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우리 땅에도 봄은 오는가 2

소성리 1박 2일 투쟁기(2)

2018-04-19     구자숙 현장기자

날이 밝으니 우리가 앉은 곳에 있던 자리에 그물이 놓였다고 그걸 쓰라고 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목을 낼 수 있도록 가위로 자르고 파일(?)로 그물과 틀 사이를 묶기도 했다.

내가 잠시 자리를 떠났을 때라서 그물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 사이 경찰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6시30분에 원불교 평화기도회가 열렸다. 조용히 경을 읽으며 함께 고개 숙여 절을 했다.

김천, 성주와 더불어 투쟁의 선봉에 서서 싸우는 원불교 교무님과 교도들. 내 앞쪽에 앉아 있는 원익선 교무는 참 조용하고 학구적인 분이다. 그분이 조용히 눈을 감고 결연한 자세로 있는 모습이 겁 많은 나로선 큰 위로였다. 생각해보니 9월7일 저 새벽에 경찰이 한 사람씩 끌어낼 때도 내 옆에 앉은 교무님이 나지막이 부르던 노래가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원불교 기도회가 끝나고 이제 개신교 예배가 진행되었다. 예수살기 목사님과 장로님이 트럭에 올라가 진행했다.

원불교가 교세가 작아 성지에 사드 무기가 들어오는 굴욕을 겪었다면, 그 원불교에 따뜻한 손길을 내민 예수살기 소속 목사들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신부들이나 정의평화위원회 신도들의 격려와 응원은 감동이었다. 그 때문에 나 또한 오랜 냉담 생활을 청산하고 소성리 천주교 상황실 미사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반 정도는 뒤로 돌아 앉아라 했다. 내 자리가 갑자기 앞자리가 되었다. 물론 트럭 앞뒤와 난간 쪽으로 젊은이들이 지키고 있기는 하지만 좀 불안했다. 

젊은 엄마들이 하나 둘 들어왔다. 후딱 밥 차리고 애들 깨워 학교 보내고 왔다고 한다. 비어있는 자리에 들어온다. 내 자리를 내주고 한 칸 앞으로 갔다. 두 자리가 비어 있어 난간 바로 옆 맨 끝에 앉았다. 

그러는 동안 해가 떠올라 더워지기 시작했다. 간밤에 덮어썼던 큰 담요를 말아 가방에 넣었다. 패딩잠바도 벗었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는데 뒤에 앉은 젊은 여성이 ”추워서 아플 수는 있어도 더워서 아프지는 않아요.“하면서 그냥 입으라 했다. 

다리가 경사져 뒤로 돌아앉으니 자세가 너무 불편한데 옷을 입고 가방을 메니 조금 불편이 가셔지기에 그대로 입고 가방을 메었다. 좀 있으니 밀짚모자도 돌았다. 소성리에서 작년 여름에 사람들이 예쁘게 색칠도 했던 모자였다. 

다음으로 미사가 진행되었다. 농소 아가페 언니가 앞에 가서 소성리천주교 상황실에서 미사 때 쓸 수 있도록 만든 작은 책자를 들고 왔다. 미사는 황동환 신부와 김동건 신부가 진행했다. 돌아앉아서 하는 게 불편해서 고개를 돌렸더니 햇빛이 눈부시고 뜨거워 옆으로 비켜 앉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는데 경찰들이 다리 밑에 에어매트를 깔기 시작했다.

“저거 뭐야? 우릴 저 밑으로 집어던지려는 거야?” 
“다리쪽으로 몰아 떨어뜨리려는 걸까?” 

우리는 불안해서 수군댔다.

그러는 사이 경찰들이 몇 번 화이바를 썼다 벗었다, 일어났다 앉았다를 하며 우리 애를 태웠다. 지난 몇 번의 경험으로 우린 경찰들이 화이바를 쓰고 일어나면 진압이 시작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경찰들은 우리를 어떻게 진압할 것인가 난감해 했다고 한다. 쇠사슬로 묶었을까봐 그걸 끊을 준비를 해왔는데 이런 이상한 틀 속에 있으니 한참을 고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예상보다 진압 시간이 늦어졌던 모양이다. 

