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요호 사건, 미·일 결탁에 의한 조선침략의 시작

다시 정리해보는 미일 침략사 4

2018-06-02     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엄청난 내부 위기에 부딪친다. 불평등한 미∙일 통상조약이 근본 이유였지만, 일본은 이 난관을 ‘큰놈 미국을 뒷배로 삼아, 작은 조선을 침략하는 정한론’으로 극복하려 한다. 미국 역시 제1차 조미전쟁(신미양요)의 실패로 조선을 직접 침략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조선 침략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눈치 빠른 일본은 미국의 의중을 파악하고, 미국과 결탁해 조선 침략의 첨병이 되는 길을 선택한다. 전통적 교린외교를 끝장내고, 정한외교(정한론을 바탕으로 한 조선 침략 외교)를 본격적으로 추진한다. 

1872년 8월 하나부사가 군함 2척을 끌고 부산에 상륙해 제멋대로 초량 왜관을 접수한다. 초량 왜관은 조선 소유였으므로 이는 불법 침략이었다. 대원군 정권은 왜관에 대한 물자공급을 중지하고 경제 봉쇄로 대처하였으며 떼거지로 몰려드는 일본상인을 가차 없이 단속하였다. 우리 역사학계에서는 사소한 문제로, 국교를 단절하게 된 것이 결국 무력침략을 자초한 것 아니냐는 시각이 의외로 많다. 그런데 이런 시각은 전형적인 패배주의적 사고이다. 저들은 어차피 무력침략을 준비하고 있는데 우리가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저자세로 나간들 막을 수 있을까? 싸워보지도 않고 겁부터 먹는 것!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는 호랑이의 거짓말에 속아 하나씩 떡부터 주는 것! 이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일본의 침략 의도를 간파하고 초장에 기선을 제압하는 것이야 말로 적절한 조치였다 대원군 정부의 단호한 대처에 결국 하나부사는 일본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기세등등하던 일본의 정한외교는 일단 무력화되었다.

▲ 초량왜관을 불법 접수한 하나부사 요시모토(왼쪽) 청나라의 이홍장(오른쪽)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한 청나라의 우려와 조선의 사대 투항 정책으로의 변화

그러나 조선의 강경대응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다음 해인 1973년 11월5일 흥선 대원군이 쫓겨나고 조선의 권력은 민비에게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민비 일당은 집권하자, 대원군의 대내외 정책을 완전히 뒤집는다. 특히 쇄국정책을 비난하면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외래 침략자들에게 나라의 문을 열어놓는 개국정책을 실시한다. 특히 민비정권은 일본에 대해서 처음부터 저자세로 투항하듯이 문을 열려고 하였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청나라와 연관이 있다. 1874년 5월 일본은 타이완을 침공하고 그 결과 청∙일 양국에게 조공을 받치던 류큐(오키나와)가 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일본의 속국으로 넘어간다. 청나라는 류큐에 이어 조선마저 일본에게 먹힐 것을 우려하게 된다. 정확히 말하면 청나라가 걱정한 것은 조선의 운명이 아니라, 청의 체면이었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렇게 되면 청나라는 조선을 도울 능력이 없다는 것이 세상에 드러난다. 또 조선이 일본에 넘어가 버리면 조선의 종주국을 자임하는 청의 체면이 바닥에 떨어질 것이 뻔하다.

6월이 되자, 청 정부는 고종에게 비밀편지를 보낸다. 일본의 무력침공에 대항하지 말고 타협하여 평화를 유지하라는 내용이었다. 청은 만일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시 개입하지 않는다고 미리 선수를 치고, 또 조선이 혼자서 일본과 싸움을 벌여 청의 개입력이 없음을 드러나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1석2조의 잔꾀였다! ‘지금 나가사키에는 5000명의 일본군대가 주둔하고 있는데 대만에 출병하였던 군대가 돌아오면 침략 예봉이 조선으로 돌려질 것이다. 프랑스, 미군은 병선으로 일본을 원조할 것이니 조선은 세 나라를 대항해 내지 못할 것이다. 조선 국왕은 깊이 생각하여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 이 편지를 보고 조선 정부가 두려움에 떠는 것은 당연했다. 대국으로 생각하는 청나라마저 일본에게 당하는 판국에, 청이 이렇게 말하는 실제 이유에 대해서 곰곰이 따져볼 여유조차 없었다. 

