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구 선생 회고록3권 ‘수학자의 삶’(3)

내 학문의 어버이, 박정기 선생님을 만나다

2016-05-24     편집국

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회고록 <끝나지 않은 길> 3권 ‘수학자의 삶’을 연재한다. 1권 ‘가짜 해방’, 2권 ‘찢어진 산하’에 이어진다. 1952년 대학 입학과 재학시절, 그리고 4.19혁명의 격동기에 대한 기록이다. 이 회고록을 통해 독자들은 친일잔재와 분단이 남긴 비극을 한 대학생의 고뇌를 통해 읽게 된다. 특히 군 복무 시기에 맞은 4.19혁명을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매주 화요일 게재된다.[편집자]

▲경북대학교 수학교수로 재직시절, 제자들과 교정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내가 박정기(朴鼎基)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대학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학교를 제적당한 나는 초등학교 교사 자격시험에 합격해 17살부터 초등학교 선생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일을 2년 만에 그만두고, 다시 공부의 길로 들어서기로 결심했다. 막상 대학 진학을 하자니 무엇보다 중학교 1학년 중퇴라는 학력이 문제였다. 나는 우여곡절 끝에 학년을 건너뛰어 영남고등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할 수 있었다. 이때가 1951년 19살의 나이였으니, 그래도 제 나이에 맞게 고3이 된 셈이었다.

박정기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영남고등학교에서 <고등대수학>이라는 3학년 과목의 첫 수업 시간이었다. 그때는 1951년 가을학기로 전선에서는 남북의 청년들이 매일같이 시산혈해(屍山血海)로 죽어나가던 시절이었다. 이남의 군대와 미군이 겨우 서울을 되찾았으나, 바로 그 북쪽 얼마 안 되는 곳에서는 포탄이 터지고 살이 찢어지며 고지에는 날마다 백병전으로 아수라장이던 때였다.

박정기 선생님은 6.25전쟁 전에 고려대학교 수학과에서 교수로 재직하셨다. 또 서울대학교와 연희대학교 등에서도 강의를 하셨다. 그러다가 전쟁을 맞아 남쪽으로 피난을 오셨는데 당시 서울의 대학은 전시 휴학상태라 강의가 없었다. 때문에 피난 온 교수들은 대구에 있는 몇 안 되는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일하면서 생계를 꾸려야만 했다. 그야말로 피난살이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어 고등학교에까지 강사로 나가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일찍부터 박정기 선생님의 제자가 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전쟁 통의 고등학교 3학년 반에는 군에 입대한 사람들 중 이른바 ‘빽’을 써서 후방근무를 배치 받아 군복을 입은 채로 학교에 오는 학생도 간혹 있었다. 대부분 학생들도 공부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고, 졸업장만 받으면 된다는 식이었다. 그러니 수학시간에는 대부분 꾸벅꾸벅 졸거나 아예 엎드려 자는 학생도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 오직 한 사람만이 강의를 열심히 듣고 있었다. 선생님께서도 그 모습이 인상에 깊이 남으셨던지 나를 기억하고 계셨다.

문리대 수학과에 개설된 박정기 선생님의 해석학 수업을 듣기 위해 강의실로 들어간 나는 뒤편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잠시 후 강의실에 들어온 박정기 선생님이 강의를 시작하려고 학생들을 둘러보시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놀란 듯한 얼굴로 나를 보시더니 대뜸 알은 체를 하셨다.

“어, 안 군이 여기에 웬 일인가? 나에게 무슨 할 말이 있는가?”

강의실에 있는 모든 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모아졌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일어나 대답했다.

“아닙니다, 선생님. 문리대에서 선생님이 강의하신다는 걸 알고 오늘 선생님의 강의를 한번 들으러 왔습니다.”

“응, 그런가? 그럼 앉게.”

그러고는 강의를 시작하셨다.

당시 신설된 문리과대학의 수학과에는 박정기 선생님이 주임교수로 오셨다. 박정기 선생님은 대구사범대학 수학과에서 시간강사로 강의하시면서 몇몇 우수한 학생들을 모아 수학 세미나를 조직하셨다. 이들을 단단히 지도하시어 일본 책을 그대로 불러주는 강의가 아니라 진짜 수학 강의가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주셨다. 그렇게 당신한테서 수학을 제대로 배운 제자들을 선발해 문리과대학의 수학 강의를 맡겼다. 덕분에 문리대 수학과는 경북대학교 신설 때부터 학문의 분위기가 올바르게 잡혀 있었다.