한 시간이 넘도록 해산 방송이 나오더니 10시30분쯤 드디어 경찰의 진압이 시작되었다. 먼저 트럭 앞뒤로 지키고 있는 사람들, 주로 젊은 남자들이 대상이었다. 이들을 밀어내고 트럭 사이 좁은 틈으로 해서 우리 쪽으로 들어오기 위해서였다. 트럭은 밀어낼 수 없었다. 좁고 비탈진 곳이라 잘못 밀리면 대형사고가 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압이 시작되는 걸 보고 어느새 미사를 집전하던 김동건 신부가 달려와 트럭 위에 올라앉았다.

한 젊은이가 난간 위에서 필사적으로 경찰이 밀려들어오는 걸 저지했다. 우리는 소리로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젊은이는 반쯤 부러진 사무여한(死無餘恨) 깃발에 의지하여 난간에서 경찰에 저항했다. 여럿이 에워싸서 자칫 다리 밑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보다 못해 국가인권위원회 조끼 입은 사람을 불러서 호소했다. 그는 경찰을 헤집고 들어가더니 젊은이를 끌고 나왔다. 사람들이 너무 황당해서 “아니, 경찰 폭력을 물려 달랬지 누가 사람을 끌어내라고 했나?”며 항의했더니 ”이 사람이 너무 위험해서요. 제 임무는 그겁니다.”하고 설명했다. 

“경찰이 물러가면 안 위험해요!” 

우리는 그렇게 따졌다. 그러는 사이 경찰은 어느새 우리 지킴이들을 다 몰아내고 트럭 앞과 우리가 앉아 있는 사이 좁은 공간 앞을 가득 차지했다. 

이제 앉아 있는 사람들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남자 경찰들이 내 앞자리 있는 사람을 끌어내려 하기에 ”야! 우리 여자야! 남자처럼 보이나?“ 항의했더니 여경들이 투입되었다. 그 여성을 끌어내려 하면서 남자 경찰들이 내 옆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그들을 지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나는 난간을 왼손으로 부여잡고 버텼다. 경찰의 구둣발에 팔이 미끄러지면 경찰의 다리를 잡았다. 저항하던 앞 사람이 끌려 나갔다. 이제 내 차례다. 경찰 둘이 나를 에워쌌다. 저 9월7일 다섯이서 에워쌌을 때 기억이 떠올랐다. 무장하고 에워싸는 그 자체가 폭력이었다. 숨 막히던 그 공포. 

또 다시 그것이 시작되었다.

뒤에 있는 남자 경찰은 구둣발로 내 팔과 등을 짓누르며 지나가려 하고, 앞에 있는 여자 경찰 두셋은 내 무릎을 짓누르며 나를 좁은 틀에서 끌어내려 했다. 나는 왼손으로는 난간을 부여잡고, 오른손으로는 그물을 잡아당기며 버둥댔다. 틀 밑에 내 두 다리가 있으니 그들도 내 다리를 끌어올리는 데는 애를 먹었다. 

경찰이 내 두 무릎을 누르니 죽을 것 같았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주위에 마침 기자가 보이기에 소리를 쳤다.

“사진 찍어 주세요! 기자님! 기자님! 이 사람들 좀 찍어주세요!”

기자가 오니 잠시 멈칫 했다. 하지만 기자가 나에게만 있을 수 있나. 여기저기서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 

가고나면 또 공격이 시작됐다. 이번엔 국민TV라 적힌 카메라를 든 사람이 보였다.

”악! 살려주세요! 국민TV! 국민TV!“ 하니까 사람들을 헤치고 가까이 와서 찍어주었다. 또 조금 주춤했다.

그러더니 의사와 간호사가 왔다. 

”나오세요.“하고 의사가 말했다. 

뭐야? 아까 국가인권위원회 사람과 똑같이 말하잖아? 

사람들이 ”왜 나오라고 하나? 경찰을 좀 물러가게 해 달라!“고 호소하니, ”그건 우리가 할 수 없는 부분이에요. 나와서 치료받으세요. 병원 가실래요?“, ”병원은 가야겠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안 갈래요.“ 했더니 현장 지휘관처럼 보이는 사람이 ”어떻게 할 거냐? 치료 받을 거냐? 아니냐?“고 독촉했다. 

