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6월항쟁과 노점상의 저항

도시빈민의 삶과 투쟁(10) : 국제대회 개최 집착한 군사정권과 노점상의 생존투쟁

2017-06-01     최인기 빈민해방실천연대 집행위원장
▲ 사진제공: 민주노점상전국연합

민주화운동의 역사와 함께 하는 노점상 투쟁의 역사

민중이라는 점 하나가 모여 선이 되고 ‘역사’라는 이름으로 면면히 이어집니다. 나라가 벼랑 끝으로 치달려 폭력적 통치를 일삼아도 민중의 거스를 수 없는 힘으로 그것을 일거에 압도하고 역사의 방향을 수정하여 전진해왔습니다. 민중의 위대한 투쟁이었던 1987년 6월 항쟁이 어느덧 30년이 되었습니다. 우리 민중의 위대한 투쟁 역사와 빈민운동과 노점상의 역사도 함께 하는데 노점상들이 거리의 주체로 그리고 당당한 사회적 실체로 나선 지도 30년이 됩니다.

1980년대 전두환, 노태우 군사독재 시기에는 정권의 비정통성을 은폐하고 국민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유독 국제적인 행사들을 많이 개최했습니다. 고도성장을 이룬 성과를 나라 안팎에 선전하기 바빴던 군사독재정권에게 길거리 노점상은 눈엣가시와 같았고 드러내고 싶지 않은 존재들이었습니다. 1983년 IPU(국제금융회의) 개최할 때, 무자비한 단속으로 노점상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고 이로 인하여 개별 노점상 1500여 명이 서울시청 앞에서 항의투쟁을 진행하였습니다. 이것은 노점상들이 집단적으로 단결한 투쟁의 시초였지만 구체적인 조직 없이 즉자적인 저항이라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이후에도 거리질서 확립이나 도시환경정화라는 명목으로 노점상들은 삶의 터전에서 밀려나야 했고,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무자비한 단속 앞에 미천한 존재가 되어야 했습니다. 존중받아야 할 인권이란 없었고, 단지 불법을 저지르는 범법자로서 인식될 뿐이었습니다. 이런 단속에 맞서 1985년 IMF(국제통화기금)/IBRD(세계은행) 총회를 앞두고 자행된 단속을 계기로 <노점상 생존대책위>라는 발전된 형태의 조직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듬해 1986년 아시안게임을 끝내고 12월29일 노점상 양연수씨를 중심으로 <도시노점상복지연합회>로 결실을 보게 됩니다. <도시노점상복지연합회>도 노점상 간의 친목과 상호부조 및 복지증진을 목적으로 출발하였지만 ‘1987년 저항의 시대’라는 세례를 받게 되어 조직적으로 더욱 발전하게 됩니다.

노점상 조직 운동의 시작

1987년 5월20일, 명동성당에 수백여 명의 노점상이 집회를 개최하여 노점상 집행부가 구속되는 것을 계기로 6월 항쟁에 적극적으로 결합하게 됩니다. 그해 거리를 달구었던 시민들의 항쟁은 6.29선언을 이끌어 내고 우리 사회에는 민주화의 바람이 붑니다. 그 영향으로 같은 해 10월19일 <도시노점상연합회>로 다시 명칭을 바꾼 후 '노점상 및 영세상인 보호법' 제정을 촉구하였습니다. 그리고 12월에는 '노점상 양성화 촉구대회'가 명동성당에서 개최되었는데, 경찰의 원천봉쇄에도 노점상 수백여 명이 참가하였습니다. 이렇게 87년 6월 항쟁과 7, 8월 노동자 대투쟁의 영향을 직접 받으며 단결과 투쟁으로 승리를 확신하는 자신을 얻게 되었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나갔습니다. 

해가 바뀌고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자 ‘88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노점상 싹쓸이 단속을 지시합니다. 노점상들은 구청, 시청, 단속반, 경찰, 방범대원, 경비 등에게 항상 단속으로 시달렸습니다. 여전히 조직이 되지 않았던 노점상들은 이들에게 상납 형태로 갈취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상납이 일시적으로 단속 횟수를 줄일 뿐이지 결과적으로 단속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허나 이 시기 노점상들은 더는 예전의 노점상이 아니었습니다. 1988년 4월18일 도시 노점상 생존권과 88올림픽에 관한 공청회를 각계각층이 참여하여 개최하게 됩니다. 물론 노태우 정권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1988년 6월부터 손수레 보관소 폐쇄를 포함하여 대대적인 탄압을 전개합니다. 도시노점상연합회로 결집한 노점상들은 88년 6월13일 성균관대학교 금잔디 광장에서 3천여 명이 모여 '노점상 생존권 수호 결의대회'를 개최합니다. 