역사를 공부할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다. 각 나라의 고민과 움직임을 구체적으로 요해하지 않고, 구도만을 보려는 경향이다. 예전에는 당시 청나라와 일본이 대결하고 있는 것만 알았지, 청나라 내부 속사정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임오군란 등 반일투쟁이 일어났는데 대원군을 납치해 간 게 일본이 아닌 청이라는 사실이 의아했었다. 호전적인 일본과 정면 충돌하지 않고 현상 유지를 위한 막후조정. 이것이 이홍장 시대의 청의 일관된 대조선 정책이었다. 어찌보면 지금의 북미대립에서의 중국 모습도 비슷하다. 대국인지 땟국인지. 참 중국스럽다. 

일본에 사대투항으로 정권강화 도모하는 민비 일당

1874년 6월 말 민비 측근, 영의정 이유원은 일본과 국교 교섭의 첫 운을 뗀다. “일본과 이웃으로 살면서 이미 300년 동안에 분쟁도 없이 천백번 사이좋게 지내게 된 것은 예의에 맞게 문건을 쓰고 제 때에 예물을 주어서, 털끝만치도 잘못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3년 사이에 사이가 벌어져서 지금은 문을 닫고 약조를 폐기한 것이나 다름없건만 아직도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라며 일본 외무성의 서계를 받아들이자고 제기한다.

이러한 흐름에서, 민비 일당은 7월23일 우선 근 10년이나 조·일 국교관계를 담당하며 일본의 침략책동을 막기 위하여 현장에서 임무를 성실히 수행한 경상도 관찰사와 동래부사를 철직했다. 왜학훈도(일본과의 통역, 교육을 담당하던 정9품 문관) 안동준에게 조일관계 악화의 책임을 넘겨씌워 그의 목을 잘라 왜관 앞에 매달았다. 이어 신임 왜학훈도 현석윤을 시켜 부산 왜관에 와있던 모리야마와 만나 국교 재개의 의사를 전달하고 8월에는 일본 외무성의 외무경이 조선 예조판서에게 공식 문서를 보내는 문제들을 합의하였다. 9월, 금위대장 조영하가 왜관에 직접 가서 모리야마를 통하여 일본에 비밀편지를 보낸다. ‘조일 외교관계의 잘못은 조선 정부에 있으므로 앞으로의 관계 개선을 위해 정부는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겠다.’ 전형적인 사대 투항적 굴욕외교의 적나라함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런 비굴함은 당연히 일본의 침략의도를 더욱 조장하게 된다. 일본은 편지를 받고 1875년 1월 외무성 이사관의 직분으로 모리야마를 보내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 나라 왕(조선 국왕을 말함)과 우리의 태정대신, 우리의 외무경과 그 나라의 예조판서를 대등한 지위로 삼고 옛 우위를 맺자고 제기해도 조선은 동의할 것이다.’ 즉 조선의 국왕을 일본의 태정대신과 같은 급으로 취급해, 모욕을 주어도 조선이 반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이때 모리야마가 들고 온 외무성 서계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내용이었고 조선 조정에서는 대신들의 반발로 또 다시 접수를 거부한다. ‘대일본’, ‘황상’이라는 단어가 들어있고, 원문이 일어로 쓰인 것 등을 아무리 일본과 대충 수교하는 게 좋다지만 이런 굴욕은 참기가 어려운 게 당연하다. 

그런데 이런 굴욕외교는 단지 청의 충고 때문 만이었을까? 조선 정부 내에서는 외세를 끌어들여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높이려는 움직임은 없었을까? 만일 그런 외세 의존 사대주의 세력과의 결탁이 없다면 제아무리 청의 충고가 있더라도 그렇게 형편없이 일본에 굴욕적으로 국교를 재개하자는 시도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민비 일당은 일본과 결탁하여 어떤 이익을 노렸을까? 1874년 2월 민비는 두 번째 아들을 낳는다. 대원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기는 했지만, 조정 내에 대원군의 영향력은 강하게 남아 있었다. 민비는 당시 8살이던 후궁 영보당 이씨의 소생 완화군이 세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강했으며, 청의 힘을 빌려서라도 세자 책봉을 매듭지으려 했다. 1875년 민비는 청나라의 서태후와 이홍장에게 세자 책봉을 도와달라며 100만금의 뇌물을 바쳤다. 또 민비 일파인 이유원은 부산에 와있던 외무성 관리와 비밀리에 만나 청나라 주재공사 하나부사를 통해 세차 책봉을 교섭해 준다면 일본과 통상조약을 체결할 것이라고 제기하였다. 이항복의 후손인 이유원은 세자 책봉을 위해 일본과 결탁, 청에 작용한 역할을 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때 이유원은 이렇듯 원칙 없이 일본과 통상조약을 체결한 것이 결국 조선을 식민지로 떨어뜨리게 되는 초기 문턱이었음을 알기나 했을까? 

