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북진으로 고구려의 삼국통일 정책이 난관에 봉착하다

[박경순의 고구려사](22)

2018-12-04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550년대 초 신라와 백제가 연합해 한강이북까지 밀고 올라옴으로써 고구려의 삼국통일정책 실현에 중대한 난관이 조성됐다. 하지만 고구려는 삼국통일정책 실현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완강하게 추진해 나갔다. 

또한 동북방의 오락후국(대막로국의 서쪽에 있었던 부여계통의 족속), 대막로국(두막루국이라고도 함. 부여의 유민들이 니하를 건너가 세운 나라로 오늘의 흑룡강성 하얼빈시 부근에 있었다. 원래 346년 후부여가 망한 후 부여 사람들이 북쪽으로 니하를 건너가서 그곳에 있는 부여사람들과 함께 북부여를 건설했었는데, 두막루국은 이 북부여국의 후신 ) 등 부여계통 주민들이 세운 나라들을 통합하고 동북방 말갈족들을 복속해 영토를 더욱 확대함으로써 동서 6000리, 남북 5000리가 되는 광대한 영역을 차지했다. 또한 6세기말 이후 수당 침략군과 영웅적 투쟁을 펼쳐,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나라의 자주권을 튼튼히 수호했다.

6세기 중엽 고구려의 내부 정세와 백제-신라 관계의 변천

529년 전쟁(안장왕의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 승리로 고구려는 삼국통일정책 실현에서 결정적 국면을 맞이했다. 고구려는 삼국통일정책의 완성을 위해 529년 전쟁 승리로 확보한 지역에서 통치체계를 세우고 이를 공고히 하는데 힘을 썼다. 그런데 이러한 과제를 완수하고 삼국통일정책을 더욱더 앞으로 밀고 나가기 전에 국내외 정세에서 일련의 변화가 발생했다.

무엇보다 나라의 기초를 흔들만한 극심한 자연재해가 발생했다. 535년 5월, 나라의 남쪽지역에서 역사상 유례없는 홍수가 발생해 수많은 집들이 떠내려갔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이 때 고구려의 부수도였던 남평양 지역 역시 대홍수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 신원군 월당리 고구려 도시유적 발굴 결과 드러났다. 이 도시유적에 250cm 이상의 흙, 모래가 쌓여 있고, 재령강 동쪽 기슭이 많이 깎여나갔는데, 이것은 이때 홍수피해로 인한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부수도 남평양성은 북한성(오늘의 서울 중심부)으로 옮겨갔으므로 그 후 도시 복구사업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엎친데 겹친 격으로 그해 12월에는 전염병이 크게 돌았으며, 그 이듬해 봄과 여름에는 왕가뭄이 들고 병충해 피해가 극심했다. 이로 인해 고구려 주민들은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민심이 이반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왕으로 재위하고 있었던 안원왕(재위기간 531~545년, 안장왕의 동생)은 이러한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를 극복하는데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흉년구제가 537년까지도 계속됐다는 것은 그때 발생한 자연재해의 엄혹성을 잘 웅변해준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고구려 지배층 사이에서는 내분이 발생했다. 544년 12월 안원왕의 자식들 사이에서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다툼이 벌어졌다.

고구려의 남하정책의 지속적 추진을 지연시킨 요인은 이러한 자연재해와 내분 외에도 서북방정세 변화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고구려의 서북방지역에서는 돌궐이 새롭게 강성해져 고구려의 서북변경을 위협하고 있었다. 또한 부여사람들이 세운 오락후국과 대막로국을 통합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됐다. 오락후국은 북쪽 눈강 중류에 있는 나라였고, 대막로국은 동류 송화강 북쪽에 있는 나라였는데, 두 나라 모두 부여계 사람들에 의해 세워졌다.

백제는 고구려가 내부 사정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잃어버린 한강유역 이남 땅을 되찾으려 군사행동을 자주 벌였다. 540년(고구려 안원왕 10년, 백제 성왕 18년) 9월 장군 연희를 시켜 고구려의 우산성(오늘의 경기도 평택 안성 근처에 있었던 고구려성)을 포위 공격했는데, 이때 고구려는 정예 기병 5000명을 출동시켜 백제군을 격퇴했다. 

또한 고구려 남변지역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 일부 지역을 점령했다. 그것은 548년에 고구려가 예인(강원도 출신 병사)들을 위주로 한 6000명의 무력으로 백제의 한북 독산성(한수이북 독산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여기에서 한수이북이라 함은 한강 이북이 아니라 경기도 안성현의 지류인 ‘한수’의 북쪽 옛 양성현지역이다.

한편 신라는 6세기 초 고구려가 점령했던 삼척까지의 신라 땅을 되돌려 받았다. 이후 신라는 백제와의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가야나라들을 하나씩 병합해 갔다. 

백제는 예부터 가야를 손아래 동맹으로 삼았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의 가야병합은 백제의 영향력 약화를 초래하는 일이었다. 당연히 백제는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고구려에 대한 공동대응의 필요성 때문에 겉으로 크게 반발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을 뿐이었다. 

신라는 522년 가야(대가야)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었는데, 이는 가야나라들 사이의 연합을 가로막기 위한 교묘한 술책이었다. 이를 통해 가야나라들 사이의 연합에 쐐기를 박고 야금야금 남쪽으로 영토를 넓혀 나갔다. 

신라의 법흥왕은 524년 안라가야(경남 합천지방)를 통합해 가야나라들의 중간허리를 잘라버렸다. 고립무원에 빠진 금관가야는 신라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532년에 신라에 자진해서 투항했다. 신라는 이어 아라가야, 비화가야까지 통합했다. 

