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미국과의 결탁으로 현실화되는 일본의 조선침략

다시 정리해보는 미일 침략사 3

2018-05-17     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미국은 1871년 조미전쟁(신미양요)에서 빈손으로 물러가야 했다. 하지만 중국 침략을 위해 조선을 포기할 수 없었던 미국은 이후 일본과 공모하는 전략으로 조선 침략을 추진한다. 1854년 페리 제독의 포함외교로 미일 수호통상조약이 이미 맺어져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먼저 미국에게 꼬리를 흔든 것은 일본이었다. 1866년 미국 서면호의 평양 침공이 실패하자 이듬해 도쿠가와 막부 정권은 주일 미 대리공사에게 각서를 보낸다. “조선이 이를 데 없는 무의망동을 벌려 친선동맹관계를 가지는 미국인을 살해하니 우리 대군은 통탄하고 있다.… 일본이 외교사절단을 파견하여 조미관계를 중재하여 미국 국기를 조선에 휘날리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그해 11월 미 국무장관 시워드는 이 제안을 수락하였지만 막부 정권이 메이지 정권으로 바뀌어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메이지 정부에서도 이러한 정책 기조는 이어진다.

일본의 조선침략을 위한 사상전 <정한론>과 <정한외교>에 의한 조일국교의 단절

지난번 칼럼에서 전통적 조-일 교린외교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조선멸시론>을 언급하였다. 이는 조선침략을 위한 <정한론>으로 발전한다. 당시 막부체제는 농민봉기와 도시빈민폭동이 꼬리를 물고 발생하여 위기에 처했다. 또한 미일 통상조약으로 반식민지 예속국가로 떨어질 위협이 높아졌고, 민중의 분노도 높아져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한론이 급속히 정립되면서, 막부체제의 위기를 일단 봉합한다. 이는 국가적 위기가 조성될 때마다 해외침략으로 모면해온 사무라이의 호전적인 국수주의 침략 전통이기도 했다.

국가적 위기를 해외침약으로 찾으려는 흐름은 사무라이 출신의 일부 군벌과 봉건귀족, 관료들이 일으킨 메이지 유신으로 가속화된다. 메이지 유신은 국가가 주도하는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기 위하여 통치체제를 군국화하는 정책이었다. 번폐지, 천황제 강화, 징병제를 선포함으로써 중앙집권적인 군벌관료체제를 수립하고 특권재벌을 보호 육성하며 고율소작제를 실시하였다. 그러자 사무라이들은 특권적 지위가 소멸됨으로써 불만세력이 변하였고, 농민들의 반정부 운동도 더욱 격화되었다. 

메이지 정부도 이 위기를 <정한외교>의 간판 밑에 조선을 침략하는 것으로 극복하려 했다.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는 근대화와 관료 통치기구의 정비에 필요한 방대한 자금을 침략과 약탈로부터 찾으려는 전형적인 군국주의 정책이었다. 그들은 미국과 유럽열강의 반(半)식민지적 예속을 벗어나는 길도 조선침략에 있다고 보았다. 대표적 정한론자로 일본의 추앙을 받는 ‘요시다 쇼인’의 주장을 보자. 

“러시아와 미국과 강화조약을 맺은 이상 그를 파기하여 신용을 잃을 것이 아니라 규범을 엄격히 지켜 신의를 두텁게 할 것이다. 그 사이에 국력을 길러 빼앗기 쉬운 조선, 만주, 청나라를 종속시킬 것이며 교역을 통해 러시아와 미국에 빼앗긴 손실을 조선과 만주영토를 빼앗아 내는 것으로 보상할 것이다.” 『요시다 쇼윈 전집』

1868년 1월 메이지 정부는 모든 외교권을 접수하고 유럽과 미국 외교 공관들에게 이를 알렸다. 이때 조선과의 외교는 종래대로 일단 쓰시마 번에서 관할하게 한다. 그러면서 쓰시마 번에게 일본 황실의 권위를 손상하는 문구를 쓰지 말 것과 조선 국왕에 대한 일본 천황의 우위를 명확히 하라는 지침을 내린다. 1868년 12월19일 쓰시마 번의 히구씨 데쓰시로 일행은 조선에 일본의 왕정복고를 알리는 서계(조일간의 외교문서)를 가지고 부산왜관에서 조선정부와 공식적인 접촉을 가졌다. 그러나 이는 전통적인 서계 예법을 완전 무시하고, 특히 조선국왕을 격하시키고, 천황을 상위에 놓은 서계였다. 조선이 이를 접수한다면 일본의 하위국임을 인정하는 것이고 접수를 거부해도 국교 단절의 책임을 조선에 넘기게 되는 양수겸장의 술수였다. 

