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세계관(6)- 존재론의 결론

마르크스주의 백문백답(44)

2018-10-23     이병창 동아대 명예교수

1)

존재론 차원에서 유물론과 관념론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기서 결론을 내리자. 관념론과 유물론, 두 철학적 세계관은 과학의 실천을 옹호하는가, 종교를 옹호하는가에 의해 갈라진다. 두 세계관 중 어느 것이 옳다는 절대적 증거를 갖고 있지는 않다고 했다.

과학의 발전으로 종교적 세계관, 관념론은 점차 한 구석으로 쫓겨 가지만 그렇다고 과학적 세계관, 유물론 역시 정상에 오르진 못하고, 8부 능선 어디쯤에서 헤매고 있다. 결국 그 어느 세계관을 택하는가는 현재로서는 모두 삶의 결단에 의존한다.

그래도 두 세계관을 선택하는 여러 보조적 이유를 볼 때 종교적 세계관은 닫혀 있고 과학적 세계관은 열려 있으니 열린 세계관을 택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 아닐까 하는 것이 우리의 결론이었다. 유물론자로서 너무 우물쭈물하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겠지만 나는 거꾸로 이제 유물론자도 겸허해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처음, 이 글을 시작할 때 우리의 주요 관심은 마르크스의 철학과 주체철학의 연관성이었다. 이제 이런 관점에서 존재론적 문제, 즉 유물론이냐 관념론이냐 하는 문제를 보자. 단적으로 말해서 주체철학이 마르크스 철학이 제시하는 유물론을 부정하는 어떤 흔적도 나는 찾을 수 없었다. 적어도 유물론이냐, 아니냐에 관해서는 그 차이를 더 논쟁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으로 본다. 이 점에서는 분명하게 말하지만 두 철학에 근본적 차이는 없다. 

2)

그러나 유물론을 받아들이면서도, 해석하는 데서 부분적인 차이는 있는 것 같다.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종교에 관해 대단히 경멸적이다. “종교는 아편이다”는 마르크스의 말이 자주 인용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반면 주체철학의 경우 종교에 대해 비판적이면서도 이를 포용하려는 여러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한두 가지 예만 들어보자.

천도교 신자인 리창선을 항일유격대에 받아들이는 것과 관련해 논쟁이 벌어졌을 때였다. 한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종교쟁이가 빨찌산을 하면 얼마나 잘하겠습니까... 종교는 아편이라구요.” 그러나 김일성 주석은 그를 받아들이자고 하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마르크스의 명제… 그 명제는 종교적 환상에 유혹당하는 것을 경계하라는 의미에서 한 말이지, 종교인 일반을 배척하라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애국적 종교인이라면 그가 어떤 사람이건… 손을 잡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종교의 자유에 관한 조국광복회 강령이)통일전선의 그물 속에 종교인들을 끌어넣기 위한 하나의 일시적인 회유책이라고 외곡선전하고 있다.… (항일 종교인들과)친교는 순결한 애국애족의 감정에 기초한 것이었지… 나는 그들을 마르크스의 신봉자로 만들려고 시도해 본 적이 없으며… 다만 진정으로 그들의 신앙심을 존중했다.” 

▲ 북한(조선) 평양시 광복거리에 있는 칠골교회. 외국 참관단이 교인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사진 : 구글검색]

3)

이와 같은 주장에서 드러나는 포용적인 태도를 유물론적인 입장에서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이런 포용적 태도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종교가 가진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이해함으로써만 설명될 수 있지 않을까?

종교는 한편으로 사회적 도덕을 옹호한다. 때로 그것은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도덕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기존 사회의 지배질서를 정당화한다. 다른 한편으로 종교는 인간의 도덕의지를 고양한다. 그런 도덕의지를 고양하는 방식은 주로 사후의 처벌과 보상이라는 율법주의적 방식에 의존한다.

예를 들어 기독교를 보자.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다. 이때 사랑이란 곧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몸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의지이다. 그런 기독교는 사회적으로 자주 지배계급을 옹호한다. 지배자는 신의 대리인, 신의 수단이다.

그것은 유교도 마찬가지이다. 유교는 한편으로 인(仁)을 강조한다. 나는 유교적 인이 타인에 대해 자연스럽게 공감하는(sympathy) 능력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유교는 봉건적 질서를 옹호해왔다. 유교는 봉건 지배자를 부모와 같은 존재라고 주장한다. 즉 충효가 일치한다.

기독교의 사랑이나 유교에서 인은 인간의 탁월한 도덕적 의지를 말한다. 그 의지는 사회 공동체를 구성하는데 불가결한 의지이다. 그런데 기독교나 유교는 다 같이 봉건적 질서를 옹호해왔다. 억압과 차별이 종교의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요즈음 자본주의 시대에서도 기독교와 유교는 억압을 강화하는데 기여해왔다. 이승만 시대 자유당은 기독교인 중심이었다. 박정희 시대 유교사상은 유신체제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교육의 핵심이었다.

억압적 질서를 옹호하는 측면에서 많은 사람들은 종교를 비판한다. 그러나 사회 공동체의 도덕적 의지를 강조하는 측면에서 종교는 아름답지 않는가? 만일 종교가 열린 자세를 가지고, 다가오는 사회를 옹호한다면, 종교가 민중과 민족을 위해 앞장선다면 이런 종교는 유물론자도 기꺼이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종교가 아닐까?

4)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종교를 믿는 대부분의 대중이 가난하고 소외받는 민중이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이런 민중이 종교적 믿음을 갖게 된 것은 그들의 사회적인 조건 때문이 아닐까? 앞에서 언급했지만 나도 군대에 있을 때 종교적 믿음에 빠질 뻔했다. 종교적 믿음은 그런 조건의 산물이다. 헤겔은 이를 ‘정신의 자기소외’라고 설명했다.

민중의 믿음이 이럴진대, 현실의 사회적 조건을 그대로 둔 채 종교적 믿음은 아편이라 하면서 설득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차라리 종교적 믿음으로 가도록 만든 그 아픔에 공감하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그런 아픔을 공감한다면 그 믿음을 이해할 것이다.

이 경우 민중과 함께 신의 존재를 믿자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아픔을 함께 느끼자는 것이다. 즉 그 믿음을 존중하자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들의 사회적 조건을 바꿀 수 있는 새로운 사회의 전망을 그들에게 설득하는 것이 적절한 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