백제는 신라가 비화가야, 아라가야, 금관가야를 병합한 데 대해 커다란 불만을 가졌을 것이지만, 고구려에 대한 공동대응 필요성을 저버릴 수 없어 541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제의를 했다. 백제의 화친제의를 받아들인 신라는 548년 고구려와 백제의 한북 독산성 싸움에 구원병을 보내 백제를 도왔다. 이것은 백제-신라 사이의 동맹이 실제 회복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다

6세기 중엽에 해당되는 550년대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삼국통일의 완성을 향해 거침없이 달리던 고구려의 전진을 가로막는 예기치 않은 사태가 발생했으니, 그것은 백제-신라 동맹 세력의 북상이었다. 

당시 고구려는 자연재해와 내분으로 국방력을 강화하는데 소홀했었고, 550년대에 접어들어 서쪽과 북방 정세가 복잡해 군사력을 남방 쪽에 집중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의 이러한 약점을 간파하고 군사력을 동원해 고구려를 쳤다.

550년 정월 백제 장군 달기는 1만의 군사를 동원해 고구려의 도살성(충북 괴산군 도안면으로 추정)을 공격해 함락했다. 고구려는 이에 대한 반격으로 백제의 금현성을 포위 공격해 함락했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 두 나라 군사들이 피로한 틈을 타서 이사부로 하여금 두 성을 들이쳐서 장악하고 성을 증축해 1000명의 갑사를 둬 지키게 했다. 백제는 신라의 이러한 배신행동에도 불구하고 연합을 깰 수 없어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백제와 신라는 550년 말 고구려의 남부지역으로 함께 밀고 올라갔다. 이때 백제는 한성(경기도 광주), 평양(오늘의 서울시 중심부) 등 6개 군 지역을 차지하면서 임진강 계선까지 밀고 올라갔으며, 신라는 죽령 계립령을 넘어 북으로 고현(강원도 철령)까지 10개 군 지역을 차지했다. 

고구려는 이때 한강유역을 빼앗겼을 뿐 아니라 동부지역에서 수백리 밀려났다. 이것은 고구려에게 있어서 참을 수 없는 일대 치욕이었다. 응당 모든 힘과 역량을 집중해 이를 만회해야만 했다. 하지만 고구려는 551년 돌궐이 고구려의 신성과 백암성을 공격하는 등 북방정세가 심상치 않은데다 새평양성(장안성) 건설에 국력을 쏟아 붓고 있어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이러한 소극적 대응은 고구려의 남방정세에 더욱 어려운 결과를 초래했다.

553년 7월에 신라는 불시에 백제가 차지하고 있었던 한강 하류지역까지도 점령하고 이곳에 신주를 설치했다. 그에 대해 백제는 당연히 강력히 반발했을 것인데, 신라가 백제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진 게 없다. 단지 그해 10월 진흥왕이 백제 왕녀를 왕비(후처)로 맞아들인 것으로 봐,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한 전술적 차원의 일시적 조처라고 현혹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신라는 백제와의 동맹관계는 안중에도 없이 오로지 자신들의 영토확장 욕망에만 빠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고구려에게는 고구려를 칠 의사가 없다고 통지했다. 

백제와 신라에 의한 한강유역의 점령, 신라에 의한 한강하류지역의 탈취로 고구려는 일시적으로 남부지역 영토의 상당부분을 상실했다. 이것은 앞으로 삼국관계에서 중대한 변화를 초래하는 요인으로 됐다.

신라가 함경도 지역까지 북진하다

신라가 백제와의 약속을 어기고 한강하류지역을 점령했을 뿐 아니라 고구려와도 내통했다는 사실이 백제에 알려지자, 백제는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554년 7월에 백제군은 신라의 어진성(위치불명)을 공격해 주민 3만9000명과 말 8000필을 빼앗아갔으며, 대가야와 연합해 신라의 관산성(충북 옥천)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때 백제의 성왕은 소수의 인원을 거느리고 전장으로 출전하다가 밤중에 구천이라는 곳에서 신라의 신주 군주 김무력이 이끄는 신라증원군의 매복에 걸려 전사했다. 

그 후 백제는 관산성 전투에서 좌평 4명을 비롯해 2만9600명의 군사들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백제와 신라 관계는 완전한 적대관계로 돌아섰다.

고구려는 554년 10월 '신라가 고구려를 칠 의사가 없으며, 고구려가 백제를 치더라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신라의 밀약을 확인하기 위해 일부 무력을 내보내 백제의 북방 중심인 웅천성(공산성)을 공격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서 농간을 부려 어부지리를 얻었으며, 웅천성 공격에서 고구려가 실패하자, 고구려를 얕보고 고구려의 동남부지역으로 밀고 올라갔다. 

당시 고구려는 남북 두 전선에 군사력을 분산시키고 있었고, 평양성 건설에 국력을 집중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의 북진에 대해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밀렸다. 

신라는 고구려의 역량이 분산된 틈을 활용해 556년에 비렬홀(안변)로 나와 비렬홀주를 두었으며, 557년에는 신주를 북한산주로 개편했다. 또한 562년에는 대가야를 쳐서 멸망시키고 그 영토를 차지했다. 

그 후 신라는 계속 북쪽으로 진격해 568년까지 마운령(함경남도 리원군)과 황초령(함경남도 영광군)계선에 진출해 진흥왕순수비를 세웠다. 이처럼 신라는 동해안 지역에서 훌쩍 북상했는데, 이는 고구려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부각됐다. 고구려로서는 이를 방관할 수 없었으며, 신속히 대처해야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