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 "문젠 제국주의 중심의 역사 극복"

[특집]'동아시아 평화의 위기, 무엇이 문제인가?(하)

2016-06-16     편집국
서승 리츠메이칸대학 교수의 글 ‘동아시아 평화의 위기, 무엇이 문제인가?’를 두 번에 나누어 연재한다. 이 글은 동아시아 평화문제를 인권의 관점에서 접근하였다. 가장 심각한 인권 침해는 ‘국가폭력’이고, 가장 잔인한 침해 형태는 ‘전쟁’이다고 서승교수는 정의하고 있다. 전편은 일본이 자행한 동아시아 평화 파괴와 되살아나는 군국주의에 대한 역사적 맥락을 집었다. 후편은 국가 폭력을 강요한 국가 즉, 제국주의 세계질서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 세계적인 석학 서승교수와 나누는 평화와 인권의 공간이 되길 기대한다.[편집자]
▲사진 출처 : 미 국방부 홈페이지

4. 아시아ㆍ태평양전쟁의 역사적인 의미

작년은 제2차 세계대전(1938-45년) 종결 70주년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크게 나누어서 유럽과 동아시아, 대서양과 태평양을 주무대로 하면서 양대륙에 걸치는 여러 지역, 여러 성격의 전쟁을 엮은 일련의 전쟁의 총칭이다. 제2차세계대전은 유럽을 주무대로 하는 전쟁이었으나, 일본과 치른 전쟁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국이 태평양전쟁이라고 한다. 중국에서 본 대일전쟁은 1937년 루거우챠오(蘆溝橋)사변을 계기로 일어난 중일전쟁(일본 측에서는 지나사변)이라고 하고, 1931년 류탸오후(柳條湖)사변(918사변)을 기점으로 한 일본과의 전쟁을 (중일)15년전쟁이라고 한다.

일본은 1941년 12월8일 영미와의 개전에 임하여 중일전쟁을 포함해서 '대동아성전'이라고 불렀다. 즉 '선전의 조서(詔書: 천황의 명령서)' 에서 일본이 동양과 세계의 평화를 위해 노력했으나, 장개석정부가 공연히 풍파를 일으키고, 영미는 그 중국을 도와, "동아의 화란을 조장하여 평화의 미명 아래 동양재패의 야망"을 채우려고 했기에 "속히 화근을 끊어 동아 영원의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 "자존 자립"의 전쟁을 한다고 했다. 즉 대동아성전이란 백인제국의 지배에 신음하는 아시아의 여러민족을 해방시키고 아시아 사람들끼리 잘 사는 지역번영(대동아공영권)을 이루는 거룩한 전쟁이라는 뜻이다. 물론 이 말은 천황의 세계지배(八紘一宇)를 구호로 세계재패를 지향함에 있어서 일본의 동아시아 지배를 정당화시키는 말에 지나지 않다. 전후 '대동아성전'론에 비판적인 일본 사학자들은 중국과 미국이라는 두 정면의 전쟁을 벌렸기에 '아시아ㆍ태평양 전쟁' 또는 15년전쟁으로 부르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의 기본적인 성격은 반파시즘 전쟁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이태리의 팟쇼당의 등장과 1932년 독일에서의 나치의 집권에 의해 유럽에서 파시즘이 큰 힘으로 성장하였다. 천황제 일본군국주의의 핵심세력인 쵸슈(長州)와 사츠마(薩摩)의 군벌들이 천황을 업어 명치유신을 일으켜 일본 정치를 농단해왔다. 통치의 방식은 하향식으로 모든 국민을 통제ㆍ자유주의를 부정하는 전체주의와 반공주의, 그리고 우생학적인 인종주의이라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으며, 일제는 유럽에서의 나치의 성공에 편승하려고 1938년의 일독이 방공협정에 이어, 1940년 일독이 삼국동맹에 가담하고, 연합국과 대립하였다. 1941년 12월8일 일제는 선전포고도 없이 미국 진주만과 영국영인 말레이반도의 코타발에 선제기습을 감행했다.