내가 안 나가겠다 하니 의사와 간호사는 나가고 다시 공격이 시작되었다. 한 다리가 들려졌다. 나는 한 다리를 틀 밑으로 넣고 버텼다. 만약 들면 다리가 다칠 위험이 있었다. 빈 옆자리에 들어온 여경이 나를 못 끌어내니 교대가 이루어졌다. 

그는 나가면서 ”에이 씨! 내가 이럴려고 경찰이 되었나?“ 투덜댔다. 마음이 짠했다. 

그 자리에 다른 경찰이 들어오면서 옆 자리쪽으로 다리를 뻗은 현정님을 밟았다. 나는 다시 국민TV를 불렀다. 

그 사이 한둘 경찰이 내 옆으로 지나갔다. 

또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번엔 위로 들려고 했다. 패딩잠바와 가방이 위로 들려졌으나 다 들려지지 않았다. 소리를 치는데 입안이 말라 혀가 굳어져 발음이 잘 안 되었다.

그러는데 갑자기 대경대책위 김찬수 대표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오며 나를 불러댔다.

“이리 나오세요!” 소리를 쳤다. 

응? 나오라고? 난 아직도 버틸 수 있는데? 이거 어떡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뒷자리 여성들에게 ”찬수씨가 나오라는데 나 나가도 될까?“하니까 ”예, 그만 하면 됐어요. 이제 그만 나가셔도 돼요. 우리가 할게요.“ 

대답하는 여성의 눈에 약간 눈물이 글썽인 것 같았다. 나중에 옆에 있었던 젊은 엄마들이 ‘자신들이 그 끝자락에 앉아 버텨주지 못한 걸 무척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말을 하는 걸 들었다.

나가려 보니 빈 옆자리에 이미 여성 경찰 둘이 들어와 있었다. 내가 나가면 이들 차지가 된다는 생각에 ”니들이 나가야 나간다.“고 했다. 

몇 번 실랑이 끝에 지휘관이 여경들을 나오라 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김찬수 대표가 보였다. 그를 불러 손을 붙잡고 자리에 앉혔다. 

”이 자리 사수해요.“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입이 마르고 가래가 끓어올랐다. 오른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의사가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다. 양 무릎이 아팠으나 오른쪽만 말했다. 왼쪽은 원래 아픈 데라서였다. 

생각보단 괜찮았다. 파스를 바르고 다른 여성들과 그늘에 있다가 계곡을 건너서 끌려나온 다른 일행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경찰들이 미리 작전을 짜면서 잘 건널 수 있도록 해놓았던 것 같다. 

입안이 바짝 말라 컵라면을 먹으라고 주는 걸 거절하고 물만 들이키고 있는데 왼쪽 무릎이 쑤시기 시작했다. 무릎을 걷어 올리니 부어 있었다. 의사를 찾아 앰블런스 쪽으로 가니 경찰이 길을 비켜주었다. 의사가 없으니 안에 타고 있으라는 걸 그냥 밖에 서 있으니 누가 들것에 실려 나왔다. 김천 사람이니 김천의료원으로 가라고 지시했다. 누굴까? 물어보니 이름을 안 댄다며 차는 가버렸다. 

원불교 천막 옆에는 전기선을 빼고 한 통신사 기자가 기사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 기자가 나를 동정하면서도 “장병들이 열악한 상황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미군 기지가 제일 많아요. 평택엔 세계에서 제일 큰 기지도 있는데, 여기 땅을 공짜로 또 줬어요. 그런 건 생각지 않나요?” 

“미군이 철수해야 해결 되겠네요.” 

“그런데 우리 국민들은 미군이 철수한다면 벌벌 떨잖아요. 당장 북한이 처내려온다 생각하니 쉽지 않을 거예요.” 

“그런 사람은 일부예요.” 

이런 말을 주고받으며 있으니 경찰이 빠지기 시작했다. 가는가 싶었더니 다른 경찰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밥 먹고 교대하는 거란다. 갑자기 배가 고팠다. 새벽 3시 이후 먹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배고파 하는데 천주교 신자인 듯한 여성이 “해가 너무 뜨거우니 밀짚모자를 좀 가져다주면 안될까?” 요청했다. 이미 원불교 신도가 마을회관에 가지러 갔는데 없는 모양이었다.

