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권 가수의 대중화

최현진의 LP로 듣는 한국현대사(32) 안치환 : confession(1993)

2017-06-21     최현진 현장기자
▲ 사진출처: 유튜브 화면캡쳐

이른바 운동권 노래의 한계는 선동적이고 투박한 직설적 표현 등으로 대중이 받아들이기에는 부담스럽다는 것이었다. 실제 학생운동권에는 안치환보다 노래를 더 잘하는(?) 가수들이 많이 있었다. 고려대의 김영남, 성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우위영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노래만 부르지 않고 정치와 일상생활 속으로 들어가면서 그 시대의 노래하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리고 시대를 지나 계속 노래를 부르는 몇몇 가수들이 있다. 손병휘, 이정렬, 이지상 등이 그렇다. 이 가수들은 일부 고정적인 팬층을 확보하고 왕성히 활동하고 있지만 그 인기가 대중적이라고 하기엔 다소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반면 안치환은 시작은 같지만 이들보다 훨씬 대중적이고 일반인들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아오며 운동가요의 일반화에 좀 더 일찍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안치환은 대학시절부터 노래 잘하는 학생으로 일찍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87년 연세대 총학생회장 선거 당시 안치환은 노래로 총학생회장 후보를 지원했다고 하는 데 당시 총학생회장 후보 연설보다 노래하는 안치환을 보기 위해 연세대 학생들이 몰렸다고 한다. 87년에 연세대 총학생회장이 된 우상호는 “치환이는 당시 상대 후보를 도와줬는데, 치환이가 노래하면 사람들이 다 그쪽으로 몰려가서 당시 나는 떨어지는 줄 알았다”고 회상할 정도로 노래를 잘 했다. 

학생 때부터 노래 잘하기로 유명세를 타고 졸업 후에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서 1년 남짓 활동하다가 89년 솔로로 본격 데뷔한다. 김광석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서 '동물원'을 거치면서 어느 정도 변화를 시도하는 과도기적 과정을 거치지만 안치환은 그런 과도기적 과정이 없이 바로 솔로로 나온 것이다. 당시 안치환이 솔로로 전향하면서 발표한 음반들은 운동권 가요를 그대로 담은 게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3집을 발표하면서 김남주, 정호승, 류시화 등 시인들의 시작품에 노랫말을 붙이면서 사회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게 민중가요를 대중가요로 업그레이드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러한 노래 표현은 당시 시대적인 상황과 일정하게 맥을 같이하고 있었다. 

90년 3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민자당에서 80년대까지 야권 민주화운동의 상징이던 김영삼씨가 92년 민자당 후보로 집권여당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3당 합당 당시 정치권과 사회적 분위기는 87년 6월 항쟁의 승리로 쟁취한 여소야대 국회를 김영삼 개인이 대통령 욕심 때문에 인위적으로 바꿔버린 것이라며 비난이 거셌다. 

그러나 정작 김영삼 본인은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는 표현을 쓰며 이런 비난을 모면하려 했고, 실제 당선 이후 개혁정책으로 평가가 일부 나아지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김영삼 대통령이 선출된 93년에는 대규모 집회가 많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이런 분위기 변화가 직설적인 운동권 가요를 담았던 1, 2집과 달리 3집에서 은유적 표현을 부담 없게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런 운동가요의 '일탈'이 허용되던 때 나온 안치환의 3집은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했다. 그뒤 안치환은 계속 직설적인 운동권 가사보다는 은유적인 시를 통해 사회 문제를 노래했고, 오늘 대중적으로 사랑 받는 가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