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제국의 동남아·태평양 침탈사(1) 필리핀, 인도네시아

2018-05-09     김영준 현장기자
▲ 미국-필리핀 전쟁("Battle of Paceo", February 4-5, 1899, Philippine Islands, Kurz & Allison). 1899년~1902년 7월4일까지 필리핀 전역에서 진행된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해 필리핀은 제1공화국이 멸망하고 미국의 식민지가 됐다.[사진 : 위키백과]

필리핀 : 스페인이 물러간 자리를 차지하다

300여 년 동안 스페인의 식민통치를 받아온 필리핀은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독립에 눈뜨기 시작했다. 필리핀의 독립 영웅이자 사상가 호세 리갈은 「내게 손대지 마라」는 저서를 통해 필리핀 민중에게 자주독립 사상을 고취했다. 그러자 스페인 정부는 1896년 호세 리갈을 공개 총살했다. 그의 죽음은 되레 독립투쟁에 불을 지폈다. 

▲미국의 필리핀 점령 : 미국은 1898년 12월 파리조약을 통해 필리핀, 쿠바, 푸에르토리코, 괌 등에 대한 식민 통치권을 이양 받는다. 미국의 계략을 알지 못한 필리핀 민중은 스페인 포로를 미국에 인계하고, 주요 정보까지 제공했다. 하지만 미국은 1898년 8월 스페인 군대가 항복하자 필리핀 해방군의 마닐라 진입을 금하는 조치를 취했다. 

1899년 1월 아귀날도가 이끄는 필리핀 해방군은 미국에 맞서 국가수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아귀날도의 선포는 법적 효력이 없으며, 필리핀의 유일한 합법정부는 필리핀 주재 미 점령군 사령부라고 발표했다. 이어 미국은 12만 병력과 과거 스페인 식민정부 부역자를 투입해 대대적인 독립군 소탕작전을 개시했다. 독립군은 낙후한 전투력과 지도자 아귀날도의 체포로 급속히 약화됐다. 당시 미국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는 “미국의 필리핀 침공은 하느님의 섭리에 따른 것”이라 말했다. 

▲바탕가스 대학살 : 1901년 8월11일, 사마르섬의 바탕가스 마을에 침입한 미군은 상습적으로 강간, 약탈 등을 자행했다. 9월27일 견디다 못한 주민들이 도끼와 칼을 들고 미군 캠프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을 보고받은 미점령군 스미스 장군은 “사마르 전체를 초토화시켜라. 포로로 잡으면 귀찮으니 모두 죽인 다음 태워버려라. 되도록 많이 죽이는 것이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이다”라며 무차별 학살을 명령했다. 협조하지 않는 현지인은 모두 적으로 간주하여 사살해도 좋다는 ‘장군 명령 100호’도 하달했다. 

미군의 만행은 1900년 12월 아서 맥아더(더글라스 맥아더의 아버지) 장군이 현지 미군에게 하달한 “필리핀인에게는 전쟁 규칙을 준수할 필요가 없다”는 내부지침서로도 확인할 수 있다. 1898~1913년 2만 명의 필리핀 독립군과 100만여 명의 민간인이 이런 식으로 집단 학살됐다. 그럼에도 미국의 우스터 장관은, 미국의 점령 덕분에 필리핀 정부가 안정과 발전을 이뤄 맨발의 야만인들이 교육을 받게 되었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훅스(HUKS) 시민군 진압 : 필리핀은 넓은 농경지와 풍부한 지하자원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에 부역한 소수 하수인이 부를 독식해왔다. 그 탓에 대다수 농민은 대지주의 소작농으로 전락해 빈곤을 대물림해왔다. 이는 미국, 일본 지배기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농민으로 구성된 훅스(따갈로그어로 시민군)가 일본군에 맞서 무력 저항에 나섰다. 훅스는 때로 일본군에게 공격 받는 미군을 돕기도 했다. 하지만 미군은 훅스를 무장해제했다. 또 각종 거짓선전을 통해 훅스와 농민들을 이간질했다. 미국에게는 민족윤리와 사회정의를 세우려는 시민군 조직이 일본군보다 더 큰 방해였기 때문이다. 결국 훅스는 와해됐다. 

