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의 망상인가, 미국의 배신인가

[쿼바디스, 한미동맹] (4) 러일전쟁과 가쓰라-테프트 밀약

2018-10-22     장창준 정치학박사

동아시아 질서가 또 다시 요동치고, 한반도 주변 국가들의 각축이 본격화되고 있다. 구한말의 격변기, 한국은 식민과 전쟁을 경험했다. 해방 직후의 격변기, 한국은 분단과 전쟁을 경험했다. 놀랍게도, 동아시아 질서가 요동치는 매 격변기에 한국의 선택은 미국이었다. 미국에 의지해 우리의 살길을 도모하고자 했던 노력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셈이다. 과거와 다른 선택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것은 있다. 한미동맹, 이대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저자]

1. 연재를 시작하며: 한국은 정상국가인가?
2. 조미수호통상조약: 이홍장이 주도한 조선 최초의 근대조약
3. 고종, ‘아름다운 나라’ 미국에 현혹되다
4. 러일전쟁과 가쓰라-테프트 밀약: 고종의 망상인가, 미국의 배신인가
5. 맥아더 포고령: 해방군인가 점령군인가
6. 국공내전: 일본과 한반도의 운명이 바뀌다
7. 한국전쟁과 미국: “고맙게도 한국전쟁이 터져주었다”
8. 자발적 사대근성과 한미동맹의 실상: “독립국가가 아니군요”
9. 북한의 핵개발과 남북미 삼각관계: 동맹의 존재 이유를 묻다
10. 2017년 한반도 미사일 위기와 한미 동맹: 동맹, 딜레마에 빠지다
11. 쿼바디스 한미동맹: 굳건한 동맹은 더 이상 없다!
12. 나오며: 탈동맹, 한반도 평화의 새로운 길

트럼프의 ‘승인’ 발언과 한미관계 

얼마 전 트럼프의 승인(approval) 발언이 논란이 되었다. 우리 정부가 5.24조치 해제를 검토하고 있다는 발언에 대해 미국의 대통령 트럼프가 “우리의 승인 없이 그들은 아무것도 못할 것이다(They do nothing without our approval)”라고 했다. 

해석이 분분했다. 누군가는 트럼프의 발언이 내정간섭이라고 격분했다. ‘승인’은 결국 ‘결제’를 의미하는 것인데 한 나라의 주권을 침해하는 발언이라는 것이다. 또 누군가는 트럼프가 말한 승인의 대상은 ‘5.24조치’가 아니라 미국의 대북 제재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일부 보수정치세력들이 트럼프 발언의 진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않고 문재인 정부의 외교 무능을 부풀리고 있는 데 대한 비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엔 부질없는 주장들이다. 문재인 정부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5.24조치 해제 혹은 유예를 결정한다면 트럼프의 발언은 내정간섭이 될 수 없다. 설령 내정간섭을 목적으로 했다 하더라도 우리가 간섭받지 않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트럼프의 발언이 내정간섭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우리 정부의 하는 바에 좌우된다. 

트럼프의 발언이 5.24조치를 대상으로 한 것이냐, 미국의 대북 제재를 대상으로 한 것이냐 하는 논란도 허무하기는 마찬가지다. 미국의 법이 국제법은 아니다. 미국의 대북 제재를 준수할 것인가, 어길 것인가는 한국 정부의 선택이다. 트럼프의 발언이 미국의 대북 제재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내정간섭적 발언’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핵심은 미국에 대한 한국(정부여당과 야당, 그리고 언론의 논조와 대중들을 포함하여)의 태도이다. 트럼프의 발언이 한국의 주권을 훼손하는 발언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정부여당이 되었든, 야당이 되었든, 언론 혹은 지식인이 되었든 이같은 주권 훼손 발언에 분명한 한국의 입장을 전달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목소리는 크게 들리지 않았다. 여전히 ‘한미 공조 강화’ 타령뿐이다. 

발언 초기 지배적이었던 비판여론 역시 며칠이 지나자 잠잠해졌다. 한미관계가 원래 그렇지 않았냐 하는 체념적 분위기의 반영이리라. 한미관계가 원래 그러했으므로 트럼프의 발언 역시 그 이상이나 그 이하의 의미가 아닌 것으로 치부되어 버린 것이다. 

비록 더디거나 성에 안차는 부분은 있을지언정, 2018년 들어 남북관계와 북미관계는 과거와 다른 새로운 상황을 맞고 있다. 그러나 한미관계는 여전히 그대로이다. “어디 가서 훈련하라는 거냐”는 한미 군사연습 중단으로 미군의 훈련장이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볼멘 소리가 미군 고위장성의 입에서 흘러나와도 ‘그런가 보다’하고 지나간다. 남과 북이 사실상 종전을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북한(조선)이 남침을 할 가능성이 상당히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방위비분담금을 얼마나 올릴 것이냐 하는 협의가 한미 사이에 진행된다. 

구한말 고종을 위시한 위정자들의 사대의존적이고 비현실적인 대미 인식은 10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한국 사회의 발목을 잡고 있다. 

