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는 어떻게 얻어지는가?

[김이경의 민족 이야기] 제주, 외세 항전역사 현장에서 느끼는 민중민족주의

2017-10-31     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집행위원장

1. 제주가 ‘평화의 섬’이라고?

도시인들에게 꿈의 섬 제주! 원시의 숨결이 아직 고스란히 간직된 곶자왈, 파란 하늘을 지고 억새 가득한 오름… 우도, 바다 길의 신선한 바람…. 한라산 어승생악에서 바라보는 창창 대해의 감동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제주를 ‘평화의 섬’이라고 부른다. 얼핏 아름다운 이 섬에 어울리는 이름인 듯싶다. 그렇지만 이 이름은 풍광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4.3항쟁을 추모하면서 붙여졌는데,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살풀이 이름 같다. 

▲ 어승생악에서 바라본 제주시와 창창 대해
▲ 우도의 바닷가

4.3항쟁은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려는 미국의 음모에 반대했던 제주 민중에 대한 대학살로 막을 내렸다. 제주 고난의 역사는 4.3항쟁만이 아니었다. 일제강점기, 일본 본토 사수를 위한 격전장이었음을 알뜨르 비행장의 격납고와 송악산 지하 요새가 지금도 생생하게 보여준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왜구의 만행이 빈번했고, 1877년 ‘이재수의 난’을 빌미로 프랑스 함대까지 출몰한 적도 있다. ‘이재수의 난’은 프랑스 선교사와 영합한 제주 봉건 통치배들의 횡포에 맞선 민중항쟁이다. 천주교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프랑스 군함 두 척이 제주에 정박, 제주도민을 모조리 죽이겠다고 공언하며 조선 정부를 협박하였다. 강정마을 미 해군기지 반대투쟁까지, 제주는 우리 민족사의 고비마다 치열한 외세와의 격전장이 되었다.

제주도의 외세와의 첫 격돌은 고려 말로 거슬러 간다. 삼별초의 대몽항쟁 승리와 좌절 이후 100년 동안, 몽고의 직할 통치 지역이었던 제주도에서 몽고 잔존세력을 몰아내는 과정은 ‘목호의 난’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역사적 사건에 관한 논란이 있다. ‘목호의 난’을 ‘제주도민을 포함한 우리 민족과 몽고과의 마지막 결전으로 볼 것인가, 중앙정부에 맞선 제주도민의 민란으로 볼 것인가!’ 그런 논란들을 보며 역사를 공부하다 보니, 문제의 본질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민족문제와 평화, 섬과 육지, 중앙과 지역의 상호관계…. 모슬포항에 휘몰아치는 차가운 겨울바람처럼, 반역(?)의 제주 역사를 해석하는 우리들의 역사관에 대한 고민이 제기된다.

2. 제주도와 대몽 항전

1270년 5월 고려가 몽고에 투항하자, 삼별초는 장기항전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하여 진도로 향한다. 그런데 여몽연합군(고려 정부를 내세운 사실상의 몽고군)은 삼별초가 진도에 도착하기도 전인 7월, 제주에 1000여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바닷가에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삼별초의 제주 진입을 미리 막기 위한 조치였다. 지금도 일부 남아있는 환해장성이다.