재2차 세계대전의 성격은 선발 자본주의국가와 후발 자본주의국가 사이의 시장, 영토, 자원의 쟁탈이라는 제국주의 전쟁이기도 했으나, 그에 못지 않고 중요한 성격이 반제 민족해방전쟁이라는 측면이다. 파시즘 국가들은 모두 군사적 침략과 영토팽창을 일삼아왔으나, 그 중에서도 일제는 명치유신, 청일, 노일전쟁 이래 동아시아 이웃나라들을 침략하여 식민지지배를 해왔다는 점에서 이미 제1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하여 식민지를 빼앗긴 독일과 다르다. 따라서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제에 항거해서 일어선 아시아 여러 민족의 전쟁에서 제국주의의 지배에서 민족의 해방ㆍ독립을 지향하는 반제 민족해방전쟁의 성격이 가장 중요했다고 할 수 있다.

5. 일제의 패전과 동아시아의 정의 회복의 과제

1945년 일제는 국체(國體)의 보존, 즉 천황제의 존속이라는 조건부로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이고 제2차세계대전은 끝났다. 포츠담선언 제8항에서는 “카이로선언의 모든조항은 이행되어야 하며, 일본의 주권은 혼슈, 홋카이도, 규슈, 시코쿠와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국한된다”고 명시하고, 1914년 제1차세계대전 이후에 일제가 탈취한 영토의 박탈, 중국에서 절취한 대만ㆍ펑후 섬 등의 원상회복, 조선의 독립이 확인되었다.

일제의 기습을 받은 연합국, 특히 미국의 가장 큰 관심사는 진주만 공격을 감행하고 미국의 안전을 위협한 일본군국주의의 해체라는 측면을 가장 중시했으며, 일본에게 일련의 패전 처리를 과한 것이다. 이에따라 미국은 일본에 대한 7년간의 군사점령, 일본군의 해체, 군비와 전쟁의 발동을 금한 '평화헌법'의 제정, 극동군사재판의 실시와 7명의 A급 전범의 처형, 카이로선언 및 포츠담선언의 효력을 확인하는 샌프란시스코조약의 체결, 미국의 반 영구적 일본주둔을 보장하는 '미일안보조약'의 체결로 이어지는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미국 및 연합국은 카이로선언, 포츠담선언에서 일제의 전쟁책임을 묻고, 무력이나 강압으로 탈취한 영토의 반환을 명하기는 했어도무력에 의한 식민지의 강탈과 피지배 민족의 노예화, 물적 인적 자원을 착취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었다. 그 이유는 첫째 연합국의 시급하고 최대의 과제는 파시스트들과 전쟁에서 이기는 일이었으며, 둘째 식민지해방에 대한 명확한 정책과 방침을 애당초 가지지 못하였으며, 세째, 뭣보다도 연합국은 거의 다가 식민지를 가진 나라들이고, 전쟁 후에 구식민지를 회복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2차세계대전 후에 인도,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에서 민족해방 투쟁이 거세게 벌어졌다,

제2차세계대전 종언 후의 전후처리의 과제로서 전쟁 책임과 식민지지배 책임이 있는데, 전쟁처리는 전범국가들에 대한 군사점령과 전범재판소의 개설 등으로 가닥을 잡았으나, 식민지지배 책임은 다루어지지 않았다. 그 것이 일제와 동아시아 여러나라 사이의 역사인식 투쟁의 원인이 되어 평화실현에 대한 장애가 되어 왔다.

6. 강요 받은 독일의 과거청산과 일본의 평화

제2차 세계대전 후 전범국가 독일과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점령정책의 근본은 미국의 국익의 실현, 즉 냉전시대에서 정치∙군사적 패권의 추구였으나, 독일과 일본에 대한 구체적인 점령정책은 각각 달랐다. 일본에 대해서는 천황의 전쟁책임을 면책하여 구 체제에 대해서 관용한 반면에, 독일에 대해서는 과거청산을 최우선 과제로 하고 나치의 전쟁책임을 엄중하게 추구하였다.

그 이유는 유럽에서 냉전이 시작하여 소련∙사회주의 진영과 대치하기 위해 서독의 군사력을 필요하였기에 독일의 침략으로 처참한 피해를 입은 프랑스, 영국을 비롯한 서방국가와 화해시켜서 서독에 군비를 하게 할 동의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전쟁 후의 서독을 나치와 철저히 단절시킬 필요가 있었으며, 신속하게 서독을 재무장시켜서 1949년에 NATO (북대서양조약기구)가 발족하자 1955년에는 가입케 하고, 독일육군을 엘베 강 '철의 장막'따라 배치하여 NATO군의 중핵을 담당하게 했다. 작년에 일본에서 한창 문제가 된 집단적 자위권(군사동맹 가입)을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벌써 행사하게 된 것이다. 그 이후 독일은 NATO의 핵심적인 군대로 유럽에서 자리 잡았을 뿐만 아니라, 1995년에 NATO군의 일익으로 유고슬라비아 폭격에 참전하였고, NATO 지역 밖으로 해외파병을 했다. 또한 아프가니스탄, 소말리아 등지에는 유엔 결의를 근거로 독일군을 파견하여 지금까지 300명가량의 사상자를 내고 있다.

