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사상 백문백답(20)- 인자는 고향에서 추방되리라

2018-04-09     이병창 동아대 명예교수

1) 그렉시트

마르크스주의는 끝없이 파산하고 또 다시 되살아났다. ‘불사조’라는 말이 마르크스주의의 운명을 잘 표현해준다. 그만큼 내적인 생명력이 존재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탄생이 있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불타, 시꺼먼 재로 변화하는 과정이 있어야 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1980년대 말 다시 파산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가 몰락하는 지금 세계 곳곳에서 마르크스주의 연구 붐이 일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내적 생명력을 다시 찾으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새로운 마르크스주의는 아직 빛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달리 길이 없지 않은가? 중국과 베트남, 북조선, 쿠바 등 아직도 꿈틀거리는 사회주의 국가를 보자! 밤에 잠들지 못하고 전전반측하는 가운데 그걸 생각하면, 어쩌면 아직도 마르크스주의의 내적 생명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닐 거라는 믿음이 다시 떠오른다.

내가 마르크스주의를 다시 연구해야 하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은 그리스의 민중연합당에 해당되는 시리자 때문이었다. 시리자는 그렉시트의 코앞에서 되돌아서고 말았다. 유럽이라는 신자유주의 체제를 벗어나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촛불 이후 누구나 신자유주의를 벗어나려 하지만 신자유주의 질서를 넘어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한다. 신자유주의 질서 너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지금 신자유주의를 그저 땜질하거나 더욱 강화하는 정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닌가? 이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 너머를 그려내야 한다. 그걸 그리기 위해서 마르크스주의는 하나의 방법론으로서 우리를 도와줄지 모른다.

신자유주의, 그 너머를 상상해보자는 뜻에서 마르크스 사상 백문백답을 시작했는데 어느덧 20회가 되었다. 솔직히 100회까지 끌고 갈 자신은 없다. 어디까지 갈지도 모른다. 그저 갈 데까지 가보자. 오직 신자유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이다.

2) 인자는 고향에서 추방되리라

우리는 레닌으로, 그리고 마오로, 다시 레닌으로 큰 갈지자 행보를 하면서 대체 마르크주의의 정치적 실천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우리가 그들의 투쟁으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를 살펴보았다.

모든 실천 개념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 무엇인가? 우리는 레닌과 마오를 통해 그것이 당과 대중을 연결하는 방법의 문제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지속하는 당 중심과 광범위한 대중, 서로 모순적인 두 요소를 연결하려는 시도, 각기 사회적 조건에 적합한 연결방식을 찾으려는 시도가 바로 그 문제이다. 그것이 레닌의 ‘혁명정당론’이며 마오의 ‘근거지 유격전’이라는 개념이다.

철학은 개념을 발견하는 작업이다. 새로운 개념은 고유한 역사가 있다. 이 역사를 가장 잘 이해시켜 주는 말이 성경에 나오는 말이다. 즉 인자(人子)는 고향에서 추방된다는 말이다. 인자는 왜 고향에서 추방당하는가?

인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에게 인자는 나사렛에 사는 요셉의 아들일 뿐이다. 그러니 고향 사람들은 인자를 알더라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인간적으로 도와준다고 하면서 오히려 그의 신성을 박탈한다.

마찬가지이다. 새로운 개념은 말하자면 신의 아들이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이 개념을 자기와 동류인 사람의 아들로 이해하니, 그 새로운 개념은 오해되고, 결국은 왜곡되지 않을 수 없다. 인자가 고향에서 추방당하듯이 새로운 철학의 개념도 그 지지자 자신에 의해서 오히려 추방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개념이 나왔더라도 그것이 확정되기 위해서는 간고한 투쟁이 필요하다. 그 투쟁은 외부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그것도 새로운 개념의 선구자와 그 지지자 사이에서 일어난다. 새로운 개념은 내부의 투쟁을 통해 비로소 확고하게 뿌리내리게 된다.

레닌의 혁명정당론과 마오의 근거지론을 설명한 이상, 이제 이런 개념들이 레닌과 마오 각각에게 어떤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다시 레닌으로 돌아가자.

▲ 사진 : 1920년 볼셰비키 지도자들. 맨 오른쪽에 레닌이 보인다.[사진 : 노동자연대 홈페이지]

3)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레닌은 망명 이후 당과 대중을 연결한 기관으로서 신문, 즉 <이스크라>를 창간하고, 이를 씨줄과 날줄로 해서 혁명정당을 창당하였다.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당이 건설되었다. 그 후 레닌은 지칠 줄 모르는 힘으로 새로운 세계를 열어나갔다.

이 과정에서 레닌의 다양한 활동과 사유를 몇 마디 개념으로 요약한다는 것은 교각살우(矯角殺牛: 뿔을 자르려다 소를 죽이는)의 잘못을 범할 수도 있다. 그래도 사정상 한두 가지 개념으로 정리하라고 하라면 나는 두 가지로 말하고 싶다. 하나는 혁명정당의 진정한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연속혁명론(이 속에 노농동맹, 혁명의 국제동맹)이다. 두 가지 개념 가운데 우선 혁명정당론을 이해해 보자.

혁명정당은 태어나면서부터 갈등 속에 시달렸다. 바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대립이다. 볼셰비키의 대표 레닌과 멘셰비키의 대표 마르토프는 <이스크라>를 통해 혁명정당을 만들고자 함께 활동했던 동지였다.

그들은 1903년 창당대회에서 당 규약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였다. “당 기구에 참여하는 자”만을 당원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당 기구의 지도를 받는 사람”이라면 당원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로서는 그게 무슨 차이인지도 명확하게 이해하기도 어려운데, 그 차이 때문에 기나긴 대립이 생겨났던 것이다.