김성혜 교무가 나와서 경찰 관계자를 불렀다. 

너무 덥고 해가 뜨거워 시위대의 다수를 차지하는 어르신들이 힘드니 어떻게 협상해서 경찰을 물릴 수 없겠는가 제의했다. 

김천, 성주, 소성리 등등 대표들이 모여 의논했다. 결과 ’경찰은 철수하고 작년 11월에 들어가 있는 장비는 빼내되 새 장비가 들어가는 것은 다시 의논해서 협상하자‘고 결정되었다.

그래서 우리 점심밥도 배달되고 경찰도 조금 빠지는 것 같았는데, 조금 있다가 다시 경찰이 전진 배치되었다. 윗선에서 강경하게 나왔다고 한다. 이해는 되었다. 어쨌든 미군기지 공사를 완공해야 하는데 날짜 며칠 미루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아까는 조금 자유롭게 대열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이제 나온 사람은 못 들어가게 막았다. 화장실에 간 사람은 다시 들어갈 수 없었다. 

다시 김성혜 교무가 마이크를 잡았다.

“여기 주민들은 새벽 3시부터 밥도 못 먹고 뙤약볕에 있습니다. 그런데 젊은 여러분들은 밥을 먹고 기운이 펄펄 나는데 여기 주민들은 밥도 못 먹고 화장실도 못 가고 있습니다. 나가면 안 들여보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보는 앞에서 소변, 대변을 봐야 하나요? 화장실은 보내줘야죠.” 

한참 있으니 일단 경찰을 철수시키고 들어간 장비를 빼낼 트레일러는 들이기로 합의가 성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3일간의 평화였다. 3일 후에 또다시 사람들은 소성리로 달려가야 할 판이었다. 

그래도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람들은 기뻐했다. 비록 내일 지더라도 오늘 얻은 작은 승리에 한껏 만족해했다. 만세도 불렀다. 

사람들이 철수하는 동안 두 신부는 나머지 미사를 진행했다. 

미사가 끝나고 우린 경찰이 아직 앉아있는 곳을 지나 돌아왔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그 경찰들이 달고 있는 태극 마크가 가슴을 아프게 했다. 성조기를 휘두르는 사람들을 볼 때보다 더 가슴 아팠다. 저렇게 태극기를 달고 우리나라를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을 위해서 자국민을 짓밟는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도 슬펐다. 더구나 그들이 밀어내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부모 또는 조부모들 세대가 아닌가. 

저녁에 집회 나가니 JTBC가 와서 생방송을 했다. 촛불집회 600회 되는 날이라니까 왔다고 한다. 600일 동안 우리는 스스로를 단단하게 단련시켜 왔다. 

’보수‘언론들은 우리가 좌익 이념을 가지고 현실에 적용시키는 양 보도했다. 그런데 이념이 먼저 있을 수 있나? 내가 어머니 뱃속에서 “난 자본주의가 좋으니 자본주의 국가에서 태어나야지”한 적이 있었나? 

그저 태어나 보니 분단된 조국의 남쪽이었고, 오랫동안 공산주의와 북한을 미워하도록 교육받았고, 그래서 나라에 저항하는 것은 곧 북한을 이롭게 하는 것이니 되도록 자제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검열하며 불편한 삶을 불편한 줄 모르고 살아왔다. 

사드가 들어오면서 이 삶은 더 이상 이전의 삶과 같아질 수 없었다.

주민 동의를 얻고, 국회 동의를 얻고, 사전에 환경영향평가를 해야 하는 등의 이 모든 법절차가 미군 주둔의 편의를 위한 법인 소파(한미행정협정)에는 간단히 무시할 수 있다 했다. 심지어 롯데골프장을 미군에게 공여한다는 사인이 있기 전에 미군 중장비가 들어가기도 했다.