전후 국가적 차원에서 독일의 양대 원칙은 브헨발트 서약에서 표명된 “두 번 다시 전쟁을 하지 않는다”와 “제노사이드의 재발 방지”였는데, 2002년에 사회민주당과 녹색당의 개혁연합정권 하에서 “탈래반의 제노사이드를 저지한다”는 명분 아래 파병을 정당화하였다. 아베의 평화의 확보 내지는 유지를 내걸고 선재적인 무력공격을 정당화하는‘적극적 평화주의’와 상통하는 궤변이다.

한편 상술한 바와 같이 미국의 일본에 대한 정책의 우선과제는 '일본군의 해체, 비군사화'였다. 일본에게는 무장력을 가질 수도 없고, 국권의 발동인 무력행사(전쟁)를 금지하는 헌법 9조를 안겨 주었으며, 미군의 점령∙주둔 보장을 일본의 '주권회복' 이후에도 확보했으며, 과거청산은 2차적인 과제로 밀려났다.

그 이유는 일본이 과거청산을 해야 하는 주된 침략의피해자인 중국과 동아시아 국가들은 대부분 공산국가 영역으로 들어가서 적대 세력이 되었기에 미국은 독일처럼 일본에게 이웃 나라들과 화해를 강요할 필요가 없었으며, 일본은 스스로 자발적으로 과거청산을 할 리가 없었으니, 오늘까지 미제로 남게 되었다. 게다가 미국과 일본의 쌍방에 인종주의적인 편견에 기초한 아세아 멸시가 있었고, 일본의 패전의 성격을 규정하고 책임을 확인하는 샌프란시스코 평화회의에 대한 한국의 참석을 반대하는 일본의 요시다 수상의 말이 수용되고, 국공내전에서의 장개석의 패배로 중화민국의 국제적인 치위가 동요하고 있었기에 중국도 초청되지 않았다. 따라서 일본의 동아시아에 대한 침략∙지배의 책임이 추궁 받을 주객관적인 조건이 없었던 것이다.

독일이 민주화되었다고 하지만 그 민주주의도 미국의 이익에 충실한 편향된 반공주의적인 ‘싸우는 민주주의’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런 면에서 사상의 자유가 향유되는 ‘관용’이 독일의 공식적인 입장이 되는 것은 1990년 이후의 이야기다.

강요받은 ‘과거청산’이기는 했어도 독일은 과거청산을 위해 주어진 상황 속에서 노력해 왔다고 할수 있고, 이는 오랜 세월을 통해 일상화 되었다. 2015년3월에 방일한 메르켈 수상은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바이츠제커 전 대통령의 말을 빌리면 유럽에서 전쟁이 끝난 1945년 5월 8일은 해방의 날입니다. 그것은 나치의 만행에서부터의 해방이며, 독일이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의 공포에서부터의 해방이고, 그리고 홀로코스트라는 문명의 파괴에서부터의 해방이었습니다”.

나치스의 패망을 독일 패망의 치욕과 동일시하지 않으려는 이러한 공식화된 태도는 독일에서 교육을 통해 공유되고 일반화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영원한 속죄”에 지치거나, 불공평함을 느끼는 자들도 적지 않다. 과거청산과 ‘죄의식’마저 미국의 국익과 유태인들의 이기주의적인 이용물이 되어 있는 구석도 있다.

문제는 유태인만이 다른 소수자보다 특권화되어 있으며 독일 사람들 속에 겉으로는 유태인에게 정중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반감을 느끼는 이중적인 태도가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많은 독일 사람들이 유태인에 대한 속죄의식을 자발적으로 내면화된 것이라기보다 미국의 국익의 관점에 의해 강요 받은 데 기인하며, 독일 극우파의 정신적인 온상으로 되어 있다.