▲미 제국의 독재정부 수립과 비호 : 1946년 필리핀은 형식적으로나마 독립국가 형태를 갖췄다. 마누엘 로하스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상·하 양원이 구성됐다. 이 과정에서 훅스 지도자 루이스 타룩을 비롯한 몇몇 개혁성향의 인사가 당선되자, 필리핀 정부는 선거법 위반을 이유로 이들을 감옥에 가뒀다. 이들이 의회에 진출할 경우 토지개혁 등이 사회적 이슈로 등장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구성된 필리핀 의회는 천연자원개발권을 미국에게 넘겨줬다. 미국 의회는 필리핀의 천연자원 개발과 공공시설 운영에 대한 미국인의 권리를 법으로 보장했다. 또 필리핀에 23개 군사기지를 99년 동안 미국에 조차하고, 미국의 승인 없이는 외국에서 무기를 구입할 수 없다는 내용의 조약도 체결했다. 필리핀의 소수 지배층은 전기·통신·건설 등 국가 주요 산업을 독점하고 재산을 미국으로 빼돌렸다. 대표적인 예가 마르코스 전 대통령이다. 그는 장기간 독재하며 약 1,000억 달러 재산을 해외로 빼돌렸다. 2차 대전 직후 아시아 부국이던 필리핀이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한 이유 중 하나다. 

▲ 다큐멘터리 영화 "액트 오브 킬링"의 포스터(2012년작.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 대학살을 지도한 안와르 콩고와 그의 친구들은 들뜬 맘으로 시나리오를 직접 쓰고 연기도 하면서 살인의 재연에 자랑스럽게 몰두한다. 하지만 촬영이 진행되면서 대학살의 기억은 그들에게 낯선 공포와 악몽에 시달리게 하고 영화는 예기치 못한 반전을 맞는다.[사진 : 위키백과]

인도네시아 : 좌절된 수카르노의 꿈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는 17세기 초 해상 패권을 장악한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된다. 주변의 크고 작은 섬들을 하나로 묶어 인도네시아라 부른 것도 이때부터다. 19세기 초부터 대규모 독립전쟁을 거쳐, 1920년대에는 인도네시아 공산당과 전국 규모의 노동조합이 결성됨으로써 반제국주의 투쟁이 본격화됐다. 

▲수카르노의 비동맹 자주노선 :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국민당의 수카르노를 수반으로 하는 독립국가를 수립했다. 네덜란드는 독립을 부정하며 식민통치를 주장했다. 양쪽의 무력충돌이 재개됐다. 인도네시아의 좌경화를 우려한 미국이 중재해 인도네시아를 네덜란드의 연방으로 둔다는 데 합의(1949년 12월)한다. 1950년 8월 인도네시아 정부는 연방제 폐지를 선언함으로써 완전히 독립하게 된다. 

수카르노는 워싱턴과 모스크바를 상대로 등거리외교를 전개하면서 국가주권의 수호와 국익 극대화를 위한 비동맹 자주노선을 추구해나갔다. 1955년 4월18일에는 반둥회의를 개최했다. 아시아·아프리카 신생 독립국가에게 비동맹 자주노선을 전파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강대국들의 경제종속 등 신식민지 정책을 경계하지 않는 한 인류의 진정한 평화와 번영은 요원할 것’이라 호소했다. 비동맹 노선은 국제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행보는 미국으로 하여금 수카르노 제거를 결심하게 만들었다. 반둥회의는 제국주의 국가에 굴종해온 약소국에게 독립의식을 고취했고, 이는 1954년 미국의 주도로 창설된 동남아조약기구(SEATO)의 취지에도 배치됐기 때문이다. 

▲미 제국의 반둥회의 방해테러 : 1955년 4월22일 오전 승객 11명과 승무원 8명을 태우고 봄베이에서 홍콩을 경유, 자카르타로 향하던 인도항공 소속 카시미르 프린세스 전세기가 인도네시아 상공에서 폭파됐다. 탑승객 모두는 반둥회의에 참석하려고 자카르타로 향하던 중국, 베트남, 오스트리아 등지의 대표단과 기자였다. 기내에 설치된 시한폭탄의 뇌관은 미국제(MK-3)였다. 폭탄을 설치한 범인은 타이완 국적으로 사건 직후 CIA 전용기를 타고 도주했다. 1975년 미 상원 위원회는 “CIA 간부들이 반둥회의를 무산시키기 위해 참가국 지도자를 암살해야한다는 주장이 있었다”는 증언을 확보했다. 

▲미 제국의 비열한 공작 : 수카르노를 제거하기 위한 공작은 계속됐다. 1955년 인도네시아 선거에서 미 정보기관은 수카르노의 국민당과 그를 지지하던 공산당을 몰아내려고 우익 이슬람 정당인 마슈미당에 100만 달러를 기부했다. 심지어 수카르노의 얼굴을 본뜬 가면을 씌워 포르노 영화를 제작하고는, 수카르노가 난잡한 성생활을 하는 양 유포하기도 했다. 국민적 존경심을 흠집 내기 위함이었다. 

