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제국의 몰락과 후국의 미래>, 미 제국의 중남미 침탈사(5)

파라과이, 우루과이, 아이티, 온두라스

2017-12-27     김영준 현장기자

파라과이 : 국가인가? 범죄 집단인가?

▲인권유린의 배후 : 파라과이 근·현대사는 세 번의 대규모 전쟁과 내전의 참화로 얼룩져있다. 전쟁과 내전의 끝은 쿠데타였다. 1954년 권좌를 잡은 스트로스너 장군은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반공을 제1의 정책 목표로 설정했다. 언론기관이 폐쇄되었다. 비밀경찰은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이들을 잡아다 고문·살해했다. 모스크바 전경이 인쇄된 그림엽서를 지녔다는 이유로 12살 소녀가 체포되기도 했다. 마틴 알마다의 사례는 대표적이다. 교사였던 그는 학생들에게 인간다운 삶에 관해 가르쳤다는 이유로 끌려가 1년 간 고문을 당했다. 비밀경찰은 그가 고문당하며 지른 비명을 녹음한 테이프와 피 묻은 옷가지를 가족에게 배달했다. 그의 아내에겐 “당신 남편은 죽었으니 시신을 수습해 가라”는 거짓말을 했다. 정신적 고문을 가하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전화를 받은 후 충격으로 숨졌다. 

파라과이 비밀경찰의 고문·살해는 CIA나 FBI의 공조 아래 진행되었다. 이들 비밀경찰은 미국 수사기관의 취조 매뉴얼을 들고 다녔다. 1976년에는 미 FBI 국장이 파라과이 비밀경찰 대장에게 “FBI의 임무에 기꺼이 협조해주어 고맙다”는 서신을 보냈다. 미국의 개입여부가 논란이 되자 미 대사는 “통상적인 차원에서 파라과이 경찰을 교육했다”고 변명했다.(180~182)

▲ 마틴 알마다 By Maria Stella de Almada - Foto tomada por Maria Stella de Almada y cedida a Wikipedia

▲국제범죄 집단 : 파라과이 공권력은 마약 밀매와 무기 밀거래에 개입했다. 7억 달러 상당의 무기가 파라과이를 거쳐 제3국으로 밀수출되었다. 정부 차원에서 여권 장사도 했다. 일반여권은 1만2000달러, 외교관 여권은 5만 달러였다. 세계각지의 마약 밀매범, 테러리스트 심지어 나치 전범까지 파라과이로 몰려들었다. 연간 수입 2400만 달러로 쏠쏠한 외화벌이였다. 장기밀매를 위한 영·유아 납치도 성행했다. 인구의 대다수가 백인계인 파라과이 영·유아들은 북미지역 환자들에게 적합한 상품이었다. 1988년 12월 미 의회 보고서는 파라과이를 남미 국가들 가운데 미국의 대외정책에 가장 협조적인 국가라고 서술했다. 글쎄, 파라과이가 미국에 ‘협조적’이었던 건 분명하지만 ‘국가’보단 범죄집단에 가까웠다.(182~183)

우루과이 : 고문은 예술이다

미국 국제개발처의 지원 : 중남미 국가들 가운데 비교적 민주적이고 평화롭던 우루과이는 1976년 쿠데타로 친미 군부가 집권하면서 공포의 땅이 된다. 미국 정부는 군부에 물자와 인력 지원을 대폭 증강했다. 고문 도구, 고문 기술자, 살상 장비가 공급됐다. 미국 국제개발처(USAID) 산하 OPS(공공안전국) 우루과이 책임자 딘 미트리온은 우루과이 경찰에게 고문기술을 가르치고 직접 고문을 가하기도 했다. 생식기에 전기충격, 고환 압박, 손톱과 치아에 전기충격, 정신 고문 등 다양한 수법이 사용됐다. 그는 “원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인체의 특정 부위에 적확한 고통을 가하는 것은 예술이다”라며 고문을 찬양했다. 적확한 고통을 시험하기 위해 걸인을 붙잡아 죽이는 일도 있었다. 

