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제국의 몰락과 후국의 미래>, 미 제국의 중남미 침탈사(2)

아르헨티나, 니카라과, 과테말라

2017-11-29     김영준 현장기자
(글 내용은 절대적으로 <제국의 몰락과 후국의 미래>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요약과 인용의 경우 모두 괄호에 페이지를 표기했습니다. 다른 텍스트를 참고한 경우에는 따로 표기했습니다.)

미 육군 아메리카 군사학교(SOA)에서 고문, 살인, 테러를 교육받은 중남미 군인들은 자국으로 돌아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았다. 일부는 아쉽게도(?) 독재자가 되지 못하고 반정부 테러나 반군 활동에 만족하기도 했다. 미국은 자신이 애지중지 키운 중남미 군인들을 위해 각종 ‘원조’를 하는 걸 잊지 않았다. 기특하게 정권을 잡은 이들에겐 군사원조와 함께 (쿠데타)정부의 성공을 바란다는 지지성명도 덧붙였다. 테러나 반군활동을 하는 이들에겐 “자유의 투사”같은 명예를 하사했다. 물론 돈과 무기도 쥐여줬다. 

▲ 에세이사 학살

아르헨티나 : 콘도르(독수리) 작전

▲콘도르 작전 : 1976년 3월 비델라 장군은 쿠데타를 일으킨다. 그는 미 육군 아메리카군사학교(SOA)에서 훈련받은 군인이다. 비델라 군사정권은 8년 동안 노조 지도자, 인권운동가, 대학생 등 최소 3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고문·살해했다. 잡힌 민간인들은 머리 뒤에 총을 맞고 죽었다. 일부는 진정제를 맞은 뒤 비행기에서 바다로 던져졌다. 쉽게 상어 밥이 되도록 배를 가르기도 했다. 남자의 생식기를 잘라 입에 물리거나, 여자의 자궁을 도려내 얼굴에 덮어씌우는 등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끔찍한 고문도 자행했다. 

비델라 군부의 이러한 민간인 학살은 CIA가 지원한 콘도르 작전에 따른 것이었다. 1976년 6월6일 아르헨티나 외무장관 구체티는 민간인 학살에 대한 미국의 협조와 양해를 구한다. 키신저 미 국무장관은 “우리의 기본적인 입장은 당신들의 정책이 성공하기를 바라는 것”이라며 요청에 답했다. 같은 해 10월7일에는 “나는 친구의 일이라면 반드시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아르헨티나 군부의 민간인 학살을 재차 지지했다.(105~106)

2016년 5월 아르헨티나 연방법원은 콘도르 작전에 관여한 군 출신들에게 징역 8년에서 25년까지를 선고했다. 1983년 군사정권은 종식했지만, 군부의 막강한 영향력으로 그간 미뤄진 책임자 처벌이었다. 언론에선 이를 두고 “역사적 첫 단죄”라고 표현했지만, 정작 학살을 배후조종한 미국은 누가 어떻게 단죄할 수 있을까? 

니카라과 : 자유의 투사, 콘트라 반군

미국은 지금껏 니카라과를 12차례에 걸쳐 침공했다. 1912년 아돌포 디아즈 친미정권 이후 니카라과의 부는 시티그룹, 코카콜라, 유나이티드 프루트 등 미국 기업이 독점하게 된다.(111) 

▲소모사 독재 : 니카라과의 영웅 세자르 아우구스토 산디노는 1914년 운하 건설을 명분으로 미군의 영구주둔을 획책한 브라이언-차모르 조약에 반대하며 미 해병대를 상대로 5년 남짓 전투를 한다. 1933년 거센 저항에 미군은 철수하지만 미군이 만든 국경수비대는 건재했다. 국경수비대의 초대 대장 소모사는 산디노를 암살하고 권력을 차지한다. 이후 소모사 부자는 44년간 니카라과를 통치한다. 소모사 정권은 민중 저항에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공대지 미사일로 답했다. 민중들이 1인당 GDP 300달러도 안 되는 궁핍에 시달리는 동안 소모사 부자는 약 9억 달러를 해외로 빼돌렸다. 소모사 부자의 이런 폭정은 1979년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 혁명정부가 들어서며 끝나게 된다. 혁명정부는 토지를 소작농에게 재분배하고, 부패 척결과 경제발전 계획을 진행한다. 하지만 미국은 니카라과 정부의 성공을 결코 좌시할 수 없었다.(111~112)

▲ 1987년 콘트라 반군

▲니카라과 반군 : 소모사 독재정권이 붕괴하자, 미국은 수송기를 동원해 자신의 충견인 국가수비대 병력을 국외로 빼돌린다. 이들은 아르헨티나 미군기지에서 살인·고문·파괴 등 게릴라 공작을 훈련받는다. 훈련을 마친 이들 반군은 니카라과와 국경을 맞댄 온두라스 캠프를 근거지로 각종 테러행위를 벌였다. 1983년 반군의 규모는 1만6000명에 달했다. 일명 ‘콘트라 반군’으로 불린 이들의 임무는 니카라과 사회를 마비시키는 것이었다. 학교, 공공 의료시설, 농업 기반시설, 항만, 교량 등을 파괴하고 곡물 창고와 유류 저장고도 폭파했다.  