닷새 전인 12월14일 일본 참의 기도 아카요시는 이런 말을 했다. “지금 최대의 당면과업은 두 가지이다.… 그 중 하나는 하루 속히 사절을 조선에 파견하여 그들의 무례함을 문책할 것이며 만일 불복할 때에는 죄를 물어 공격함으로써, 일본의 위력을 뻗히는 것이다.” 『기도일기』 

이것을 보면 공식접촉이 진행되기도 전에 일본은 사태를 예측하였고 이 행위가 계산된 무력책동임을 알 수 있다. 일본은 수차례 조선에 도발적인 서계를 들이대며, 조선침략 명분을 축적했다. 이에 따라 사다 하쿠보의 조선침략방안(1870년 4월), 기도 다케요시의 조선출진 의견서,(같은 해 7월) 야나기와라의 의견서(같은 해 8월), 사이또의 정한건의서(1873년) 등 정한론이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윽고 일본은 조일외교의 사무를 취급하던 부산 왜관의 기능을 일방적으로 폐기시킨 뒤 왜관을 일본 소유로 전환시키려고 획책한다. 부산 왜관은 조선이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운영경비까지 대주며 일본 무역을 보살펴 주던 곳으로 엄연히 조선의 것이었다. 조선은 운영비를 대주면서도 왜관의 관리 책임은 쓰시마 도주에게 맡겼었다. 그런데 일본은 1869년 6월 쓰시마 도주의 조선과의 외교권을 회수한 뒤 1872년 8월 일본 외무성이 고위관리인 외무대상 하나부사에게 부산 왜관을 접수하라고 지시하였다. 1872년 9월 하나부사는 군함 가스가호와 기선 유꼬마루에 보병 2개 소대를 싣고 왜관에 들어온다. 왜관을 강점한 뒤 이듬해 2월 대일본공관이라는 간판까지 내걸자 조선은 왜관에 물자 공급을 중단했다. 결국 하나부사 일행은 일본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조일국교는 단절된다. 국제적 상식도 염치도 없는 이러한 도발은 일본 만의 판단으로는 불가능했다. 뒤를 봐주는 큰놈을 믿고 작은 놈을 공격하는 일본의 군국주의! 도가 넘치는 무모함의 본질은 미일결탁에 있었다! 

가시화 되는 조선침략을 위한 미일 공모

미국은 1870년에 들어오면서 일본의 지정학적 위치와 절대군주 천황제의 호전적인 성격에 주목했다. 미 국무장관 시워드는 “일본과 조선, 청을 서로 이간시켜 일본을 유럽국가의 동맹자로 앞장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첫 시도는 1871년 조미전쟁 준비 과정에서부터 시작된다. 1871년 3월 이후 조선침략(신미양요)을 위하여 미국의 아시아 함대가 나가사키에 정박하던 중 팰러스호 함장 브레그는 일본 외무성에 조선의 정치, 군사 분야에 대한 자료 제공을 요구한다. 일본은 적극 협조했다. 또 당시 부산 왜관에 있던 외무성 관리 요시오카에게 ‘일본은 미국을 도와줄 의무만 있을 뿐’이라며 미국의 조미전쟁에 통역관으로 참전시켰다. 

조선침략을 둘러싼 미일 공모는 신미양요 이후 본격화된다. 미국은 단독으로 조선을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교활한 일본은 큰 놈을 등에 업고 조선침략에 나설 수 있는 유리한 조건임을 간파했다. 일본은 미국이 조선에서 패배하자, 미국의 조선 정책을 알아내려 혈안이 되었다. 

▲ 이와쿠라 사절단이 1872년 런던 체류 중 찍은 사진, 이토 히로부미는 오른쪽에서 두 번째.