시오니즘 운동은 선주민,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땅을 빼앗아 이스라엘을 건국했는데, 제1차세계대전 후, 영토의 병합이나 국경의 변경을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는 국제법의 원칙에 위배되어 강행된 것이다. 전쟁 후에 미국 의회와 정부를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유태인 로비를 배경으로 미국은 친 이스라엔, 반 팔레스타인, 반 아랍, 반 이슬람 정책을 세계 규모로 추진해 왔다. 미국에서의 유태인 미디어 자본을 축으로 세계 미디어를 지배해 온 유태인들은 미디오 지배를 향유하면서 과거의 제노사이드의 수난의 역사를 망각하고 오늘날에 가자지구, 레바논 피난민구 등에서 제노사이드의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즉, 미국에 의한 과거청산의 강요가 독일 내의 과거청산을 비뚤어지게 만들고 있는 구조가 있는 것이다.

7. 인권에서부터 제노사이드로

인권이란 개인의 독립과 평등을 전제해서 비로소 존재할 수 있으며, 국가의 주권자인 국민이 필요악인 국가폭력을 구사하는 공권력을 통제할 수 있으며, 항상 공권력의 변덕과 강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보장장치이기도 하다. 근대 헌법은 주권자인 인간을 사회조직의 최고의 존재임을 선언하고, 인권이 공권력을 통제하는 모든 규범의 기초에 있음을 정교하고 구체적인 장치로 규정한 메뉴얼이다.

인권은 애당초 자유와 평등을 무기로 중세 신분사회를 뚫고 출현했기에 보편주의를 속성으로 삼을 수 밖에 없었으나, 현실적으로는 매우 특수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나타났다. 18세기 파리에서는 주권자임을 주장한 시민은 남성 부티 브르죠아지들이었으며,매우 특수한 존재였다. 무산자, 여성, 외국인 등은 주권자로부터 배제되어 인권의 보편성을 전혀 결여한 것이었다. 그러나 인권은 자유와 평등을 조직원리로 하고 있었기에, 저항권을 마지막 담보로 삼아 끝없는 지평을 향해 스스로 만든 장벽을 차례차례로 깨고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이 것이 인권의 '해방적 속성'이다.

인권은 그 자리를 서구 시민사회 속에서 다져갔지만, 국가권력에 의지하면서 국가 권력을 통제ㆍ구속하는 일국 안에서 완결되고 소비되는 폐쇄회로였기에 신분, 계급, 계층, 성으로 이루어진 간벽을 깨고 나가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문제는 국경의 벽을 넘는 일이었다. 종전에는, 그리고 지금도 아직도 인권은 법적으로 주권국가의 공권력에 의해 보장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원의 선점이라는 현실정치 속에서 구동되는 인간의 정치적ㆍ경제적 욕망이 자기만의 벽을 쌓아 올리고 깨려고 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한 서구사회가 일단 서구사회 밖으로 벗어나자 그 원리를 잊어버리고 부정하고 만다. 지배하는 측의 제국주의와 지배 받는 측에 과해지는 노예제도와 식민지주의가 있다. 서구 산업자본주의가 제국주의의 탈을 쓰고 비유럽 세계로 지배자로서, 착취자로서 팽창해 나갈 때 보편주의는 사라지고 '문명과 야만'의 이중잣대를 구실로 하고 지배하는 자의 권리와 지위가 정당화된다.

독립되고 평등하고 아무에게도 간섭 받지 않는 주권국가론으로 치장한 서구열강이 동아시아에 나타났을 때 동아시아는 서구의 '문명'과 같은 기준을 적용할 수 없는 '야만'의 지역이기에 '불평등이 평등'이라는 논법으로 '불평등조약'이 강요되었다. 조선총독부가 방대한 조사사업을 통해서 조선인의 열등성, 후진성, 형질적인 결함을 증명하려 했듯이, 식민지주의는 식민지지배의 정당성을 변증하기 위해 피 지배자들의 온간 미개함과 야만성을 발견하고 실증하려고 든다. 우생학, 신 다위니즘이라는 '사이비 과학'에 근거를 둔 선택된 민족론, 우수한 인종론이 필연적으로 '가치 없는 생명', '이등국민'이라는 담론을 만들어, 제노사이드라는 참화를 결과했다. '지배는 차별이고, 차별은 지배'이기에 명치 이후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일본의 패권 확대의 과정이 바로 인종주의와 민족우월론의 유포의 과정이였으며, 그 결과 난징학살에 상징되는 3500만명에 다달은 중국인 제노사이드 범죄가 저질러지게 된다. 일제는 동아시아의 이름으로 동아시아를 침략하고 지배해 온 역사를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라는 지역개념은 이 지역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낸 개념이 아니고, 외부에서 침략자 또는 정복자로서 등장한 외세에 의해 규정된 타자개념이고 그 자체가 지배와 피지배의 이중구조를 내포하는 개념이다.

