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자유’와 ‘인권’의 수호자?

[김영준의 아무책 대잔치] '미군과 CIA의 잊혀진 역사'

2017-03-30     김영준 현장기자
항상 스무 살에 더 가까울 줄 알았는데 정신차려보니 서른 살에 더 가까워졌다. 본래 책이라곤 원피스, 드래곤볼 같은 만화책만 보던 덕후였다. 어느 날 선배를 따라 한진중공업 파업현장에 간 게 화근이었다. 우리 사회는 왜 이런 모습일까 궁금했고 일단 아무 책이나 집어 보기로 했다.[필자주]

‘민간인 최소 200명 사망’, ‘최악의 오폭’ 스마트폰을 보다 순간 시선이 멈췄다. 수백의 생명을 앗아간 비극은 ‘오폭’이라는 한 단어로 간단명료하게 설명되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주체도 불명확한 국제동맹군, 그저 심심한 위로를 건네는 미국의 짧은 논평, 끝으로 IS가 ‘인간방패’를 쓴다는 알리바이까지. 죽음의 가해자는 이런 ‘비극’에는 대단히 익숙하게 행동했다. 마치 대응 매뉴얼이라도 있는 것처럼. 15년 전이었을까? 아직 초등학생이던 시절이었다. TV에서는 실시간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라크에서 일어난 ‘비극’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최첨단 군사장비와 정밀타격에 대한 예찬이 이어졌다. 가해자가 안타까워하지 않고 자랑스러워한다는 점이 모술에서의 ‘비극’과 다르다면 다른 점이었다. 아무튼, 철이 들었던 무렵부터 미디어는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미국 편에 서든가, 아니면 토마호크 미사일을 맞던가.”

최근에 읽은 <미군과 CIA의 잊혀진 역사>는 지난 반 세기간 세계 곳곳에서 ‘토마호크 미사일을 맞았던’ 쪽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왜 자유와 인권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미국이 지구 반대편까지 가서 네이팜탄을 들이부었을까? 피란하는 민간인들에게 로켓탄, 폭탄, 기관총 공격을 한 건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책은 이란에서부터 파나마까지 모두 17개국에서 미국이 진행한 군사행동, 정부전복 작전, 암살 기도, 고문학살 등을 추적한다. 중동에서 아시아에서 남미에서 미국은 조금이라도 ‘공산주의적’ 색채가 띄는 정부라면 가차 없이 응징했다. 바로 ‘자유 세계’를 지키기 위해서! 다만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이때 쓰인 ‘공산주의적’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생각하는 용법과는 다소 다르다는 점이다. 이 단어는 마르크스나 레닌 이론을 신봉한다거나 소련의 사주를 받는 걸 뜻하지 않았다. 대신 토지개혁, 경제개혁을 추진한다거나 교육 및 의료 시설을 늘린다든가 혹은 (미국 편에 서지 않고)중립주의를 표방하는 걸 뜻했다. 미국은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중립주의와 사악함을 구분하지 않았다.

미국의 이런 ‘선별’에 의하면 1970년대 말 아프가니스탄은 공산주의의 세계침략 야욕에 맞서 자유의 성전을 치러야 할 곳 중 하나였다. 1978년 인민민주당은 정권을 잡는다. 토지개혁, 공공부문 강화. 정교분리, 문맹타파, 여성해방 등이 새 정부의 주요한 개혁과제로 떠올랐다. 농민들의 부채는 탕감되고, 고리대금제도가 폐지되고, 학교와 진료소가 세워지고, 여성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지난 2세기간 이루어진 것보다 큰 변화가 한 해 동안 일어났다. 모든 게 순조로워 보였지만 아프가니스탄은 한 가지 결정적인 실수를 했다. 바로 소련과 수천 마일의 국경선을 공유한 것이다. 이듬해 미 외무부 관리들은 이 ‘공산주의’ 정권에 맞서 싸울 반군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CIA는 이들에게 게릴라 훈련도 시켰다. 이들 반군은 주로 회교근본주의자들로 부르카(이슬람교도 여자가 입는 겉옷) 쓰기를 거부하는 여자들 얼굴에 산을 뿌렸고, 상대방의 코와 귀 생식기를 자르고 피부를 벗겨 서서히 죽이는 고문을 즐겼다. 또 1984년에는 카불 공항 폭탄테러로 28명을 죽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누가 신경이나 쓰겠나? 미국을 대신하여 ‘공산주의자’만 잘 때려잡으면 대수롭지 않았다. 레이건은 이들을 “자유의 전사”로 불렀다.

게릴라전에 맞서 정부는 소련에 지원을 요청했다. 여기서부터는 흔히들 아는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이어진다. 소련 입장에선 자신들 바로 밑에 반공주의 회교국가가 수립되는 걸 좌시할 수 없었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자신들이 겪은 수모를 소련에도 똑같이 돌려주려 했다. 반군들에게 무기를 공급하고 군사훈련을 하고 사우디아라비아와 파키스탄의 원조도 얻어냈다. 미국의 성전은 성공적이었다. 12년간 이어진 전쟁은 ‘소련의 베트남전’이 되었다. 전쟁 이후 소련은 해체수순을 밟는다. ‘자유 세계’가 승리했다! 그렇다면 자유 세계의 승리가 아프가니스탄 인민들에게 가져다준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사망자 100만 명, 불구자 300만 명, 그리고 피난민 500만 명 이상”의 상처가 남았다. 반군들은 회교정권을 수립했다. 이제 여자들은 부르카를 쓰지 않으면 “태형, 신체 절단 및 공개처형”을 받게 되었다.

아프가니스탄의 이야기는 미국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 했던 수많은 노력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라크엔 1억7700만 톤의 폭탄을 선물하고, 캄보디아에선 초토화 작전을 진행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에선 50만 명이 학살되는 걸 도왔다. 가끔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미국이 조금 강압적이긴 해도 다른 ‘제국’들보단 낫지 않느냐는 것이다. 동의에 의한 지배라든가 문화적 포섭이라든가 하는 말들이 주석처럼 붙었다. 미국은 어디까지나 소프트파워를 중시하는 세련된 ‘제국’이다. 글쎄? 대통령이 넥타이를 풀고 셔츠 소매를 걷으며 연설하고(물론 지금은 아니다), 유머와 스웩이 넘치고(지금 분도 웃기긴 하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이건 애도를 표한다) 모습에서 그런 ‘세련됨’을 느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바마가 여성인권을 말할 때 지구 반대편에선 미국제 폭탄이 여성과 어린이를 덮쳤다. 시간당 3발, 하루 평균 72발, 1년에 2만6171개의 폭탄이 투하됐다. 마치 레이건이 자유와 인권을 말하는 동안 미국제 HU-1 B 제트 헬리콥터가 남미의 농민들을 향해 불을 뿜은 것처럼 말이다. 미국의 소프트파워와 세련됨이 주목받는 동안 하드파워와 잔인함은 역사에서 잊혀졌다. 하지만 민간인 오폭의 ‘비극’이 보여주듯 잊혀진 역사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