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을 보다

2018-05-22     이병창 동아대 명예교수

* 글에는 영화의 줄거리가 노출돼 있습니다. 

1) 하루키

이창동 감독이 정말 오래간만에 새로 영화를 내놓았다. 그는 한국의 리얼리즘 영화의 거의 독보적 존재이다. 그는 인간의 전형을 정말 예리하게 파악한다. 이런 리얼리즘적인 사고는 이번 영화에도 예외 없이 드러난다.

이창동의 신작 <버닝>은 하루키의 단편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기초로 했다고 들었다. 세 명의 인물이 나오고, 헛간을 태운다는 테마가 반복되고 여자 주인공이 흔적 없이 사라진다는 것은 유사하다.

그러나 하루키의 원작은 포스트모던한 구석을 갖고 있지만 이창동의 영화는 이와 전혀 느낌이 다른 리얼리즘의 스크린 위에 투사되었다. 그것을 위해 이창동 감독은 하루키의 설정을 변경했다.

‘나’, 즉 화자와 여자 주인공, 그리고 새로운 애인의 위치가 다르다. 하루키의 경우 나는 서른 한 살이고 결혼한 남자고 세상이 시들하다. 나는 ‘그녀’를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만나 애인이 되었다. 그녀는 스무 살이고 그녀가 알제리 여행에서 만난 애인은 이십대 후반이다. 그녀의 애인은 탄탄한 몸집에 부유한 남자이다.

반면 이창동 감독의 경우 화자는 여자 주인공 해미와 고향 친구이다. 두 사람은 이제 막 20대에 들어섰을 것이다. 나는 소설가가 되려고 습작을 하고 있다. 강하지만 입술을 늘 벌린 채 행동하고 촌놈 티가 몸에 배어 있다. 반면 해미가 남아프리카 케냐를 여행했을 때 만난 새로운 애인은 서른 살이 좀 넘은 남자이지만 도시적이고 여린 듯 보인다. 그래도 부자다. 

2) 여자 주인공

하루키에서 나와 그녀의 애인을, 이창동에서 나와 그녀의 애인과 비교해 보면 위에서 보듯 설정이 반대로 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보다 중요한 것은 여자 주인공에 대한 설정이다.

하루키의 경우 여자 주인공은 광고모델이고 팬터마임을 즐기며, 귤껍질 벗기는 마임을 한다. 그녀는 유두가 드러나는 옷을 입는다. 하루키는 여자 주인공의 성격을 그 이상으로 밝히지는 않는다. 이름도 밝히지 않으며 모든 행동이 단순하다는 것만 언급된다.

하루키의 묘사를 통해 볼 때 그의 여자 주인공은 포스트모던하다. 그녀는 욕망이 시키는 대로 단순하게 살아가는 존재로 보인다. 다만 가상에 빠져드는 능력만은 그녀에게 어떤 감추어진 능력이 있음을 말하지만 하루키에게서 그런 능력은 더 깊게 천착되지 않는다.

이창동 감독은 여자 주인공의 성격을 설정하기 위해 꼼꼼하게 노력한다. 물론 하루키의 주인공과 서로 유사한 점이 있다. 이창동 감독의 여 주인공은 모델은 아니지만 광고를 위하여 춤추는 여자이다. 그녀는 극중 대사에 나오는 것처럼 창녀처럼 옷을 벗고 춤을 춘다. 그녀 역시 욕망을 지닌 존재이다.

그녀 역시 하루키의 주인공처럼 팬터마임을 배우고 가상을 실제로 여긴다. 그녀도 귤 까먹는 마임을 즐긴다. 그런데 가상의 의미가 좀 다르다. 그녀에게서 가상은 포스트모던하다기보다 오히려 모던하다. 가상은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 무구별적인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진실을 드러내는 길이다.

그런 진실은 두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드러난다. 그녀는 고양이를 기르고 있다. 아무도 믿지 않지만 그 고양이는 진실이다. 또 그녀는 어릴 적 우물에 빠진 이야기를 기억한다. 그녀의 부모, 언니는 그런 말을 지어냈다고 하나, 그건 사실이다.

하루키 원작의 여자 주인공은 이름이 없다. 그러나 이창동 영화에서 여 주인공은 더 깊은 진실을 추구하기에 이제 이름을 지닌다. 해미다. 이름을 지니게 되면 역사를 갖게 된다. 현실의 두려움과 구원의 기대가 엇갈린다. 이창동 감독은 주인공을 둘러싼 두려움과 구원의 후광을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촘촘하게 집어넣는다.

