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는 무덤

[예술로 계단 오르기]첫 번째 계단 - 시인 조연희, 詩의 사생활 5

2016-06-07     편집국
예술가들에게 삶은 그 자체로 원천이다. 어머니의 품 안에 담겨져 있던 몸의 기억들이 순명의 두레박을 타고 한 가득 예술의 영감으로 길어 올려 진다. 그 안에 담긴 기억들이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한 단계씩 오르고 올라 예술의 열매를 맺는다. ‘예술로 계단 오르기’는 길어 올리는 과정에서 두레박 밖으로 떨어지는 순명의 부스러기들을 주워 모은 예술가의 퍼즐 맞추기다. 그 첫 번째 계단을 조연희 작가가 오른다. <시의 사생활>로…[편집자]

 

스토아학파의 창시자 제논은 손가락 한 개가 삐었다고, 순전히 짜증스런 마음에 목을 맸다. 그 후계자 클레안테스도 잇몸이 곪아 잠시 금식치료를 받았는데, 완쾌되었음에도 ‘죽음의 여로를 이토록 멀리까지 왔으니 이젠 돌아가지 않겠다’며 식사를 거부해 굶어 죽었다고 한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자살 독약이 개발되었다. 죽고 싶은 자는 이유를 원로원에 얘기해 공식허락만 받으면 약을 먹을 수 있었다.

누구든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은 자는 원로원에 가 그 사유를 진술하고 허락받아 스스로 목숨을 버려라. 삶이 혐오스러우면 죽어라. 비운에 사로잡히면 독약을 마셔라. 비탄에 빠지면 목숨을 버려라. 불행한 자는 자기 불행을 상세히 열거하고 행정장관은 그 치료법을 제공하라. 그러면 그의 불행은 끝나리라. (리바니우스, <아테네인의 권고>)

불행의 치료법이 자살이라니... 1982년에 출판된 청하출판사의 <자살의 연구> 중 하필이면 이 대목을 읽고 있을 때였다. 당시 학교에서는 불심검문처럼 느닷없이 가방 조사를 하곤 했다. 군사정부 시절이어서 그랬는지 감히 반감을 가질 생각조차 못 했던 것 같다. 지휘봉을 흔들며 갑자기 선생님 2명이 들이닥쳤다.

“모두들 가방 올려놓고 복도로 나가!”

우리는 소리를 지르며 친구의 등을 밀며 우르르 복도로 나갔다. 한 선생님은 출입문이 있는 쪽부터 가방을 하나씩 열어 볼 것이고 다른 한 선생님은 복도에 줄 서 있는 우리의 복장 검사와 함께 주머니 등을 검사할 것이었다. 손톱 검사, 목덜미 검사, 그리고 목덜미가 닿는 부분의 칼라. 실내화 검사…어떤 아이들은 때가 탄 실내화 위에 하얀 분필 칠을 하기도 했지만 오늘은 너무나 갑자기 들이닥쳐 그럴 경황이 없었다.

차라리 담배 따위가 나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자살의 연구’라니…사실 나는 딱히 자살할 생각도 없었다. 그저 여류 시인 실비아 플라스가 왜 자살했는지가 궁금해 이 책을 읽던 중이었다. 그녀가 말하지 않았는가. ‘피의 분출은 시(詩)다. 그건 막을 도리가 없다’라고. 하지만 내 가방 속에 있는 유서만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빠르게 가방 속에서 봉투를 꺼냈지만 가당키나 한가. 출입문에 서 있던 선생님은 지휘봉을 크게 흔들며 다가왔고 나는 급한 마음에 봉투를 찢었다. 선생님은 내 어깨를 밀며 손에서 종잇조각을 빼앗으려고 했지만 나는 꼭 쥐고 놓지 않았다. 순간 복도로 나가던 아이들의 고개가 일제히 돌려지며 수십 개의 눈동자가 나에게 박혀 오기 시작했다.