아메리카군사학교(SOA)가 미국을 위한 군인 간부 양성소였다면, 미국 국제개발처 OPS는 경찰 간부 양성소였다. 1981년 한 우루과이 정보기관 관계자는 “미국 정부가 우루과이 군부에 제공한 교본은 고문 기술에 관한 것이었고, 우루과이의 군·경 간부를 불러 파나마에 있는 아메리카군사학교에서 가르친 내용은 인체의 신경 부위 36곳에 가하는 전기고문 기술이었다”라고 폭로했다.(185~187)

▲우루과이 군부에 파견된 미국 국제개발처 요원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계염령>의 한 장면

아이티 : 진흙 쿠키로 기억되는 나라 

▲최초의 흑인 독립공화국 : 아이티는 콜럼버스의 첫 정복지다. 본래 살던 원주민 타이노족은 멸족했고 지금은 사탕수수 재배를 위해 데려온 아프리카 흑인 노예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프랑스대혁명의 영향을 받은 아이티 민중들은 해방투쟁을 통해 지구상 최초의 흑인 독립공화국을 세웠다. 독립공화국이 수립되자 미국은 한 세기에 걸쳐 무려 25차례나 아이티를 침공한다. 1915년 7월에는 아예 아이티를 점령하여 식민지로 만든다. 미국은 아이티 주민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한 뒤, 이를 내지 못하는 대다수 흑인을 강제노역으로 내몰았다. 또 자신에게 충성할 우익 기득권층과 군·경도 양성한다.(188~189)

▲미국의 민선정부 전복 : 2차 세계대전 종식으로 아이티도 표면적으론 주권국가가 되었다. 최초의 민선에서 빈농 출신 에스티메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산간지대에 유휴 토지를 개간해 소작농에게 집단농장을 공급하고, 도로를 정비하고, 자국에 맞는 산업 모델도 선정했다. 국민들은 그를 제2의 예수 그리스도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우익 군부의 쿠데타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제거된다. 이후 막도르 군부부터 듀발리에 부자까지 이어진 독재는 1986년에 가서야 막을 내린다. 독재가 아이티에 남긴 것은 3만 명 민간인 학살, 영·유아 사망률 아메리카 1위, 80% 이상의 문맹률이었다. 

1987년 아이티에 민주화 요구가 일었다. 민중의 우상으로 등장한 아리스티드를 중심으로 총선실시를 요구했다. 미국은 군부를 앞세워 이를 막으려 했지만, 국제사회 여론에 떠밀려 1990년 국민 총선거를 주선했다. 미국은 아리스티드 당선을 막기 위해 우익후보를 내세웠지만, 아리스티드는 70%의 지지로 당선된다. 그는 부패 척결 운동을 벌이고 IMF 등 국제기구의 불공정성을 비판했다. 결국 아리스티드는 취임한 지 7개월 만인 1991년 9월 미국이 후원하는 군부와 우익 민병대(아이티 진보전선 FRAPH)의 쿠데타로 실각한다.(189~195)

▲아리스티드 재축출 : 2000년 대선에서 아리스티드는 재선에 성공했다. 그는 빈곤 탈출을 위한 사회개혁을 추진했다. 2004년 초 미국은 퇴역 군인과 우익 민병대(아이티 진보전선)를 통해 분란을 조성했다. 이들 반군은 지방도시를 점령하고 대통령 관저에 침입시도도 벌였다. 2004년 2월28일 백악관은 분란을 핑계로 “민주적 원칙을 지키지 않아 야기된 뿌리 깊은 혼돈과 폭력을 목격할 때, 과연 그가 아이티의 지도자로서 적합한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다음날인 2월29일, 아리스티드는 미국 비행기에 강제로 실려 중앙아프리카로 보내졌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나는 한밤중에 미국 정보기관원에 의해 비행기에 태워져 국외로 추방되었다”고 폭로했다. 미국은 아리스티드가 자발적으로 망명을 간청했다고 반박했다. 

