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우리 땅에도 봄은 오는가

소성리 1박 2일 투쟁기(1)

2018-04-18     구자숙 현장기자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쁜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띄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지폈나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2017년 2월 27일 롯데이사회는 국방부가 소유한 남양주 땅과 성주 롯데골프장을 교환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국방부는 그 땅을 미군에게 주고 미군은 이 땅에 철조망을 치고 사드를 들여왔다.

지난 5월 연휴 기간에도, 아니 대통령 선거 당일에도 사람들이 소성리를 지키러 간 것은 그곳이 미국 땅이 되었고, 저들은 한국의 공휴일과 관계없이 자신들의 시간표대로 움직이기 때문이었다.

충격이었다. 저렇게 쉽게 우리 땅이 미국 땅이 되는가? 그런데 어떻게 우리 김천 시민들은, 나아가 대한민국 국민들은 자기네 땅 일부가 미국 것이 되었는데도 그렇게 무감각할 수 있는가?

그러고 보니 일제 강점기에도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을까? 일부 싸우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다들 현실에 순응하여 그렇게 살지 않았을까?

그래도 촛불시민들은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조금씩 평화의 바람이 불어오니 기대를 걸게 되었다. 기대하고 실망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기는 했다. 박근혜가 탄핵되었을 때도, 또 탄핵이 인용되었을 때도,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도 우리는 상황이 나아질 거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물론 그 기대는 번번이 좌절되곤 했다. 그래도 한반도에 훈풍이 부는 듯해 또다시 기대를 갖게 되었다.

사드는 북핵 방어용이라 했으니 비핵화가 실현된다면 여기 더 이상 있을 명분이 없어진다고 믿었다.

하지만 잊고 있었다, 사드 기지는 미국 땅인 걸. 그들은 자신들이 공짜로 차지한 이 땅에서 절대 불편하게 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마침내 국방부는 공사 장비를 들여보내 3개월간 경찰을 상주시켜 공사를 하겠다고 했다.

이 일을 진행시키기 위해 그들은 치밀하게 작전을 전개한 듯하다.

먼저 조선일보를 비롯한 소위 ‘보수언론’이 떴다. 그들은 주민들 방해로 공사가 중단되었다고 했다. 우리는 긴장했다. 아, 날이 따뜻해지니 이제 공사를 하겠다는 신호구나.

이어 국방부는 언론에 공사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브리핑을 했다.

‘장병들의 복지’를 위해서라 했다. 지붕에 누수가 되고 거주 공간이 협소하고 열악한 환경이라 했다.

뉴스민을 제외하고 어느 언론에서도 이것이 미군을 위한 복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사드 기지에 거주하는 400명 중 200여 명은 미군이다. 이들은 출퇴근도 불편하고, 음식을 해먹기도 불편하고, 거주 공간도 부족하단다. 

당연하다. 소성리 주민들은 “하늘의 길은 막을 수 없어도 내 땅 앞으로 미군과 미군을 위한 기름과 같은 것은 지나다닐 수 없다.”고 했다. 사실 소성리를 지키는 것은 그들의 요구에서 비롯되었다. 국군을 위한 부식차량과 의료 시설은 막지 않았다. 그들도 내 자식이나 손자 같은 대한민국 아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군은 달랐다. 저 치욕의 4월26일, 썩소를 날리고 동영상을 찍어가면서 유유히 들어가던 미군 장병들은 소성리 어른들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자신들이 자주 가던 곳에 미군 기지가 만들어지고 미군 무기가 들어오고 그곳을 국군이 지키는 이 현실을 마주하고 소성리 어른들은 치욕에 떨어야 했다. 그건 이웃한 김천 농소면 주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상대는 거대한 미국이다. 그 미국의 뜻에 따라 우리 국방부는 기어코 공사해야 한다고 했다. 더구나 사드를 고정화시킬 패드도 깔고 이런 저런 공사를 하고나면 ‘임시’ 배치한 사드는 ‘완전’ 배치된다. 남북 정상회담, 북미회담과 같은 평화로 가는 분위기에 이 무슨 찬물을 끼얹는 일인가? 더구나 사드를 배치할 때 뭐라고 했나? 북핵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 하지 않았던가?

“북핵 핑계 사라졌다. 사드 공사 중단하라!!” 구호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사드를 반대하는 6주체(김천, 성주 소성리, 원불교, 대경대책위, 부울경, 전국행동)로 구성된 사드철회 평화회의에서는 고민을 한 끝에 국방부에 지붕 보수 공사나 오폐수 공사 등은 진행하되 주민들이 참관하게 해달라고 제안했지만(사드와 관련한 공사인지 확인하기 위해) 군사 지역이라 민간인은 안 된다고 거절당했다.

그리고 12일 새벽에 공사 장비를 들이기 위해 4000명의 경찰이 소성리에 들어온다고 한다. 와서는 3개월간 상주하며 공사한다고 한다. 

그렇게 운명의 날을 앞둔 11일, 저녁 촛불집회에 나가면서 짐을 챙겼다. 혹시 잃어버릴지 모르니 새로 산 패딩잠바를 두고 헌 패딩잠바를 입었다. 큰 담요도 챙겼다. 그리고 책도 잃을 것을 대비하여 계간지를 넣었다. 보조 밧데리도 넣었다. 