1871년 겨울, 일본은 미국 및 유럽 열강과 맺은 불평등 조약 개정을 위해 미국과 유럽을 돌아보는 이와쿠라 사절단을 보낸다. 조약 개정과 근대화 시찰이 표면적 이유였지만 미국에서는 조선 침략 실패 뒤 미국의 조선 정책을 확인하며 자신들의 조선 침략 정책을 구상해보려는 의도가 있었다. 도꾜를 떠나기 직전 기도 다카요시는 “조선에 뻗치려는 무진(1868년. 서계에 의한 정한외교 시작) 이래의 정책은 마침내 이룩되려고 한다.… 전도의 대세를 따지고 공정한 여론을 헤아려 조선과의 국교의 가부를 결정하고 또 미국과는 더욱더 친밀한 교제를 꾀한다”라고 했다. 『기도 다카요시 일기』 

그들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조선 침략에서 일본의 역할에 관한 미국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뻐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워싱턴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분위기를 보니 미국은 또 다시 조선을 직접 침략해보려는 시도는 못할 것 같다.… 워싱턴에 도착하면 결과를 확인할 수 있겠지만 틀림없을 것이다”는 편지를 일본으로 보냈다. 미국의 정부, 국회, 언론 모두 일본 사절단에 대하여 큰 관심과 기대를 아끼지 않았다. 사절단 대표 이와쿠라는 피쉬 미 국무장관과 회담에서 ‘일본이 미국의 조선과 아시아에 대한 문호개방을 적극 협력한다면서 일정한 시기에 일본과 맺은 조약개정에 응할 것’을 확인하였다. 

미국은 일본을 내세워 조선 침략의 길을 닦게 한 뒤 열매를 가로채려는 음흉한 계책에 따라 일본의 침략준비를 적극 돕는다. 1871년 일본 외무성 고문으로 스미스를, 법무성 고문으로 하우스를 보냈다가 1872년 퇴역 장성 리젠드르를 일본 외무성 고문으로 바꾼다. 리젠드르는 고문이 되자마자 ‘일본은 곧 조선을 점령하고 요동지방을 제압하며 대만을 점령하고 중국을 제압해야… 중국을 반달형으로 둘러싸면 러시아의 동방진출을 막을 수 있다’고 떠들었다.

1873년 일본 해군성이 생길 때 군함은 철함 2척, 나무함과 철로 섞은 함선 1척, 기타 목조함정 등 겨우 17척에 지나지 않았다. 또 요람기이던 일본 산업은 불평등조약으로 커다란 타격을 받았는데, 조약 체결 이후 10년 동안 미국의 대일 수출액은 59배, 수입액은 13.7배였다. 미국은 조선침략을 위해 1873년 3척의 군함과 8000만여 발의 탄약을 일본에 넘겨주었다. 미국의 지원은 침략 열에 들떠있으면서도 미약한 경제, 군사력으로 감히 침략의 길에 나서지 못하고 있던 일본에게 노골적인 조선 무력침공을 감행할 수 있게 한 기폭제였다. 1875년 운요호 사건을 조작하고 1876년 강압적인 강화도 조약으로 일본의 조선침략은 본격화된다. 

신미양요 이후 미국은 조선에서 손을 뗀 것이 아니다.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 공모! 두 나라는 조선 침략에서 환상의 짝패였다. 일각에서 일본의 근대화 성공이 메이지 유신의 개혁 성공 덕분이라며 부러워하는 경향이 있지만, 일본의 근대화 성공은 결코 메이지 유신의 개혁 정책 덕이 아니다. 처음부터 미국을 등에 업고 조선을 침략하는 군국주의야 말로 일본의 본질이며 힘의 실체이다. 정한외교에 이어 국교단절, 그리고 운요호 사건으로 포함외교에 의한 강제적 불평등 수교, 또 갑신정변에 대한 일본의 방해책동! 일본의 독점적 지배를 완성하는 청일전쟁, 러일전쟁, 조선의 강제 병합 승인까지! 이 모든 과정의 배후는 미국이었으며, 일본은 미국을 떠나서는 숨도 쉴 수 없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 국민들의 정서는 일본에는 치를 떨어도 미국은 아직 은인의 나라로 알고 있는 분이 태반이고 이제 겨우 실체를 조금씩 자각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우리 민족을 탄압하고 약탈하게 되는 과정과 일본의 사고방식, 미일 결탁과정에 대해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미일의 결탁과 조선침략의 본격화에 대해서는 다음으로 넘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