그녀의 방에는 남산 타워에 반사되어 하루에 한번 정도만 햇빛이 비친다. 그녀는 어릴 때 우물에 빠져 동그란 하늘만 바라보고 울었다는 말을 한다, 그녀는 아프리카에서 쓰레기 더미에서 해가 지는 광경을 묘사하면서 울먹거린다. 그리고 죽는 것은 두렵고 그저 사라지면 좋겠다는 말을 한다. 그녀는 아프리카 케나 원주민으로부터 춤을 배웠다. 그 춤은 육체의 작은 배고픔에서 영혼의 큰 배고픔을 표현하는 춤이다.

이런 설정들이 하루키의 다른 소설에서 빌려온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런 설정을 이창동 감독이 집어넣은 의미는 분명하다. 그녀는 현실에서는 주변에 밀려난 존재이며, 그 때문에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러나 그녀의 내면에는 영혼의 갈망이 있으며 그 갈망은 그녀의 몸에서 자연히 솟아난다.

3) 헛간

하루키의 원작이나 이창동 감독의 <버닝>이나 헛간을 태운다는 테마는 반복된다. 하지만 그 의미는 다르다. 영화에서는 윌리엄 포크너가 언급되면서 포크너의 <버닝>이라는 소설을 소환한다. 여기서도 헛간을 태운다.

헛간을 태우는 행위는 동일하지만 각기 그 의미는 다른 것으로 보인다. 우선 윌리엄 포크너의 <버닝>에서, 현실에서 무기력한 농부는 자신의 힘을 드러내기 위해 상대방의 헛간을 태운다. 무의미한 저항을 의미한다. 포크너는 농부의 아이의 시선을 통해 농부의 분노와 무기력을 동시에 드러낸다.

하루키의 소설에서 헛간을 태우는 것은 실제라기보다 비유적으로 사용된다. 실제 예상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면 알제리 애인이 여자 주인공을 죽인 것인가? 그러나 이 행위가 여자 주인공의 사라짐과 직접 연관을 지닌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아마도 그녀를 죽였을 것이라 의심받는 알제리 애인이 오히려 화자인 나에게 그녀의 소식을 묻기 때문이다.

소설의 끝에 화자인 나 역시 헛간을 태우고 싶은 욕망을 얻는다. 그렇다면 알제리 애인의 헛간을 태우는 행위, 그녀의 사라짐, 그리고 내가 새로 얻는 욕망은 모두 서로 공명한다. 그것은 세상에서 사라짐, 아름다운 저녁놀처럼 사라지는 죽음의 충동으로 보인다. 이런 죽음의 충동은 하루키의 소설 곳곳에서 드러난다.

하루키가 이 소설에 슬쩍 언급하는 새로운 윤리로서 ‘동시적 존재’라는 개념이 이런 상호 공명하는 태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이창동 감독의 경우는 다르다. 여기서는 여러 가지로 보아 케냐에서 만난 애인 벤이 그녀를 살해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인 나는 그녀를 위해 복수한다. 내가 복수를 하는 것은 그녀가 유일하게 나를 믿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의 관계, 고향이라는 개념들이 이창동의 <버닝>을 하루키의 소설로부터 구분한다.

그럼 벤이 그녀를 살해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헛간이기 때문이다. 산업화 시대에 용도가 폐기된 존재가 헛간이다. 벤은 산업화를 상징한다. 벤은 모던의 도덕적 의무에 따라 그녀를 제거했을 뿐이다. 이 지점이 이창동 감독의 강력한 휴머니즘적인 요소가 드러나는 지점이다.

이창동 감독은 사라지는 헛간과 같은 존재 속에 새로운 가능성을 본다. 그런 존재는 진실을 보며, 그 속에는 아름다운 생명력이 파득거린다. 이창동 감독은 산업화로 말살되는 그런 헛간과 같은 존재의 부활을 꿈꾼다. 이창동 감독은 <밀양> 이래로 한줄기 비추는 햇빛에 집착한다. 그 빛은 고요하다.

마지막으로 입을 벌린 채로 행동하는 연기를 한 유아인과 파득거리는 생명력을 울먹거리며 연기한 신인 여배우 전종서의 연기를 칭찬하지 않고서는 이 글을 끝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