미-스페인 전쟁: 미국, 열강 대열에 합류하다

미국의 아시아 정책은 1898년 미-스페인 전쟁 이후 급변한다. 그전까지 고종을 위시한 조선의 위정자들이 갖는 대미 인식이 틀렸다고 볼 수 없다. 미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조선에 우호적이었다. 1000년 넘게 조선을 속국으로 인식해왔던 청나라, 청일전쟁 이후 조선 침략 야망을 드러낸 일본, 조선을 놓고 일본과 경쟁을 벌이고 있던 러시아에 비해 미국은 조선에 대한 야심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러나 미-스페인 전쟁에서 괌과 필리핀을 장악한 뒤 미국은 달라졌다. 이제 미국은 아시아에 대한 보다 깊고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갖게 되었다. 다른 열강들이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미국은 아시아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꾀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다른 열강에 비해 후발 제국주의 국가였다. 미국이 아시아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꾀해야 하는 바로 그 시점에 다른 열강들은 이미 아시아 특히 중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청일전쟁의 결과 대련과 뤼순을 일본이 점령하자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삼국간섭으로 일본을 요동반도에서 몰아냈던 것처럼, 다른 열강들의 연합으로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려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 미국은 대단히 운이 좋은 나라였다. 1898년부터 청나라에서 의화단 운동이 크게 일어났고, 의화단은 베이징까지 진격하여 열강들의 공사관을 파괴하고, 외국인들을 살상하며 위협했다. 선발주자, 후발주자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중국에 진출해있던 모든 열강들은 연합을 형성해 의화단을 진압했다. 가장 후발주자였던 미국은 다른 나라의 견제 없이 중국에 진출한 열강 대열에 합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프랑스 신문인 ‘르프티 주르날’이 1904년 6월19일 러일전쟁 당시의 전투장면을 묘사해 게재한 그림이다.

러일전쟁: 미국, 영일동맹과 손을 잡다 

1895년 일본은 청나라와 전쟁에서는 승리했으나 러시아를 필두로 한 삼국간섭에서 처참한 패배를 맛보았다. 일본은 전투에서 승리를 위해서는 외교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얻었다. 즉 자신을 지지해줄 수 있는 동맹국의 필요성을 각인한 것이다. 

영국 역시 러시아의 동진을 저지할 수 있는 우군이 필요했다. 의화단 사건 이후 러시아는 철도 경비라는 명목으로 만주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러시아의 동의 없이는 청나라 군대가 만주에 파병할 수 없고, 만주에서의 철도 운영권과 채굴권을 타국에 양도할 수 없다는 청나라의 협정을 통해 만주에서의 배타적 권리를 획득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만주 진출은 중국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영국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1902년 영일동맹이 체결된 이유였다. 특히 영일동맹은 러시아와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던 일본에게 큰 자산이 되었다. 우군을 얻은 일본은 1904년 2월8일 러시아를 선제공격함으로써 러일전쟁에 불을 당겼다. 

전황은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1904년 12월 일본은 10여 개월간의 혈전 끝에 대련과 뤼순을 점령할 수 있었다. 대련과 뤼순을 지키기 위해 러시아의 흑해함대가 출격했으나 영국의 반대로 흑해함대는 수에즈운하를 통과하지 못해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가는 기나긴 항해를 해야 했다. 그러다 흑해함대는 아프리카 남단에 도착했을 때 대련과 뤼순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해야 했다. 일본은 만주의 중심인 봉천에서도 러시아를 격퇴했다. 일본군을 피해 블라디보스톡을 향하던 흑해함대는 쓰시마 일대에서 일본 해군의 공격을 받고 전멸했다. 

그러나 일본은 상처뿐인 승리였다. 병력 손실이 너무 컸다. 일본 경제 역시 파탄 직전으로 몰려 전비 조달이 수월치 않았다. 전쟁을 계속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반해 러시아는 비록 만주의 상당한 지역을 일본군에 빼앗겼으나 여전히 강력한 육군이 존재했고, 육군을 이동시킬 수 있는 시베리아 철도가 깔려 있었다. 군비 역시 충분했다. 일본은 전쟁을 멈추고자 했고, 러시아는 전쟁을 계속하고자 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미국의 대통령 루스벨트였다. 이미 루스벨트는 부통령으로 있던 1900년 “나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차지하기를 바란다. 그러면 일본은 러시아를 저지하게 될 것이고, 이제까지 해온 것으로 보아 일본은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고 발언함으로써 러시아 견제에서 영일동맹과 같은 이해관계를 보였다. 일본이 봉천을 점령하고, 흑해함대를 격파한 뒤 루즈벨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러일 중재에 착수했다. 전쟁을 지속할 수 없었던 일본은 중재를 환영했고, 전쟁을 지속하고자 했던 러시아는 중재를 거부했다. 루스벨트는 일본이 러시아에 전쟁 배상금을 청구하지 않는다는 신의 한수를 던졌다. 러시아는 이 제안을 거부할 수 없었다. 