8. 동아시아 평화 위협하는 제국주의 세계질서의 파괴-보편성이란 허위의식을 넘어

제2차 세계대전과 그 전야에 저질러졌던 '인도에 대한 범죄'가 비극적인 세계대전을 결과를 준비했으며, 도입곡 구실을 했다는 인식을 전제로 다시는 파시즘의 태두와 그들의 폭력과 파괴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결의 아래 유엔이 조직되었다. 유엔의 목적인 평화는 추상적인 비폭력, 인도주의적인 개념이 아니라, 파시스트들에 대한 감시와 억압이라는 구체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 유엔에 있어서, 국가폭력에 대한 통제력으로서의 인권이 대항력을 가지지 않는 곳에서는 파시즘의 태두를 허용한다는 의미에서 주목되는 것이다.

그러나 유엔은 파시즘의 감시와 통제, 그리고 전쟁의 불법화라는 소임도 다 하지 못했다. 이 지상에서 인간에 대한 차별과 지배를 낳게 하는 노예제와 식민지지배를 원리적으로 척결하는 작업도 해내지 못했다. 그 이유는 유엔을 주도한 미국 등이 세계의 패권 장악에 뜻을 두는 제국주의 국가고, 그 체내에 파시즘을 온존∙내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의 세계패권을 옹호하고 확장하기 위한 냉전 상황에서 '반공'의 이름으로 광범위한 내적인 정치연합이 형성되었으며, 대외적으로는 파시즘 세력에 대한 관용, 이용, 육성, 등용이 이루어졌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천황제군국주의의 뿌리가 끊기지 않고 보존되어 육성된 까닭이다. 미국과 일찍 '문명'의 편에 선 일본이 가지고 있는 제국의 지배 정당화론과 우리민족을 열등시하는 인종주의가 우리문제의 해결을 어렵게 하고 있다.

즉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의 패배를 계기로 명치유신 이래 저질러 온 동아시아의 평화에 대한 가해를 청산하고 동아시아 민중들로부터 빼앗은 생명과 재산, 권리에 대한 원상회복이라는 역사적인 과거청산의 요구를 받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세계의 기득권자들의 옹호에 힘 입어 그 요구를 철저히 외면해왔다. 이 구조는 12월28일 '합의'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625전쟁에 종결 짓고 한반도에 평화를 확립하기 위한 평화협정의 체결이 불가피할 것인데, 이 문제에 대한 미국의 자세는 초강대국의 오만이 드러나 보인다. 이 오만의 근저에는 근대 이후 서구 제국주의 국가의 '문명과 야만'이라는 인식의 이중구조, 패권주의적인 미국의 국익논이 있다고 하겠다. 우리가 식민지가 되어 분단되어, 핵문제가 불거져 나오고 동아시아 평화위기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은 바로 세계와 동아시아의 역사적인 구조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역사적인 서구중심, 제국주의 중심의 역사를 어떻게 극복하는냐는 문제다.

'문명국'들이 노예제와 식민지지배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역사적인 청산을 통해 인권과 평화의 보평성에 다가설 필요가 있다. 힘에 의한 평화론, 보평성을 주장하면서 보평적이지 못한 인권론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나치와의 결별과 단죄만이 아니고, 히틀러 출현 이전의 독일의 국가 범죄에 대한 청산, 미국의 핵우산과 막강한 무력 아래서 평화를 구가해 온 일본이 그 포장 아래서 덮어져 있는 헤이트 스피치나 조선ㆍ오키나와ㆍ중국 등 동아시아에 대한 편견과 차별, 증오의식을 극복하고, 한반도 식민지화와 분단, 전쟁에 대한 엄중한 책임을 인정할 때 미국이 입혀준 평화의 겉옷을 벗고 진실된 평화에 다가설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