이 소문을 듣고 나도 1학년 2학기부터 시간이 겹치지 않으면 문리대 수학과 강의를 들으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내가 문리대 수학과의 강의를 허락도 없이 들으려고, 이른바 도강하려고 간 첫날이 바로 박정기 선생님의 해석학 강의 시간이었다. 당시 문리과 대학은 한 학년에 학생 수가 15명 정도였다. 그 틈에 내가 앉아 있으니 단박에 눈에 띄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강의를 마치고 나서 선생님은 나를 연구실로 데려가 이것저것 물으셨다. 그 다음부터는 선생님의 강의를 시간을 지켜 열심히 들었다. 비록 재적대학은 사범대학이지만 강의는 형편이 닿는 대로 문리대 수학과에 가서 열심히 들었다.

박정기 선생님의 해석학 강의는 참으로 명강이었다. 수학의 논리체계가 빈틈없이 짜여 있고, 군데군데 그런 논리체계가 구성되는 역사적 배경도 상세히 설명해주셨다. 논리체계는 조금의 빈틈도 없이 하나의 구조물을 짜나가는 듯했다. 비록 그것이 논리체계라서 손에 쥘 수도 없고, 눈으로 볼 수도 없는 것이지만 참으로 훌륭한 구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선생님의 강의를 듣다보면 논리체계로 뼈대를 엮어나가는 아름다운 창조물을 보는 듯했다. 선생님은 종종 그 창조물에 취하셔서 칠판에 특유의 필체로 적은 수식을 가만히 들여다보시다가, “역시! 수학은 예술이야!”라고 감탄사를 뱉으셨다. 그러면서 심산유곡의 경관을 보듯 제자들도 함께 그 논리의 창조물에 도취되도록 만드셨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수학은 예술이었다. 그간 사범대학의 강의 때문에 실의에 빠져 있던 나는 그때부터 수학이라는 학문에 흠뻑 매료되고 말았다.

2학년이 되자 선생님은 나에게 <현대대수학> 책을 한 권 주셨다. 그러면서 1주일에 한 번씩 선생님의 연구실에서 일 대 일로 세미나를 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선생님과 함께 한 이 세미나를 통해 수학이라는 학문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또 학문을 하는 사람의 인생관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 선생님의 특별한 배려 속에서 문리대에서 4년 동안 수학공부를 했던 나는 문리대 수학과 대학원에 응시해 합격했다. 선생님을 따라 수학이란 학문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졸업을 앞두고 겨울방학이 가까워지자 한날은 선생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연구실로 찾아뵈니 내게 <해석기하학>과 <좌표기하학> 책 2권을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안 군, 곧 방학이 되네. 방학 동안 이 두 권의 책을 보고 자네가 학생을 가르친다고 생각하고 강의노트를 만들어보게. 겨울방학이 끝날 때 그 노트를 내게 가져오게.”

나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선생님의 말씀대로 그냥 열심히 강의노트를 만들었다. 방학이 끝나는 날 두 과목의 강의노트를 만든 대학노트 4권을 선생님께 갖다드렸다. 선생님은 다른 말씀 없이 그냥 두고 가라고 하셨다. 그 이튿날 선생님이 나를 급히 찾으신다는 말을 듣고 선생님께 달려갔다.

“노트를 만드느라 수고했네. 내가 노트를 만들라고 한 것은 자네에게 그 강의를 맡겨도 좋을지 어떨지 알아보려고 그런 걸세. 꼭 그대로 새 학년부터 강의를 해주게.”

선생님은 따스한 시선으로 나를 보시고, 내 손을 잡아주셨다. 나는 너무나 뜻밖이라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선생님의 손을 맞잡았다. 대학을 졸업한 바로 그 해에 대학 강의를 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선생님께서 나에게 거는 기대는 각별하셨다. 나는 선생님의 지도로 석사학위도 받고, 박사학위도 받았다. 그리고 학자로서의 자질도 배웠다. 그러나 나는 선생님의 기대를 이루어내지 못했다. 유신체제의 광풍을 맞아 수학자로서의 인생을 끝내고 말았던 것이다. 선생님께서 내게 쏟으신 그 은공은 보답하지도 못하고 통일운동가의 인생으로 그 여정을 바꾸어야만 했던 것이다.

선생님은 언제나 제자들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학문은 대를 이어 발전해나가는 거야. 선대가 이루어놓은 터 위에서 그 터를 딛고 올라서는 거지. 자네들이 나를 밟고 올라서게! 그래야 나도 내가 사는 보람을 가지게 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