▲ 화복1동에 남아있는 환해장성

삼별초에서도 11월, 이문경을 보내 송담천에서 관군과 격전을 벌여 대승을 거둔다. 여몽연합군은 이 전투의 패인을 ‘탐라 사람들의 삼별초에 대한 지원’으로 기록하였다. 제주 민중이 삼별초의 대몽항쟁에 동참했다는 의미이다. 약 1년이 지난 1271년 11월, 삼별초는 제주도를 본격 근거지로 옮긴다. 항파두리성을 중심으로 2∼3중의 성을 쌓아 방어시설을 구축하였으며 제주도민들을 투쟁에 인입하였다. 제주도민들이 삼별초를 적극 지지한 증거는 몇 가지 전설로도 확인할 수 있다. 삼별초 김통정 장군이 여몽연합군에게 밀려 성을 빠져나가려 성담을 뛰어넘었는데 그때 그의 발이 박힌 바위 자국에서 솟은 물이 지금도 남아있는 ‘장수물’이라고 불리는 유적이다. 또 삼별초 병사들이 훈련할 때 과녁으로 사용했다는 바위를 ‘살 맞은 돌’이라고 부르는데, 커다란 현무암 바위에 구멍이 몇 군데 뚫려있다. 남쪽 극랑봉에서 활을 쏘았다는 것이다. 삼별초 전투력이 강하길 바라는 마음을 보여주는 전설이다. 삼별초는 제주도에 항전 기지를 새로 설정한 다음 만 1년 넘게 인천 앞바다로부터 남해 일대에 걸쳐, 재해권을 틀어쥐고 여몽연합군을 물리쳤다. 삼별초의 항쟁은 고려의 몽고 완전 복속을 막고, 몽고의 일본 원정을 가로막은 요인이었다. 그러나 삼별초는 1273년 4월 160여척의 전함과 1만여 명의 병력으로 제주도에 상륙한 여몽연합군과 마지막 결전을 벌여, 장렬한 최후를 마치게 된다.

▲ 삼별초가 쌓았다는 항파두리성 유적 (왼쪽 아래는, 삼별초의 격전장 동제원터 기념비)

삼별초 진압 후 제주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원의 직할지로 통치하던 몽고는 1294년 충렬왕의 강력한 요구로 제주를 고려에 반환하였다. 그러나 완전한 반환이 아니었다. 다루가치(몽고 총독)는 철수하였으나 목자는 철수하지 않았고, 목장을 관리하는 단사관까지 파견하였다. 목자는 말을 기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몽고 기병들이었다. 제주 목장은 일본 원정침략을 위한 전진기지였던 셈이다. 몽고인 목자들은 이후에도 고려 관리들을 제멋대로 살해하고 제주도민을 약탈하였다. 제주도민들은 몽골 강점자들과 고려 관료들의 이중의 억압을 받은 셈이다.

몽고가 쇠락해진 틈을 타 자주권을 되찾은 고려 정부는 제주 몽골침략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싶었으나, 홍건적의 침략과 압록강 건너 몽고 잔여세력과의 전투로 전면적 군사행동을 벌릴 수 없었다. 1366년 지방군과 100척의 병선으로 제주도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자 몽고 잔존세력은 더욱 날뛰면서 고려 관리들을 살해하였다. 1367년 원의 멸망을 예감한 몽고 세력은 제주도를 피난처로 삼으려고 왕실 재산을 옮기고 방어무력을 집결시켰으며 만호부까지 설치하려고 하였다(고려사권42 세가 공민왕 16년 2월). 

한편 원나라를 점령한 명나라는 몽고 대신 제주도를 빼앗으려는 음모를 드러냈으며, 제주도의 말 2000마리를 보내달라고 고려에 요구하였다. 제주도를 고려의 통제 밑에 장악하지 않는다면 제주도는 영영 명나라에 넘어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1374년 7월 고려는 대규모적인 제주도 원정을 단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제주도에는 3∼4000명의 기병을 비롯한 5000명 이상의 몽골 침략자들이 남아 있었다. 최영 장군은 2만5600여명의 군대와 314척의 함선으로 편성된 원정군과 함께 제주도로 떠났다. 몽골 잔존세력은 명월포에서 대항해 나섰지만 고려군에게 밀리게 된다. 저들은 검은데기 오름에서 휴식하던 고려군을 오름비 평원(새별 오름 앞 들판)으로 유인했으나 결국 고려군에 대패하였다. 파멸을 눈앞에 둔 적장들은 일부 자살하고, 처자와 무리들을 데리고 투항하였다. 이 원정에서 100여 년 동안이나 둥지를 틀었던 몽고 침략세력을 완전히 뿌리 뽑았으며 제주는 다시 고려 정부의 지휘체계로 들어오게 된다.

그런데 최영 장군의 진압에 대한 평가들이 좀 엇갈린다. 제주 진압이 3개월이나 걸렸다는 것, 몽골의 제주 지배가 100년이나 되니 혼혈도 이루어졌고, 제주도민은 이미 몽고인들과 잘 사는데 고려 정부군의 뒤늦은 진압에 반발했다는 것이다. 육지와 중앙은 제주도에게 그다지 달갑지 않은 세력(?)이라는 시각이 깔려 있다. 제주 특산물만 공물로 과도하게 수탈해가고, 정작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도 도움을 주지 못하는 중앙이랄까! 제주도는 혹독한 귀양지였다며 제주도의 괸당문화(외지인들을 배척하는 문화)이야기와 함께 저항의 섬임을 강조한다. 