집회를 마친 노점상들은 5천여 명으로 늘어납니다. 분노한 노점상들이 투쟁을 결의하며 성균관대 교문을 박차고 시청으로 진출하자 노태우 정권은 크게 당황하게 됩니다. 정권퇴진 운동이 도시 빈민인 노점상에까지 확대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가로막는 전투경찰과 백골단의 만행으로 노점상 17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지만, 분노한 노점상은 6월16일까지 무려 3일 동안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노태우 정권은 강경한 노점단속 방침을 유보하고 손수레 보관소 폐쇄 계획을 보류하게 됩니다. 단결한 노점상들이 승리를 쟁취한 순간입니다. 이 집회를 계기로 노점상 생존권 문제가 사회적으로 크게 여론화되면서 노점상은 하나의 저항세력으로 민중운동진영에서 주목받기 시작하였고 이 날을 기념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서 노점상 조직들은 매년 6월13일에 '6.13대회'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당시 6.13투쟁은 노점상의 대항쟁이었고,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노점상이 사회운동세력으로 우뚝 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투쟁이었습니다. 1988년 8월4일 서울시는 일시적으로 노점단속 중단을, 8월29일에는 국무총리가 노점단속 중단을 발표하였습니다. 노태우 정권은 올림픽을 앞두고 소나기를 피해가자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노점상들이 88올림픽이 가난한 이들을 몰아내고 치러지는 것이 아니냐며 9월17일 경희대에서 '도시노점상올림픽'을 개최하는 등 더욱 단결하고 강고해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힘으로 1988년 10월 드디어 '전국노점상연합'이 결성되어 체계적인 조직의 위상을 탄탄하게 갖추게 됩니다.

노태우 정권은 1989년 4월과 6월 노점상 전면 단속을 발표합니다. 사회기강을 확립한다는 명분이었습니다. 그러자 노점상들은 7월에 '노점상 생존권 시민공청회'를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최하여 대응합니다. 그리고 '노점상 생존권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대책위원회'를 결성하기에 이릅니다. 다시 7월과 8월 명동 성당에서 3천여 명이 모여 농성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명동으로 시청으로 서울시 전역으로 기습시위와 선전전을 벌입니다.

이 투쟁을 통해 현재의 노점관리대책의 전신인 ‘가로가판대 사업’이 추진됩니다. 서울시가 단속으로만 일관하다가 개량적인 정책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정부에서 융자 500만 원으로 전업을 알선하고 젊은 사람을 중심으로 기술교육, 가판대 1016곳을 추가로 허용한다고 발표하며 풍물시장, 서울시장, 신도림, 강원도, 제주도 등 100여 곳의 시영아파트 지하상가 입주할 수 있게 하고 구두닦이 가판대 설치가 추진되었습니다. 위와 같은 정책들로 생겨난 것들은 훗날 모두 사라지면서 실효성이 전혀 없는 것으로 판명이 났음에도 2000년대 서울시를 중심으로 한 '노점상 종합관리대책'이 나오기 전까지 노점상 대책으로 활용되어 노점 감축정책의 시초가 됩니다.

▲ 사진제공: 민주노점상전국연합

노점상 운동 최초의 열사, 이재식 열사

1980년대가 저물어가기 몇 달 전인 1989년 10월16일 거제도에서 장사를 하던 노점상 이재식씨가 분신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거제도에서 핫도그를 굽던 이재식씨는 단속에 항의하여 “이 한 몸 바쳐 노점상을 탄압하는 노태우 정권에 경고한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했습니다. 그리고 57일 간의 투병 끝에 사망하여 1989년 12월11일 경기도 마석에 묻혔습니다. 열사의 부인 황규남씨는 다음과 같이 당시의 상황을 전합니다. 