왜 그랬을까. 그 시절 선생님들은 분노조절 장애 환자 같았다. 자신의 고함에 점점 더 흥분되는 듯했다. 눈에 섬광이 보였던가. 나는 바닥에 쓰러진 채 모기만 한 소리로 ‘유서에요’ 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엄마’가, 또는 ‘죽음’이 갈기갈기 찢긴 채 교실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날 담임선생님과의 면담을 끝내고 조퇴를 했다. 혼자 터덜터덜 교문을 나선 내 마음은 나락을 베어낸 빈 논 같았고, 빈 논 위에 쓰러져 있는 볏짚 같았다. 가슴 어딘가 타박상을 입은 듯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호송차처럼 봄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호송 당하는 죄수처럼 흩날리는 꽃잎을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수직으로 꽂히는 햇살도 햇빛 창살일 뿐이었고, 시폰 블라우스처럼 부드럽게 감기는 바람도, 꽃향기도 내게는 그저 무언극일 뿐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죽고 싶어.’

시외버스를 탔다. 목적지를 정한 건 아니었다. 어디든 좋았다. 학교에서 조퇴했지만 엄마가 걱정할까봐 집으로 갈 수도 없었다. 나는 차창 밖을 보며 머리나 식히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시내를 벗어난 지 얼마 안 돼서 한 덩이 황갈색 털 뭉치가 보이는 것이었다. 도로 위에 고양이인지 개인지 알 수 없는 동물이 누워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무단횡단하다 차에 치여 죽음을 맞게 된 모양이었다. 로드킬(Road kill). 얼마나 서늘한 말인가. 내장이 터졌는지 주변에 핏물이 번진 채 말라 있었고, 시신은 이미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뭉그러져 있었다. 한때 말랑말랑하고 따뜻했을 몸이 납작하게 도로에 붙어 있었다. 그건 윤장(輪裝)이었다. 빠르게 질주해 가는 차바퀴에 털과 살점들이 그리고 축축한 피들이 마모되어 사라져버리는.

 

누워 있는 그의 몸 위로

그보다 조금 빠른 것들이 질주해 갔다

바코드 같은 타이어 자국을 가슴에 찍으면

곧 그의 장례식도 완성될 것이다

글썽이는 조등을 들고 서 있는 가로등과

잠들지 못하는 무인 카메라 혼자

한 육체가 추억도 남기지 않고

어떻게 소멸되어 가는지

마른기침 몇 개로 굴러다니는지를 응시하고 있었다.

주인이 떠나버린 방향을 바라보며

맨발 한 짝, 첫 정의 형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우두커니 바람의 장례를 준비하고 있었다.

모든 속도는 어쩌면 저렇듯 소멸을 꿈꾸는지도 모른다.

몸이란 이승의 기억일 뿐

그리워해 줄 이가 없다면 오래 흔적을 남길 이유도 없어

조금 느린 살점을 조금 빠른 살점들이 추월해 갔고

죽음에도 가속도가 붙어

비로소 그들은 하나의 속도가 되었다

달리는 무덤이 되었다

                          - 졸시 ‘달리는 무덤’ 전문

 

참 이상한 날이었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일은 몇 분 뒤에 일어났다. 차가 국도로 접어들며 점점 속력을 낼 무렵 이번엔 장끼가… 분명 장끼였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장끼가 쏜살같이 날아와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치는 것이었다. 둔탁한 울림이 차체를 흔들었다. 앞좌석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비명을 질렀고 운전사는 흠칫했다.

해 질 녘 놈은 세차게 날아 어디로 가려 한 것일까. 순간 나는 장끼가 자살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왜 그처럼 빠른 속도로 다가와 머리를 부딪친 것일까. 나는 녀석의 시신이 차바퀴에 깔려 뭉개지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무슨 일이었는지 모르지만 정말 자살이었다면 나라도 시신을 잘 묻어주고 싶었다. 배가 아프다고 엄살을 떨어 버스에서 내렸다. 다행히 장끼는 아직 훼손되지 않았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박제처럼 누워 있었다. 새들도 죽을 땐 눈을 감는지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난 녀석을 비닐봉지에 넣어 근처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비닐봉지에서 녀석이 꿈틀거리는 게 아닌가. 잠깐 기절했던 모양이다. 봉지 안에서 날개를 푸드덕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장끼가 내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삶을 경멸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유일한 방법은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삶이란 버리고 말고 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 다다이스트 쟈크리고)

(다음에 계속)

 

* 조연희 시인은 추계예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시산맥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현재 영상기획 및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빅시스템즈 기획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