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두지의 ‘못 속의 잉어’

[박경순의 고구려사](7) 위나암성 방어전투 승리 이야기

2018-04-24     박경순 우리역사연구가

기원 25년, 전한 왕실 출신 유수는 신나라 왕망을 몰아내고 한나라 왕조를 다시 세웠다. 이 왕조를 역사에서는 보통 후한이라고 부르는데, 220년까지 이어졌다. 후한세력은 전한에 이어 고구려에 대한 침략정책을 고수했다. 고구려와 후한세력의 전쟁은 28년, 49년, 105년, 111년, 118년, 121~122년, 146년, 168~169년, 172년에 일어났다. 후한 150여 년 간에 거의 10차례에 걸쳐 큰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고구려는 후한세력의 침략에 맞서 싸워, 이를 물리쳤을 뿐 아니라 고조선의 옛 땅을 하나하나 되찾아 갔다.

후한세력의 침공(기원 28년)

새로 정권을 잡은 후한세력은 정권을 잡자마자 고구려에 대한 침공을 획책했다. 정권을 잡은지 3년도 채 지나지 않은 기원 28년 100만대군(역사서에 백만대군이라고 표현돼 있지만 실제는 몇만에 불과했을 것)을 동원해 고구려의 수도(국내성)을 향해 물밀 듯 밀려왔다. 정권을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국내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했을 텐데 이처럼 고구려를 먼저 침공한 까닭은 무엇일까?

후한 중앙정부차원에서는 정권 안정을 위한 내부 사업에 몰두하느라, 해외침략에 눈을 돌릴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지방정권 차원에서 추진되었을 것이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자 요동군, 현도군, 낙랑군 관료들은 과거 신나라 때 많은 땅을 잃고 패배한 책임을 추궁당할 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후한서〉군국지에 의하면 〈한서〉지리지에 올라있던 현으로서 군국지에 보이지 않는 현들은 다 세조(광무) 때인 건무6년(기원 30년)에 통합했거나 없애버린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요동군 무차현 거취현이 〈후한서〉군국지에 나오지 않은 것은 신나라와의 전쟁 때 고구려가 빼앗았기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이처럼 고구려- 신나라 전쟁 때 요동태수는 많을 땅을 고구려에 빼앗겼고, 새로운 정권이 등장해 이것을 추궁할까 두려워, 이를 만회하기 위해 고구려 침공을 획책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 위나암성 내부

어쨌든 28년 7월에 요동태수를 우두머리로 하는 후한의 ‘100만 대군’(아마 부풀려진 숫자이며, 실제는 몇만명에 불과했을 것)은 불시에 고구려를 침공해, 물밀 듯이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으로 쳐들어왔다. 고구려 수도를 목표로 쳐들어왔다는 것은 고구려왕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전쟁의 목표였다는 것을 뜻한다. 후한침략군이 국내성을 향해 공격해오고 있다는 전갈을 받은 대무신왕은 신하들을 불러, 대응전략에 관한 작전회의를 열었다. 이 때 우보 송옥구는 적들의 침공이 지방정권 차원의 침략이라고 하면서, 험한 곳에 의지해 기습타격을 하면 승리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맞받아쳐 나가 싸우는 진격전략을 주장했다. 이에 반해 좌보 을두지는 소수의 무력은 아무리 강해도 다수의 무력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은 병법에 나와 있는 바다. 지금 한나라 군사들이 멀리와 달려들고 있으니, 그 예봉을 당해낼 수 없다. 그러므로 성에 들어가 문을 꼭 닫고 지키다 적들이 피로해진 다음 나가 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대무신왕은 을두지의 계책을 채택하고 위나암성(수도방위용 산성)으로 들어가 전쟁지휘부를 꾸리고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적들은 위나암성을 포위하고 성을 함락시키기 위한 공격을 퍼부었다.

못 속의 잉어

한나라 침략군은 수십 일간이나 위나암성을 포위 공격했으나 성은 끄떡없이 고수됐다. 하지만 좁은 산성 안에서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대무신왕은 을두지에게 “더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이니 어떠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을두지는 아마도 적군은 우리가 바위돌투성이인 산성 안에 들어와 있으므로 물이 부족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타산하고 포위를 풀지 않고 있을 것 같다고 답하면서, 못 속의 잉어를 잡아 물풀에 싸고 얼마간의 술을 보내 적장을 위로하는 체 하자는 계책을 내놓았다. 대무신왕은 이 계책에 따랐다. 가지고 온 식량이 다 떨어져가 초조해 하고 있던 터에 물풀에 싸여 있는 살아있는 잉어를 받자, 한나라 침략군 수뇌부는 성안에는 물이 많으니 조속히 함락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절망하고 퇴각만이 상책이라고 판단하고 퇴각명령을 내렸다. 한나라 침략군이 아무런 소득 없이 퇴각함으로서 고구려군의 위나암성 방어전투는 승리로 결속됐다.

