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L기 폭파사건과 군정종식의 실패

다시보는 부정선거③ : 지역구도 고착과 야권분열의 출발점 된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

2017-03-22     허수영 기자
▲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는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4자구도로 치러진다. [사진출처 : 유튜브 화면캡처]

1987년 6월29일 신군부세력을 등에 업은 민주정의당 대선후보 노태우가 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개헌에 동의한 이른바 6.29선언을 발표했다. 이로 인해 그해 12월 벌어질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들은 16년 만에 다시 자신의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을 수 있게 됐다. 실제로 직선제와 군정종식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대단했으며 이런 관심은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89.2%의 높은 투표율로 나타났다.

직선제만 도입되면 정권교체가 가능할 것 같은 분위기도 있었지만 막상 선거를 앞두고 민주화운동의 두 거두인 김영삼, 김대중 이른바 양김이 분열하면서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통일민주당 대선 후보 선출 문제를 놓고 합의가 지지부진하자 김대중은 11월 대선을 불과 한 달가량 앞두고 지지세력과 함께 탈당해 평화민주당을 창당하고 독자출마를 강행한다.

김대중은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한 김종필까지 가세해 4자 구도가 될 경우 수도권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을 자신이 당선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른바 ‘4자 필승론’으로 분당과 출마를 정당화했지만 막상 양김의 지지율은 엇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민정당에서 내세운 노태우가 반드시 당선된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러던 중 선거를 약 2주 앞둔 11월29일 바그다드에서 출발해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858편이 인도양에서 폭파돼 탑승객 115명 전원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사건 발생 이틀만인 12월1일 현지조사단에 의해 하치야 신이치, 하치야 마유미라는 이름을 쓰는 김승일, 김현희 두 사람이 바레인 공항에서 용의자로 체포된다. 두 사람은 북한공작원이라고 발표됐으며 이로 인해 이 사건은 초기부터 북의 소행으로 굳어진다.

김현희가 밝힌 범행사유는 “88올림픽 방해, 선거분위기 혼란 야기, 남한 내 계급투쟁 촉발” 등이었다. 이로 인해 반북감정이 최고조에 이르면서 선거판은 노태우에게 유리한 국면으로 전개된다. 심지어 김대중은 북한의 KAL기 폭파 음모에 연루돼 있다는 루머까지 돌았다.

▲ 고도로 훈련된 북의 공작원이라는 김현희는 체포 8일만에 자신의 범행을 자백한다. [사진출처 : 유튜브 화면캡처]

그러나 KAL기 폭파가 과연 실제로 북의 소행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피해자 유가족을 포함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난 2006년과 2007년 두 차례에 걸쳐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서 조작이 아니라고 발표했지만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것이 많다.

당시 용의자들이 사용했다는 폭약으로 과연 보잉707급 비행기가 한 번에 폭파되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부터, 고도로 훈련된 공작원이라는 김승일, 김현희 왜 도주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는데 손쉽게 체포되고 김현희는 8일 만에 범행을 자백했는지 등등 의혹을 열거하자면 책 한권 분량이 나올 정도이며 실제 KAL기 의혹을 다룬 많은 국내외 저서들이 있다.

물론 13대 대선에서도 언제나 등장하는 부정투표함 논란은 빠지지 않았다. 대선 당일 오전 11시 투표가 진행되던 구로구청에서 구로구 선거관리위원회가 의문의 투표함을 몰래 빼돌리다가 발각됐다. 이어서 의문의 투표함과 투표용지, 인주 등이 잇달아 발견됐다. 결국 이에 항의하는 시민들과 학생들이 구로구청을 점거하고 농성에 돌입했고 정부는 백골단 등 경찰력과 용역을 동원해 1034명을 연행하고 208명을 구속했다.

이후 중앙선관위가 문제의 투표함을 되찾았으나 이미 대선 결과에서 노태우 후보와 김영삼 후보의 표차가 200만 표 가까이 났기 때문에 당락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며 이 투표함에 개표를 진행하지 않았다. 이 투표함은 30년 가까이 봉인돼 있다가 지난해에야 개표됐다. 개표 결과는 유효표 4243표 중 노태우가 73.8%인 3133표를 득표한 것으로 나왔다. 당시 구로구(을) 선거구에서 노태우 후보가 득표한 비율이 약 28%였다는 점을 볼 때 부정투표가 있었다는 의혹을 갖기에 충분하다. 물론 3천표 정도는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으나 당시 이런 투표함이 전국에 몇 개나 될지 모르기 때문에 13대 대선에서도 부정한 투·개표의 규모가 어느 정도일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13대 대선 개표 결과, 노태우가 36.6%로 당선되고 김영삼이 28.0%, 김대중이 27.0%, 김종필이 8.1%를 받은 것으로 나왔다. 양김의 분열과 KAL기 사건, 각종 부정 의혹에도 불구하고 민주진영 후보가 얻은 득표는 과반이 훨씬 넘었다. 개표가 끝난 직후 김영삼은 “이 선거는 부정선거이며 무효임을 규정하고 투쟁하겠다”고 발표했다. 김대중 역시 “부정선거를 저지르지 않았으면 내가 이겼을 것”이라며 투쟁의지를 밝혔다. 그러나 대선 이후 곧바로 다음해 4월 치러질 총선 체제에 들어가면서 대선 부정을 밝히려는 노력은 유야무야됐고 노태우의 대통령 취임은 기정사실이 되고 말았다.

시민들의 피와 땀으로 일군 6월 항쟁의 결과로 쟁취한 13대 대선은 이렇게 군정의 연장과 민주세력의 분열, 지역감정의 고착화라는 씁쓸한 결과로 끝나고 말았다.

▲ 지난해 7월 중선관위는 문제의 13대 대선 구로구(을) 투표함을 열어 개표를 진행했다. [사진출처 :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