이렇게 국가가 우리들을 그 수가 적다하여 간단하게 팽개치고 미군을 위한 편의 시설을 짓고 임시라 해놓고 단단히 고착화하려는 것을 우리는 안 된다고 외치고 저항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 거대한 미국에게 “이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피부와 몸매는 달라도 당신들처럼 생각하고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다른 시민들과 자리에 나왔고, 점차 날이 길어지면서 이런 저런 이유로 사람들이 자리를 나가도 머리수를 채워야겠다는 그 한 가지 생각만으로 이곳을 지켜왔다. 이런 우리가, 내가 불순하고 불온한 사람들인가? 

김천 농소는 6~70대가 많다. 내 나이가 60대 초반인데 나보다 나이 많은 언니들이 많다. 그 언니들이 매일 촛불을 켜러 나온다. 오빠들이 매일 촛불을 켜러 나온다. 그 중에는 월남에 참전한 분도 있다. 그 오라버니는 이렇게 말했다. 

“전쟁을 하면 아군이든 적군이든 다 비참해지는 겁니다. 전쟁은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시골에서 4~50대는 젊은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온갖 힘쓰는 일을 다 하고 있다. 매일 집회 준비를 하고 뒷정리를 하고, 새벽에는 농소에서 군부대로 넘어가는 할깃재를 지키기도 한다. 비상 상황이 벌어지면 소성리로 달려가 길목을 막기도 하고, 시위대 가장 앞에서 투쟁하기도 한다. 

혁신도시라 부르는 율곡동은 가장 젊은이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김천의 평균나이를 낮추고 있다. 특히 젊은 여성들은 “내 새끼는 내가 지킨다”며 적극적으로 자기 할 일을 찾아서 최선을 다해서 싸우고 있다. 

이런 우리들이 빨갱이이고 좌익분자인가? 

늘 우리를 지역이기주의자라 부르는 ’보수‘언론들이 이럴 땐 ‘어디서 원정 온 시위대들’이라 한다. 우리는 자기 지역에 무서운 무기가 들어와서 투쟁에 나섰다. 그리고 삶이 바뀌었다. 생각이 바뀌었다. 누군들 병이 나면 고치려 하지 않는 이가 있겠는가? 다만 그 과정에서 좀 더 성숙해지고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것은 각자의 몫이 되는 것이다. 

다음날 일어나니 왼쪽 어깨에서부터 갈비뼈까지 아팠다. 왼쪽 어깨는 움직이기도 어려웠고, 가슴팍이 아파 기침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왜 이럴까 생각해보니 뒤에서 힘센 남자 경찰이 지나가려고 마구 짓뭉갰고, 앞에서는 끌어내려고 눌러대어서였다. 

저녁엔 목욕탕에 가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나와 보니 여기저기 멍 자국이 보였다.

신문엔 북한이 5개 조건을 들어주면 비핵화를 하겠다고 하는데 그 중 하나가 ‘전략무기 철수’였다. 사드는 전략무기이다. 그러면 철수되는 걸까? 

하지만 지난 12일 반출장비는 상황실 자료 확인 결과 국방부 주장과 달리 모두 미군 장비(2017년 4월20일 반입)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물론 국방부는 “작년 11월21일 반입된 공사 장비다. 민간장비이므로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방부에서는 공사를 강행하겠다고 여전히 주장했단다. 평화회의는 지붕 수리, 오폐수 공사까지만 용인한다고 했다. 별로 협상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이는 미국이 “북한의 요구대로 하지 않겠다”는 신호라고 보는 분석이었다. 그러니 우린 또다시 지겨운 싸움을 몇 달 동안 되풀이해야 할지 모른다.

분단된 땅에서 군사 안보상 주권이 없는 국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이렇게 힘들구나.

“사드 반대 싸움이 어려운 것은 이것이 독립운동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식민지와 다름없다는 것을 인정해야하기 때문이다.”고 월요평화미사를 집전하던 한 신부님이 말씀하셨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이 일제 강점기 식민지 조국 땅에서 순응과 복종의 삶을 살아갈 때도 저항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 이육사 ’광야‘에서

아직도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한 이곳에서 우리는 그렇게 백마 타고 올 후손을 꿈꾸며 오늘 이렇게 촛불을 들고, 필요하면 저항하려 달려가는 그 작은 행동이라도 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마음 한 구석에는 패색이 짙다고 생각하면서도 포기하지 못하고 이 길을 걸어가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