노점상을 시작한 것이 7월이었어요. 거리는 몹시 뜨거웠어요. 며칠 일하자 저는 실신해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한두 달은 쉬었습니다. 그리고 9월22일경부터 일수 돈을 빌려 리어카를 고치고 다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애들 아빠는 저한테 “단속이 와도 걱정하지 말고 일을 계속하라”고 하곤 했어요. 일을 계속한 지 한 달도 못 되었는데 제가 있던 곳도 단속반이 나타났습니다. 10월13일부터 14일까지 아수라장이었어요. 도청에서 나온 단속반은 닥치는 대로 좌판과 손수레를 뒤집어엎고, 아주머니들은 울부짖고...

그런데 16일 애들 아빠는 괜찮다고 하시면서 반죽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먼저 오토바이에 반죽을 실어 나갔습니다. 조금 후에 제가 나갔는데 단속반 15명이 둘러서 있었습니다. 반죽은 쓰레기 위에 버려져 있었고, 애들 아빠는 안 보이고, 그런데 그놈들이 쓰레기 더미에 제 몸을 눕혀 버렸어요. 그러더니 그놈들은 그 폼 좋다. “사진 잘나 오겠다” 하며 실실 웃는 거예요. 그때 직원들이 점심시간이 되니깐 슬슬 빠져나가고 있었어요.

아무 말 않고 애들 아빠가 밖에 나갔다가 약 20분 후 웬 사이다 큰 병을 사들고 들어 왔어요. 저는 사이다인 줄 알았어요. 사람들이 없었다면 목이 마르던 참이라 한 잔 달라고 하려던 참이었어요. 아빠는 의자 밑에 그 사이다 병을 놓아두었어요. 그때 계장인지 과장인지 하는 놈이 나타났어요. 그때 아빠가 일어나며 “대체 법이란 것이 무엇이냐. 물같이 바람같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거냐”라고 다그쳐 물었더니 “장사를 하고 못하고는 당신들의 사정이니 마음대로 해봐라”고 외쳤어요.

그때 남편이 무슨 쪽지를 그놈에게 던져 주고 밖으로 뛰어 나갔어요. 그런데 밖에서 “여 봐, 어어!” 하는 아우성 소리가 났어요. 깜짝 놀라 뛰어나가 보니 온 몸이 휘발유로 흠뻑 젖어 있었어요. 그때 몇 사람이 남편 쪽으로 달려들었는데 남편이 라이터를 켜며 자기 몸에 불을 댕겼어요. 순간 펑하고 불길이 치솟고, 순식간에 몸은 불기둥이 되고, 저는 실신하고 말았습니다. 

그 때 과장에게 준 쪽지가 유서였어요.

거제도에서 들려온 소식을 들은 전국의 노점상들은 거제도로 달려갑니다. 일면식도 없었던 노점상들이지만 모두 같은 마음으로 분노했습니다. 거제로 몰려가 대대적인 항의투쟁을 진행했으며 열사의 시신을 서울로 모셔와 노태우 정권을 상대로 강도 높은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그리고 57일 간의 투병 끝에 1989년 12월11일 사망하신 이재식 열사를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하고 노점상 운동 최초의 열사로 기록합니다.

노점상 운동 30년, 이제는 민중운동의 중심축으로

노점상 운동이 한국에서 자리 잡고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1980년대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하는 투쟁의 영향이었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정치적 자유와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민중들의 먹고 사는 문제, 공정하며 정의롭고 평화로운 나라에서 살기 위한 문제로 발전한 것은 비단 촛불항쟁뿐만 아니라 모든 항쟁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면모입니다. 

이제 도시 빈민들은 노동자, 농민과 함께 노/농/빈의 단결로 2015년 13만 민중총궐기를 성사하여 박근혜 정권 퇴진투쟁의 포문을 열었으며, 2016년 100만 민중총궐기로 촛불항쟁의 밑불이 되었습니다. 촛불항쟁은 박근혜 정권 퇴진과 더불어 도시 빈민들의 생존권적 요구와 백남기 농민 국가폭력 책임자 처벌, 한상균 위원장 석방,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등을 외치는 범국민적인 투쟁이 되었습니다. 

이제 박근혜를 끌어내리고 구속시켰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요. 어떤 미래가 오더라도 민중들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멈추게 하는 주인들입니다. 노점상, 도시빈민들은 역사의 주인으로 언제나 함께 할 것입니다.

▲ 사진제공: 민주노점상전국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