그가 해외로 추방되고 아이티에선 살육 광란이 재현되었다. 수도인 프린스항에는 수많은 시신이 산을 이루었다. 유엔군 완장을 찬 미군은 아리스티드 축출에 항의하는 시위대를 붙잡아 반군에게 인계했고, 반군은 그들을 학살했다. 아이티의 새 정부는 공을 세운 민병대원에게 1인당 5000달러씩 격려금을 나눠줬다. 이들은 미국이 공급한 소형 기관총을 들고 거리 청소를 했다. 아리스티드를 지지하던 빈민층을 치우는 청소였다.(195~197)

아이티는 19세기 초 프랑스에 맞서 최초의 흑인 독립공화국을 세운 곳이다. 빈농출신 에스티메와 아리스티드 등 사회개혁 의지를 품은 지도자도 배출했다. 하지만 미국의 계속된 침략을 겪은 아이티는 우리에게 ‘진흙 쿠키’로만 기억되고 있다. 

▲ Haitian Dirt Biscuit by Feed My Starving Children

온두라스 : 니카라과 반군 기지

니카라과 반군 기지 : 니카라과와 국경을 접한 온두라스는 산디니스타 정부 전복을 위한 미국의 전략 거점이 되었다. 미국은 이곳에 산디니스타 정부 전복을 위한 반군기지를 조성하고, 약 1만5000명의 반군을 훈련했다. 미국은 이들을 니카라과로 침투시켜 민간인을 죽이고 공공시설을 파괴했다. 아울러 온두라스 군부에 대해 지원도 병행했다. CIA는 온두라스 군부의 민간인 고문·학살을 지원하기 위해 ‘316 살인부대’를 창설했다. 납치·고문·학살을 전담하는 부대였다. 최소 1만 명 이상이 이들에게 희생되었다. 희생자는 대부분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던 시위 학생, 임금 인상을 요구한 노조 활동가, 군사독재를 비판한 언론인들이었다. 후일 미국 언론이 316 부대원의 만행을 폭로하자 당시 온두라스 미 대사는 금시초문이라며 발뺌했다. 미국의 무기 제공이 오히려 더 큰 희생을 막았다는 말을 덧붙이며 말이다.(198~199)

나가며 

중남미의 비극은 중남미 민중이 열등하거나 무능력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300년이 넘는 기나긴 식민통치와 소수 지배층의 폭압에도 불구하고 중남미 대륙 곳곳에선 민중이 들고 일어섰다. 1910년 멕시코 혁명, 1959년 쿠바 카스트로 혁명, 1970년 아옌데 당선, 1979년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혁명 등 중남미 민중은 무기를 들어 저항하고, 정부를 구성하고, 사회개혁을 시도했다. 다만 중남미는 재수 없게도 제국과 너무나 가까웠다. 수많은 열망이 제국에 의해 좌절됐다. 스페인 식민통치 때부터 형성된 반민중적 지배구조는 미국에 의해 더욱 견고해졌다. 마치 해방 직후 미 군정청이, 조선에 일본이 심은 식민지구조를 ‘양키식’으로 승화했던 것처럼 말이다. 

미국의 중남미 정책은 때때로 혼란스러워 보일 수도 있다. 다른 나라의 내전을 막는다며 각종 노력을 기울이다가, 어디서는 내전을 부추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부정선거를 바로잡는다며 군사개입도 불사하다가, 다른 데서는 부정선거를 지원했다. 또 어떤 반군은 섬멸해야 할 ‘공산주의자’였지만, 어떤 반군은 수십억 달러를 쏟아 부어야 할 ‘자유의 투사’였다. 얼핏 오락가락해 보이지만 미국의 목표는 명확했다. 바로 ‘미국을 따르면 살리고, 그렇지 않으면 죽인다’는 것이었다. 즉 자주노선은 미국의 주적이었다. 

미국은 이를 관철하기 위해 반군을 만들거나 쿠데타를 하거나 군사원조를 했다. 정규군이든, 경찰이든 혹은 민병대든 상관없었다. 테러리스트든, 마약 밀매범이든 누구든지 미국의 명령이라면 상대가 동족이라도 총을 휘갈길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무력을 지배하는 자가 이긴다는 명쾌한 논리였다. 대외정책에서 미국은 언제나 약육강식을 선호했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은 전형적인 제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