지식인, 교사, 종교 인사, 민중 지도자 등을 납치·고문·살해하는 것도 주요 임무였다. 가족 앞에서 여성을 강간한 뒤 살해하기, 어린아이의 눈알과 혀 뽑기, 머리가죽 벗기기, 안면에 황산 붓기 등이 자행됐다. 한 생존자는 “반군들은 로사의 유방을 자른 다음 가슴을 갈라 심장을 꺼냈다. 그 자리에 있던 한 남성도 사지가 절단되고 눈과 혀가 뽑힌 채 죽었다”고 증언했다.(113~115) 

콘트라 반군은 왜 이토록 잔혹했는가. 혹시 성악설처럼 인간은 본래 폭력적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서구 문명인들과 달리 중남미인들이 태생적으로 가진 야만성·후진성 때문인가? 답은 제국에게 있다. 

▲미국의 지원 : 콘트라 반군의 수법은 대중에게 공포감을 조성하려고 개발한 미군의 전술 교본을 따른 것이었다. 1984년 10월 AP통신은 90쪽 분량의 반군 훈련 교본을 공개했다. CIA에서 제작·배포한 <게릴라전 수행을 위한 심리전술교본>이라는 책자에는 각종 고문·살인 수법과 대상자 선별법, 강간 등의 내용이 담겨있었다. 물질적 지원도 상당했다. 1981년 11월 레이건 대통령은 반군 창설 비용으로 1950만 달러를 지원한다. 1986년 10월에는 의회 승인을 통해 1억 달러를 지원한다. 그 외 마약, 무기 밀매대금까지 동원해 레이건 재임 기간에만 10억 달러 이상을 쏟아부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콘트라 반군을 두고 “자유의 투사”, “미국을 세운 선조들의 정신과 같다”라는 등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113~116)

과테말라 : 과일 회사, 정부를 무너뜨리다

▲유나이티드 프루트 : 36년의 군부독재, 20만 민간인 학살이라는 과테말라의 비극은 유나이티드 프루트(UFG. 현 치키타)와의 인연에서 시작된다. 과테말라에서 유나이티드 프루트의 지위는 그야말로 대미 종속체제의 집약이었다. 바나나 수출 독점권, 커피와 아카바에 대한 시장 지배권은 물론이고 철도, 통신, 전기 등 국가 기간산업 대부분도 UFG가 차지했다. 경작 가능한 국토의 42%는 UFG 소유였다. 토지를 빼앗긴 과테말라 민중들은 UFG 밑에서 농노와 다름없는 저임금 노동자로 전락했다. 공공산업을 장악한 UFG는 공공요금도 인상한다.(121~122)    

▲아르벤스 정부 전복 공작 : 1944년 아르벤스 대위 등 하급 장교들을 주축으로 한 군사혁명이 일어난다. 노동자, 농민, 학생의 지지를 바탕으로 혁명정부는 농민에게 투표권 부여, 노조 설립 지원 등 개혁정책을 펼친다. 민선을 통해 유권자 2/3의 지지를 받은 아르벤스 정권은 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국가 기간산업 국유화와 토지개혁이 단행됐다. 휴경 토지를 유상 징발하여 소작농에게 저리의 신용으로 분배한다는 내용이었다. 미국과 UFG는 분개했다. 미국은 곧바로 아르벤스 정부 전복계획에 착수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미 국무장관 존 덜레스와 CIA 국장 앨렌 덜레스는 UFG의 대주주였다. 

▲ Allen Dulles 전 CIA 국장

1952년 11월 미 레번워스 군사학교 출신 아르마스를 중심으로 특공대가 구성된다. 플로리다에 작전본부가 설치되고, 5000여 명의 특공대가 훈련을 시작한다. 니카라과, 온두라스 등 주변국에 군사기지 사용협조, 과테말라 해상봉쇄 등 전면전도 대비한다. 결국 압박을 견디지 못한 아르벤스는 1954년 6월 사임한다. 이후 해외 망명을 떠돌던 아르벤스는 1971년 1월 변사체로 발견된다. 공식적인 사인은 “본인의 실수로 뜨거운 목욕물에 삶겨 죽었다”이다.(122~126)

▲36년 군부독재, 20만 학살 : 권력을 장악한 아르마스는 국회를 해산하고 반공법을 제정한다. 공산주의자 색출을 위한 비밀경찰도 부활시켰다. 문맹자의 투표권은 박탈되었다. 소작농에게 분배되었던 토지와 국유화되었던 국가 기간산업도 UFG에 돌려줬다. 이후 과테말라에선 36년 군사정권 기간 동안 고문·학살로 20만 명이 희생된다. 희생자의 97%는 좌익과 관련 없는 산간지대 원주민이었다. 민간인 학살에는 아메리카군사학교(SOA)에서 훈련받은 남미계 미군들이 투입됐다. 군부에 대한 미국의 군수물자 지원도 이어졌다. 중남미에서 미국이 지원한 다른 군부 학살과 마찬가지로 과테말라에서도 석유를 뿌려 산 채로 태우기, 가족들 앞에서 윤간 뒤 살해 등이 기본코스였다.(126~129)

미국의 쿠데타 후원부터 내부 반군 지원, 각종 음모 등을 가만히 보노라면, 머리가 다소 어지러울 수 있다. 하지만 이런저런 복잡함을 한편에 치워보면 미국의 중남미 전략은 매우 간단했다. 어찌됐든 군부를 장악하는 것, 여의치 않으면 반군이라도 육성하는 것, 즉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격언을 충실히 지키는 것이 곧 미 제국의 경영전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