12월21일 국민방위군 설치법이 공포되어 서울에 모여든 방위군 숫자가 50만여 명에 이르렀으나 중국군의 공세가 거세지자 정부는 방위군 장병들을 대구와 부산 등으로 이동할 것을 지시한다.

▲ 고위급 간부들의 군수물자 착복으로 5만 여명의 방위군이 죽었다. 사진은 징집된 국민방위군 (사진 출처 : 위키백과사전)

혹한 속에서 국민방위군은 걸어서 이동해야 했는데 고위 장교들의 예산 착복으로 이들에게는 제대로 된 숙식과 겨울피복 군복 등이 지급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불과 100여 일 사이에 50만 명의 방위군 장병 중 약 5만 명이 사망한다.

국회 조사위원회의 보고에 의하면 1950년 12월17일부터 1951년 3월31일까지 유령인구를 조작하여 착복한 것이 현금 23억 원, 쌀 5만 2천 섬이나 되었다고 한다. 국민방위군 사령부에서 제시한 통계를 그대로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식료품비의 조달액수와 실제로 집행된 액수의 차이가 무려 20억 원에 달해 결국 3개월 동안 55억이라는 막대한 금액을 방위군 고위 간부층이 착복한 것으로 드러났다.

부사령관 윤익헌에 대한 기밀비용이 105일 동안 무려 3억1755만원이나 지출되었고, 국회 내에 관련된 정파에 1억 원이나 흘러간 것 등 밝혀지면서 이 착복한 규모는 매우 큰 규모로 복잡하여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려면 최소 개월이 걸릴 것’이라는 충격적인 중간 발표결과가 나왔다.

국회는 1951년 4월30일 국민방위군의 해체를 결의하였고, 국민방위군 지도부는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1951년 5월6일 열린 군사재판(재판장 이선근)은 사령관 김윤근에게 무죄, 부사령관 윤익헌 등 다른 간부에게는 최대 3년6월의 가벼운 형만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이시영 부통령이 이에 반발 사임하는 등 여론이 크게 악화되자 새로 임명된 국방장관 이기붕은 국민방위군 사건의 재수사를 명하였다. 그해 7월19일 중앙고등군법회의는 사령관 김윤근, 부사령관 윤익헌 이하 5명에게 사형을 언도하였으며, 8월13일 김윤근, 윤익헌, 강석한, 박창원, 박기환 등에 대한 공개총살형이 집행되었다.

▲ 8월 13일 군 책임자인 김윤근, 윤익헌, 강석한, 박창원, 박기환 등에 대한 공개총살형이 집행되었다. (사진 출처 : 위키백과사전)

2007년 10월30일 군 당국은 한국전쟁 당시 ‘국민방위군’으로 끌려가 훈련 중 구타를 당해 상해를 입고 숨진 희생자에 대해 56년 만에 순직결정을 내렸고, 2010년 9월8일, 진실화해위원회에서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되어 희생된 이들과 유족들에게 사과하고 예우를 갖추라고 대한민국 정부에 권고했다.

(다음주에는 '내란 영역'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