1905년 9월5일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러일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런데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러시아는 일본국이 조선에서 정치, 군사, 경제적 우월권이 있음을 인정하고 또 조선에 대해 지도·보호·감독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는 게 그것이다. 러일전쟁이 결국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놓고 벌인 것이므로 전자는 이해된다. 그러나 후자, 즉 조선에 대한 보호조치권이 러일 강화조약에 포함된 것은 어찌된 영문인가. 

▲ 서울 중구 덕수궁 중명전 내부에 을사늑약 체결 장면이 재현되고 있다. [사진 : 뉴시스]

을사늑약: 미일영의 합작품 

포츠머스 조약보다 한달 앞선 1905년 8월12일 영국과 일본은 2차 영일동맹을 체결한다. 그런데 여기서도 이상한 대목이 보인다. “일본국은 조선에서 정치상, 군사상, 경제상 특별한 이익을 가지고 있으므로 대영제국은 일본국이 이 이익을 옹호 증진하기 위하여 정당하다고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도, 관리 감독, 보호 조치를 조선에서 취할 권리를 갖는다”는 대목이 그것이다. 포츠머스 조약에도 담겨있는 조선에 대한 일본의 보호조치권이다. 

2차 영일동맹과 포츠머스 조약에 앞선 1905년 7월29일 아래와 같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이 체결되었다. 

1. 필리핀은 미국과 같은 친일(親日)적인 나라가 통치하는 것이 일본에 유리하며, 일본은 필리핀에 대해 어떠한 침략적 의도도 갖고 있지 않다.

2. 극동의 전반적 평화의 유지에 있어서는 일본·미국·영국 삼국 정부의 상호 양해를 달성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며, 사실상 유일한 수단이다. 

3. 미국은 일본이 조선에 대한 보호권을 확립하는 것이 러일전쟁의 논리적 귀결이고, 극동(極東)지역의 평화에 직접 공헌할 것으로 인정한다. 

여기서도 일본의 조선에 대한 보호권이 명시되어 있다.

이제 정리해보자. 미일 밀약과 2차 영일동맹으로 미국과 일본, 영국은 조선에 대한 일본의 보호권을 확약했다. 이에 기초해서 러일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포츠머스 강화조약은 미국과 일본, 영국의 정치적 합작품이다. 루스벨트는 포츠머스 강화조약을 중재했다는 구실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미국의 배신? 고종의 망상!

▲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왼쪽)와 가츠라 다로(오른쪽)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기정사실화되자 고종은 급해졌다. 1905년 7월6일 고종은 루스벨트에게 밀서를 보낸다. “조선의 주권이 일본에 의해 침해되지 않도록 도와달라”는 밀서였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러일전쟁 직전에 이미 “조선은 아주 미약한 나라이기 때문에 미국이 함부로 간여하다가는 모든 책임을 질 수 있으므로, 냉정한 태도를 가지고 절대 중립을 엄수해야 한다”는 외교지침을 하달한 상태였다. 

미국에 대한 고종의 밀서가 근거없는 것은 아니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은 “만약 다른 나라가 부당하게 또는 업신여겨 모독하는 일을 일으키게 되면 상대방 정부는 그 사건의 통지를 받는 대로 원만한 타결을 가져오도록 주선을 다함으로써 그 우의를 표시해야 한다”고 적었다. 고종은 이같은 통상조약에 근거해 밀서를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미국은 조선을 버린 상태였다. 

1905년 9월19일, 태프트를 태운 미국의 크루즈함선이 제물포에 도착했다. 이 함선에는 루스벨트의 딸인 앨리스도 함께 타고 있었다. 고종은 이들을 성대하게 접대했다. 고종은 태프트와 앨리스를 태운 이 함선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체결이라는 은밀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도, 이들이 제물포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 밀약을 체결한 뒤였다는 사실도 몰랐다. 

미국이 필리핀에서 갖는 권리와 일본이 조선에서 갖는 권리를 상호 인정한 밀약을 체결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자신들을 환대하는 고종과 위정자들을 태프트와 앨리스는 어떻게 보았을까? 낯뜨거운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의 배신이라는 평가는 적절하지 않다. 미국은 자기 이익에 충실했을 뿐이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것도, 1905년 11월17일 을사늑약 이후 열강 중에서 제일 먼저 이 조약을 파기한 것도 미국의 이익이었다. 미국이 조선을 지켜주고 조선의 이익을 실현시켜 줄 것이라는 고종의 믿음이 망상이었다. 

그렇게 조선은 미‧일‧영의 합작과 고종을 위시한 위정자들의 사대의존과 무능력으로 일본의 ‘보호’를 받는 신세가 됐고, 결국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런데 역사는 되풀이되었다.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은 다시 자신의 이익 실현을 위해 한반도에 모습을 드러냈다. 38선 이남의 한반도에서는 미국이 지켜줄 것이라는 망상이 또 다시 지배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