1957년 말부터는 정권 전복을 위한 비밀군사작전에 돌입했다. 이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 닉슨 부통령이 주재한 비밀 국가안보위원회의 5412/2호의 결정에 따른 것이다. 실무 총괄을 담당한 CIA 부국장 위스너는 싱가포르에 작전본부를 설치했다. 미군, 필리핀 특공대, 그리고 수만 명에 달하는 현지 반군이 필리핀 민다나오섬 다바오시 외곽 기지에서 훈련을 받았다. 수송기, 폭격기, 미사일 등 각종 화기는 타이완·필리핀·오키나와 미군기지에서 조달했다. 

1958년 2월9일 미국은 인도네시아인 말루딘 심보론을 내세워 반란을 시도했다. 수마트라 혁명위원회를 구성한 뒤 수마트라섬을 중앙정부로부터 독립시킨다는 구상이었다. 그러나 반란은 인도네시아 정부군에 의해 실패한다. 미국은 실패의 원인을 군부의 충성심에 있다고 파악했다. 정면돌파 전략에서 군부 분열을 위한 친미 지휘관 양성으로 전략을 바꿨다. 인도네시아군 지휘관의 자질을 향상시킨다는 명분으로, 연간 200명 이상의 인도네시아군 장교를 미국에 초청해 교육했다. 연간 2000만 달러 규모의 군사원조도 제공했다. 

▲CIA의 공작과 우익 쿠데타의 배경 : 소련과 중국 다음으로 많은 300만 공산당원과 1500만 이상의 동조세력을 보유한 인도네시아의 반제국주의 행보는 인도차이나 등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제국의 패권을 유지하는 데 상당한 위험요소였다. 미국은 친미 군부를 양성해,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무너뜨린다는 목표로 각종 공작을 벌였다. 쿠데타 반년 전부터 CIA는 온갖 루머를 퍼뜨렸다. 공산주의자의 무장폭동이 임박했다느니, 군부에서 이들을 공격할 디데이를 잡았다느니 하는 내용이었다. 이 모든 과정은 1973년 칠레 아옌데 정부를 전복시키려고 CIA가 유포한 괴문서 사건과 흡사하다. 

▲군부의 민간인 학살과 미국의 역할 : 1965년 10월1일 새벽, 6명의 우익 군 장성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의 동기와 배후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기동타격대 사령관을 맡고 있던 수하르토 장군은 곧바로 이를 공산주의 쿠데타로 단정했다. 그는 수카르노를 대통령궁에 연금하고, 민족주의 성향을 보였던 고위 관료와 군 지휘관들을 처형했다. 이어 공산당원 색출 명분으로 그해 10월부터 12월까지 석 달 만에 약 100만 명의 자국민을 학살했다. 

자카르타에 사는 어느 교사는 자신이 가르치는 한 학생이 군인들에게 저 집이 공산당원이 사는 집이라고 지목하자, 군인들은 그 집에 들어가 총기를 난사해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해 온 가족을 죽였다고 증언했다. 한 학교 교장은 좌익성향이라는 이유로 머리가 장대에 꿰어져 제자들 앞에 전시됐다. 인구 200만의 발리지역에서만 20만 명이 살해됐다. 버클리대학의 ‘아시아 및 동아시아’ 연구소에서 교육을 받은 인도네시아 유학생들은 학살에 앞장섰다. 

이런 인도네시아 민간인 학살에 미국은 직접 개입했다. 당시 인도네시아 주재 미국대사관 정치담당관 로버트 마턴스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때가 바로 이 일을 할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그 바람에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더 이상 발붙이지 못하게 됐으니, 전부 잘못된 일이라고는 할 수 없다.” 수하르토의 쿠데타 성공 직후 미국대사관은 핵심 좌익인사 5000명의 명단을 군부에 넘겨주고, 이들의 학살 여부를 사후에 확인까지 했다. 수하르토 쿠데타 당시 미국에서 훈련받은 인도네시아 장교는 1200명이 넘었다. 따라서 인도네시아와 미국 군부 사이에는 긴밀한 교류와 접촉이 가능했다. 

▲미 제국의 병기들 : 수하르토는 자국을 방문한 포드 대통령 일행에게 “1980년 한 해만도 1만여 명의 좌익분자를 죽였다”고 자랑했다. 그는 과거 수카르노 시절에 국유화한 유전지대 및 광산 등을 미국과 네덜란드 등 서방 기업들에게 넘겨줬다. 그 결과 인도네시아는 막대한 자원부국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후발개도국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이면서도 석유를 수입하는 처지가 됐다. 

미국의 속국체제에 있던 나라의 군 간부 대다수는 과거부터 종주국에 부역을 해오던 자였다. 인도네시아 군부도 마찬가지였다. 수하르토는 미 제국의 병기로 전락한 속국 군부 지휘관의 전형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