조선의 강경한 태도에 모리야마는 무력으로 조선을 굴복시켜야 한다고 판단한다. 1875년 4월 일본 정부에 조∙일 협상결과를 보고하면서, 무력으로 국교재개를 이룩할 제안서를 올린다. “만일 훗날 대원군이 득세하여 약속을 이행하지 않게 된다면 우리도 힘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는 사태가 올 것입니다. 지금 저들이 서로 싸우고 쇄국파가 세력을 되찾지 못하고 있을 때 적은 힘을 들여 목적을 이루기는 용이합니다. 지금 군함 한두 척을 급파하여 쓰시마와 이 나라 사이를 드나들게 하고 숨었다 사라졌다 하면서 해도를 측량하는 체 하여 우리가 의도하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게 하는 한편 가끔 우리의 협상처리를 지연시키는 것을 핑계 삼아 위협적인 언사를 쓴다면... 국교 체결상 웬만한 권리를 얻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힘을 그들에게 행사할 수 있는 절호의 시기는 바로 지금입니다.” 

드디어 감행되는 일본의 포함외교, 운요호 도발!

일본은 4월21일 운요호 등 세 척의 군함을 해역측량과 군사연습이라는 명목으로 조선 동남연해 일대에서 무력시위를 감행하였다. 왜학훈도 현석운이 항의했지만 일본은 해외에 파견된 일본 관리들에게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서 군함을 보낼 수 있으며 군함은 전투에만 사용한다는 잘못된 관념을 버리라고 떠벌렸다. 조선의 별다른 항의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모리야마는 일본 정부에 군함을 더 보내줄 것을 요청한다. 이에 따라 일본은 5월 상순에 군함 다이니데이묘 호를 부산에 침입시켰다. 모리야마는 18명의 조선 관리들을 초청하여 군함 견학을 권고하기도 하였다. 정부 관리들이 군함에 오르자 이른바 군사연습이라는 구실 밑에 사방에 함포사격을 감행한다. 또 영흥만에 들어와 각종 군사 정탐 행위를 감행한 후 나가사키로 돌아갔다.

▲ 운요호 강화도 침입

이처럼 조선에 대한 사전 조사를 마친 운요호는 조선에서 충격적인 사건을 일으키라는 밀명을 받고 1875년 8월20일(음력) 월미도 앞바다에 침입하였다. 일본 국적을 나타내는 깃발도 달지 않고 인천 월미도 앞바다로 들어왔으며 21일 아침에는 초지진 앞 700m에 정박한다. 또 함장 이노우에는 선원 20명과 작은 배로 초지진 포대 앞까지 음료수를 얻겠다는 구실 밑에 접근하자 초지진 군사들이 포사격으로 대응한다. 일본은 계획한대로 운요호에 불 신호를 보내어 배 마스트에 일본 기를 띄우게 한 후 운요호에 올라 철수하였다. 22일 ‘조선군사가 불의에 우리를 포격하였으므로 조선포대를 향하여 그 죄를 묻는다’면서 초지진을 공격한다. 초지진 포대는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심한 조건에서 상륙이 불가능하자, 항산도를 포격 민가를 불살랐다. 또 23일에는 영종도를 3면으로 포위 공격 점령한다. 일본은 조선 군대의 포탄이 미치지 못하는 700m 밖에 운요호를 세우고 영종진 포대를 완전히 파괴한 다음 성안에 들어가 주민들을 살육하고 재산을 약탈했다. 조선 정부는 일본의 야만적인 침략에 항의도 못하고 영종진 첨사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여 사건을 무마하려 하였다. 적반하장으로 일본이 이 사건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며 조일 수호협상을 강요할 때까지 조선 정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 사건을 모르쇠하며, 일본에 어떤 항의도 하지 않는다!!! 이런 조선의 투항주의적 자세는 당연히 일본의 조선 침략책동을 더욱 강화하도록 만든다. 다음번 칼럼에서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강화도 조약을 맺는 과정, 이에 대한 미국이 일본에 어떻게 세세한 가르침을 주었는지에 대하여 이야기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