3. 제주의 평화는 어떻게 지켜지는가?

‘목호의 난’을 진압하지 않았으면 제주는 평화로웠을까? 제주도민들은 몽고인들과 혼혈을 이루며 사이좋게 살았을까? 가당치않은 질문이다. 목호는 몽고 기병들이다. 요즘의 주한미군과 같은 존재다. 그들에게 제주도민은 착취의 대상일 뿐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신흥 명나라도 제주도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제주도가 원나라의 직할지였던 만큼 원을 대신하여 중원의 패자가 된 명의 소유가 되어야 한다는 속내였다. 말 2000필을 달라고 요구는 속셈이 빤히 드려다 보이는 수작이었다. 이를 원천 거부할 수도 없는 고려 정부의 처지로서는 명이 직접 제주 원정을 나서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말을 달라는 요구를 원천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러자니 제주도를 틀어쥐고 앉아 고려 정부의 명을 거부하는 몽골 잔존세력들을 진압해야 했다. 혹자는 최영 장군의 제주 장악은 명의 앞잡이 노릇이라고 보는데, 왜곡된 분석이다. 최영의 제주 몽골의 난 진압은 제주를 완전히 고려에 복속하고, 나라의 자주권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보는 것이 옳다. 

원래 지배계급은 외세와의 투쟁에서 불철저하다. 오직 민중들만이 민족의 명운을 건 투쟁에서도 가장 치열한 법이다. 민족의 자주권과 평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이다. 그 후로도 민족의 운명이 위험에 처할 때마다 지정학적 위치가 중요한 제주로서는 폭풍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제주도민은 민족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의 최일선에 서는 것을 회피하지 않고 치열한 자주 항쟁의 길을 택했다. 우리는 반도국가라며 해양으로 오는 외세의 침략에 대해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대륙으로 가는 길목의 분단선 대치상황에만 긴장한다고 할까? 그러나 강화도와 제주도는 외세의 침략을 가장 많이 받은 곳이다. 프랑스마저 우리를 침범한 적이 있다는 것을 잘 모르는 분들이 많은데 강화 병인양요와, 제주의 프랑스함 출동을 기억해야 한다. 몽고의 목장들, 알뜨르 비행장, 강정마을에 들어선 미 해군기지…. 외세의 군사거점이 되었던 제주의 아픔을 잊으면 안 된다. 

제주 4.3평화공원에 가면 당시 학살 현장을 전해주는 해설사가 있다. 내가 본 젊은 여성 해설 강사는 눈빛이 자랑스러움으로 충만해 있었다. 4.3항쟁 피해자의 후손이었는데, 희생자들의 고통을 담담하고 호소력 있게 전하면서도 그 아픔을 뛰어넘는 자긍심이 충만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폭도의 무리니, 빨갱이이니, 갖은 수모와 차별을 받아온 분들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파렴치한 미국과 극우집단, 서북청년단의 살육에 짓눌리지 않은 승리자였고, 고향의 위대한 투쟁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감동적인 역사가였다. 나는 그 뒤 제주를 방문하는 지인들에게 4.3평화공원을 가서 해설 강사의 이야기를 들으라고 권하는 버릇이 생겼다. 제주 바닷가를 돌다가 해녀들의 항일운동 기념탑을 보았다. 가슴이 뭉클해진다.

나는 제주가 진정한 평화의 섬이 되기를 갈망한다. 그 길은 전 민중이 민족의 자주권을 회복하고, 전쟁을 반대하여 평화로운 통일 한반도를 만들어 나가는 길과 하나임을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참다운 평화는 전쟁을 불러오는 외세와의 치열한 투쟁을 통해서 이룩되는 것이며, 제주도의 운명과 우리 민족의 운명은 하나라는 것도 더욱 분명해지는 순간이다!

▲ 새별오름에서 바라본 오름비 평원, 최영장군의 격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