이 논쟁에서 일단 멘셰비키가 승리했다. 당 대회가 끝난 다음 레닌은 <이스크라> 편집국에서조차 쫓겨나고 말았다. 레닌이 <이스크라>를 통해 구상했던 혁명정당은 태어나지도 못한 채 유산되었다. 새로운 개념은 구시대의 사유 습관 아래 무자비하게 진압된 것이다.

레닌은 이런 패배에도 쓰러지지 않고 혁명정당을 세우기 위한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레닌은 그 후 볼셰비키만을 따로 모아, 신문(<이스크라> 대신 <전진>)과 중앙위원회를 만들고 따로 당 대회를 소집했다. 기존의 당을 장악한 멘셰비키 역시 독자적으로 신문과 중앙위원회와 당 대회를 열었으니, 러시아 사회민주당은 실제 한 지붕 아래 살고 있는 두 개의 분열된 정당이었다.

4) 레닌의 분노

대체 레닌이 세우려는 혁명정당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자주 사람들은 당 대회 규약에서 레닌의 주장을 기초로, 레닌은 지식인 엘리트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정당을 세우려 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렇게만 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혁명정당을 세우려는 레닌의 이어지는 투쟁을 보면 그런 의문이 들게 된다.

앞에서 말했듯이 당에서 쫓겨난 레닌은 독자적 볼셰비키파를 이끌었다. 레닌의 볼셰비키 위원(중간 간부)은 끈질긴 투사였다. 러시아의 지하의 간고한 조건 아래서 마치 기계화사단처럼 느리지만 확고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1905년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대중적 합법공간이 열렸다. 이 공간 속에서 혁명의 열정에 사로잡힌 노동자, 학생 등 청년세대가 등장했다.

지하에서 활동해왔던 볼셰비키의 위원들은 이런 대중적 합법공간으로 진출할 줄을 몰랐다. 그들은 청년세대를, 과감하고 대담한 행동을 불신했으며, 여전히 과거의 활동 방식, 지하에서 꼼지락거리는 운동방식을 되풀이 했다. 볼셰비키는 새로운 노동자, 학생 등 청년세대를 당으로 끌어들이지 못했다.

레닌은 분노했다. 이 분노는 자신을 지지하는 볼셰비키 위원을 향한 것이었다. 그는 볼셰비키 위원의 팔을 비틀어 당의 문호를 열었다. 그리고 청년세대를 받아들이고 노동자 출신의 새로운 세대를 수용했다. 보다 못한 레닌이 당원의 구성 비율을 ‘2(지식인) 대 8(노동자)’로 확정하기도 했다.

또 보자. 1909년에 이르면 볼셰비키 내부에 다시 갈등이 생겨났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차르는 민중을 무마하기 위해 지극히 왜곡된 의회, 즉 두마를 소집하기로 했다. 두마는 신분별로 투표했는데, 예를 들면 지주가 200명당 1명이라면 노동자는 5만명당 1명 하는 방식으로 선거했다. 1907년에는 더욱 악화된 두마 선거법이 통과되었다.

당연히 이런 선거에 참여하지 말자는 선거보이코트 운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심지어 개인적으로 참여해 당선된 의원조차 사임하고 돌아와야 한다는 소환운동, 최후통첩운동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 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초창기 볼셰비키 세대였던 보그다노프였다.

레닌은 읍참마속(泣斬馬謖)의 마음으로 보그다노프를 비롯한 소환파, 보이코트파를 당에서 제거했다. 이때 레닌은 그가 존경했던 작가 고리끼조차 제명했다. 레닌은 보그다노프를 제명하면서 이들의 문제점은 변증법을 모르는 것에 있다고 하면서 보그다노프의 경험에 기초한 유물론 즉 속류 유물론을 비판하기도 했다. 철학이 제명의 명분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레닌은 이런 보그다노프적인 경향을 가진 사람들, 자신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대중의 열린 공간으로 들어가 대중성을 획득하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을 ‘좌익 소아병자’라는 표현으로 비판했다.

5) 행동을 위한 정당

레닌이 볼셰비키 내부에서 어떻게 투쟁했는가를 보면 비로소 레닌의 혁명정당의 개념이 다가온다. 그것은 지적으로 우수한 엘리트의 정당이 아니었다. 단순히 지적인 우수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행동하는 능력이었다. 그럴듯한 말보다 행동을, 수동적인 기다림보다는 적극적인 행위를, 자기를 지키려는 소극성보다는 대중 속으로 들어가려는 적극성을, 규범과 규율보다는 열린 공간에서의 폭발적 열정을 레닌이 지지했던 것이다.

레닌의 시대, 이런 행동의 특징을 설명할 말이 부족했다. 그는 이것을 ‘자발적인 규율’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이 어떤 말인지 잘 안다. 그것이 바로 ‘자주성’이라는 표현이다. 하지만 레닌의 시대, 레닌은 이를 표현할 수 없었다. 레닌은 실천을 통해 가르치기로 했다. 때문에 그는 멘셰비키를 비판했고, 볼셰비키 위원을 비판했으며, 보그다노프를 비판했다.

이와 같은 혁명정당 개념을 토대로 레닌은 러시아에서 사회주의혁명의 가능성을 찾았다. 러시아는 자본주의라도 후진적인 자본주의이다. 이런 사회에서 사회주의혁명이 가능한 것인가?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논증하는 이론이 곧 연속혁명론, 노농동맹론, 혁명의 국제동맹이라 한다. 이 점은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