▲ 위나암성 연못

위나암성 방어전투의 승리는 고구려의 전통적인 수도방위체계, 청야수성전술의 우월성과 효과성을 내외에 과시한 전투였으며, 이후 고구려의 기본 방어 전략으로 계승 발전됐다. 고구려의 전통적인 수도 방어체계란 수도성을 평시의 평지성과 전시의 산성을 결합해서 꾸리고, 산성을 고로봉식 산성으로 축조하는 것을 말한다. 고로봉이란 가운데 큰 골짜기를 끼고 3면이 높은 산으로 둘러 막혀 있으며, 한쪽만 트여 있는 지형을 말한다. 고로봉식 산성이란 이러한 고로봉을 택해 3면의 산 능선에 성벽을 둘러쌓고 트여 있는 쪽에 성문을 낸 성을 말한다. 이러한 고로봉식 산성은 3면의 능선으로 둘러싸여 있는 가운데 골짜기에 수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으며, 산골짜기에는 풍부한 물이 항상 흐르고 있어 오랫동안 성안에서 버틸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다. 고구려의 전통적인 청야수성전술은 적의 대군이 침략해 오면 들판에는 적들이 먹을 수 있는 곡식을 한 알도 남겨두지 않고 이러한 고로봉식 산성을 이용해 주민들과 군사들이 모두 산성 안으로 들어와 군민이 합심협력해서 성곽 방위전투를 펼쳐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가는 전략이다. 전투가 길어지면 침략군들은 가져온 식량이 바닥나서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을 때, 반격전으로 적들을 족쳐 승리를 쟁취한다는 것이다. 고구려의 전통적 수도방위체계와 청야수성전술의 우월성은 고구려 역사 전 기간에 걸쳐 빛났으며, 고구려- 당 전쟁 시기 안시성 방어전투 승리에서 그 백미를 보여줬다.

동아시아를 뒤흔든 고구려 기마군단

위나암성 전투 승리는 고로봉식 산성을 이용한 청야수성전술로 고구려군대의 방어전략의 우수성을 내외에 과시했다. 고구려군은 단순히 방어에만 능한 군대가 아니라 뛰어난 기동성과 공격력도 갖춘 무적의 강군이었다. 고구려군의 공격력의 정수는 뛰어난 기마군단에 있다. 고구려의 기마군단은 매우 독특하다. 고국원왕릉(안악 3호 고분) 고분벽화에는 고구려의 기마군단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개마무사로 이루어져 있었다. 개마무사란 말과 군인이 함께 철갑옷으로 무장한 군인이다. 고구려의 기마군단이 언제 개마무사 군단으로 발전했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지만, 고구려의 뛰어난 제철 제강기술로 볼 때 매우 일찍부터 말에 철갑옷을 입히는 개마방식이 창안 도입됐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 기마군단의 기동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는 370년 11월 대기마군단을 발동해 10여 일 만에 2000여리를 진격해 베이징 서남 용성부근에 도착했다는 것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 안악3호분 대행렬도에 그려진 개마무사
▲ 고국원왕릉(안악3호분)

고구려 기마군단의 기동성과 공격력을 보여준 첫 번 째 사건은 기원 49년 태원 원정이다. 태원 원정의 배경에는 고구려의 잠지락부 우두머리의 망명사건이 있었다. 기원 47년 천산선 줄기 동남에 있던 잠지락부 우두머리 대승은 고구려를 배반하고, 자기 관할 하에 있던 1만여명의 주민을 데리고 낙랑군에 가서 투항했다. 후한세력이 고구려 잠지락부의 망명을 받아들인 것은 고구려 내정에 대한 엄중한 간섭으로 후한이 다시 고구려를 침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고구려는 이러한 후한의 적대적 태도에 적절한 타격을 가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고구려의 힘과 기개를 과시함으로서 섣부리 고구려를 넘볼 수 없도록 해야 했다. 이러한 목적으로 기획된 것이 태원 원정이다.

태원은 오늘날 산서성 태원으로 베이징에서 서남으로 500km 떨어진 지역에 위치해 있다. 고구려 수도에서 이곳까지는 직선거리로만 천 수백km에 달하며, 실제거리는 수천km에 달한다. 고구려가 이처럼 대 기동작전을 구사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그 대담성과 과감성을 절로 느끼게 한다. 49년(모본왕 2년) 봄, 고구려의 모본왕(48년~53년)은 후한에 대한 새로운 응징 타격으로 기마군단을 내보내, 멀리 후한의 우북평, 어양, 상곡군들을 거쳐, 후한 수도 낙양의 북쪽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태원까지 쳐들어가 대타격 작전을 수행해 큰 타격을 가하고 회군했다. 이처럼 고구려는 뛰어난 방어능력과 함께 기동성을 자랑하는 타격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군사강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