집회 분위기는 비장했다.

다음날이 600회 촛불집회인데 “600회 선물이 공사 강행이란 말인가?”라며 울분을 토했다.

이길 수 없다는 절망감도 들었다. 그렇다고 그냥 있을 수는 없는 일, 달려가야 했다.

집회를 마치고 소성리로 들어가는 길. 캄캄한 밤길만큼이나 마음이 무거웠다. 그런데 예전과 달리 경찰이 보이지 않았다. 삼거리에 늘 있던 경찰차마저 한 대 빼고는 다 사라졌다. 방송차나 화장실차도 없다. 

더 불안했다. 뭔 작전일까? 우리들이 수적으로 열세인 걸 알고 있어서 그런 걸까? 그러고 보니 예전 8000명, 6000명 동원되던 때보다는 동원되는 경찰 숫자가 적다. 4000명이 적은 수는 아니지만 말이다. 

이번에 저 장비들이 들어가고 나면 우린 얼마나 기운을 잃고 실의에 빠지게 될까?

야속했다. 롯데골프장을 국방부에 넘기고 피해자인 양 행세하는 롯데도 미웠고, 그 롯데에서 일하면서 한 번 반대 목소리도 내지 않았던 직원들도 미웠다.

롯데는 노동조합도 없나? 기업은 망해도 기업주는 망하지 않는다. 직원들을 자르면 그만이니. 사드로 인해 피해를 입으면 구조조정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왜 그 전에 노조가 나서서 한마디 반대 목소리를 내지 않을까?

왜 저 사람들을 잡아들이지 않느냐고 호령하는 ‘보수’언론도 밉고, 툭하면 성조기와 이스라엘기를 흔들며 “김정은이 사드 반대하라고 시키드냐?”던 박사모나 서북청년단도 미우나 가장 야속한 것은 자기네 땅을 미군에게 맡기고 안보와 평화를 얻는다 생각하는 우리 국민이었다.

소성리에 도착하니 사람들로 붐볐다. 낮에 수요연대집회에 참석했다가 머무른 사람들과, 소성리에 또다시 경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사람들이었다. 문규현 신부도 오셨고, 황동환 신부도 낮부터 와 있었던 것 같다. 퇴직하고 농사짓는 작은 파도님도 낮 집회를 마치고 가서 농민회원들과 오겠다고 하더니 먼저 와서 웃으며 인사했다. 기록팀 새하늘 새땅님은 포항에서 달려 왔다가 자정이 넘어 다시 마음만 두고 몸은 떠났다. 출근해야했기 때문이다.

우리 젊은 엄마들도 와서 있다가 아이들 때문에 나가야 했다. 

여성들은 마을회관에서 자고, 컨테이너 건물에는 남성들이 자면 된다고 했다. 1시가 넘어 농소 언니들 옆에 누워 잠을 잤다.

2시쯤 일어나라고 했다. 3시에 진밭교에 모인다 해서 조금 더 잤다. 30분 후 이제 나가야 한다고 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오니 하늘에 별이 총총했다. 머리 위에 북두칠성이 선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단단히 차려 입었지만 공기는 차가웠다.

진밭교에 올라가니 철제틀이 놓여 있고 사이사이에 앉으라 했다. 아까 마을회관에서 여러 사람들이 낑낑 대며 들어 나르던 것이 이것이었구나. 

나는 맨 뒤로 갔다. 사진도 덜 찍히고 덜 무서울 것 같아서였다. 자리는 푹신했다.

어둠 속에서 집회가 시작되었다. 

노래도 부르고 발언도 하는데 갑자기 날이 환해지고 다리 옆 계곡에 물이 졸졸 흘러가고 벚꽃이 활짝 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름답다!”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속절없이 미국에게 넘겨주고 그들의 편의를 위해 자국민을 짓밟고 공사하려는 자들과 그들을 옹호하는 언론인에게 화가 났다. 

아직 경찰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간 보는 거 아닌가 했더니 지금 추풍령에 버스 30대가 대기하고 있다고 했다. 김밥과 빵이 돌았으나 먹히지가 않아 반 정도 먹고 가방에 넣었다. 조는 사람에, 자리를 이탈하는 사람 등 조금 느슨한 분위기였다. 

앞에는 대회를 진행할 수 있도록 트럭이 무대로 쓰이고 그 앞에는 남자들이 피켓을 들고 있었다.

원불교 교무들이 맨 앞자리에 앉고 소성리 어르신들이 그 뒤에 앉았다.

내가 앉은 맨 뒤에도 남자들이 지키고 있고, 트럭 두 대가 놓여 있었다. 그 트럭 너머에도 젊은 사람들이 지키고 있었다. 

트럭에는 ‘북핵핑계 사라졌다. 사드공사 중단하라!’는 글씨가 붙여져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트럭 밑에 우리 김천 사람이 드러누워 최후까지 버틸 각오로 있었다.

우리 수야 겨우 150명 정도. 경찰은 3~4000명. 그들이 힘으로 밀어붙이면 민간인인 우리로서는 당할 수밖에 없다. 제주 강정마을의 비극을, 밀양 송전탑의 비극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