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융성은 진행형이다

김종선의 문화정책 돌아보기 15-더불어민주당 표창원의 징계결정은 검열의 지속

2017-02-03     김종선 문화정책기획자
▲ 문화체육관광부 문화융성 기획영상 일부 캡쳐

블랙리스트는 계속될 것이다

박근혜의 ‘문화융성’은 블랙리스트다. 차기 집권이 유력한 민주당의 ‘문화융성’도 블랙리스트가 될 것이다. 자신들만의 잣대로 재단하는 예술 검열의 시대는 계속 될 것이다. 민주당은 ‘더러운 잠’ 전시와 관련하여 표창원 의원에게 6개월의 당직정지의 징계를 결정했다. 이는 표창원의원이 사전에 논란(?)이 될 만한 작품을 가려내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징계다. 즉 사전 검열하지 않음에 대한 징계다. 공식적인 절차를 통한 징계다. 결국 민주당이나 박근혜 정부나 최소한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다를 것이 없다. 탄핵의 주요 사유로 특검이 지목하고 있는 예술 검열의 블랙리스트를 합법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판결이다. 징계의 부당함은 지난 기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작품에 대한 예술가 스스로의 책임이, 사회적 잣대와 관행이라는 모호한 근거와 나아가 정치는 예술과 다르다는, 가장 유력한 대통령 후보 문재인 전 대표의 말로 인해 검열을 당연시하는 결과가 공식화됐다는 것이다. 어느 교수의 지적처럼, “표현의 자유란 작가의 생각을 표현할 자유이기도 하지만 그 생각을 대중이 씹을 수 있을 자유이기도 하다”는 원칙이 무력화되었다. 그것도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주도하고, 그 이유 중의 하나로 ‘블랙리스트를 통한 예술가의 사전 검열’을 문제 삼고 있는 민주당에 의해서. 결국 민주당 정권은 최소한 문화정책에 있어서는 변화를 기대할 수 없게 됐다.

문화 대통령 김대중

문화 대통령이라는 말이 어느 순간부터 유행하게 됐다. 아마도 93년부터 시작된 문민정부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영화 쥬라기공원 한편이 현대자동차에 맞먹는다.’며 문화산업의 고부가가치를 주장할 때부터 또는 같은 시기 삶의 질 향상을 국정의 주요 목표로 삼으면서 삶의 질의 중요한 기제인 문화의 진흥이 얘기 되면서 소위 ‘문화를 잘 진흥시킬 대통령, 문화대통령’이 필요하다는 말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영삼 대통령은 문화와 절대적으로 거리가 먼 사람이었고 당시의 시기는 검열이 공식적으로 존재했고, 헌법재판소의 96년 영화검열 위헌 결정 등 문화정책의 변화가 요구되던 시기였다.

필자가 문화정책의 일을 시작하던 시기도 그때다. 그래서 97년 주도적으로 만든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문화정책 공약의 주제는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였다. 제대로 문화 대통령을 꿈꾸었었다. 결론적으로 김대중 정부는 문화정책의 근본적 변화를 이끌어 냈다. 물론 정부 주도이기 보다는 국회의 주도로 입법화와 문화정책의 개혁이 주효했다. 의회에서 정책의 변화에 참여한 것은 멋진 경험이었다. 이는 의회의 역할이 정부의 모순을 얼마나 많이 바꿀 수 있는 지에 대한 경험이기도 했다. 문화정책 관련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솔직한 표현은 ‘문화를 가장 잘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대통령’이었다. 영화계가 선거운동 기간 중에 보여준 지지에 대한 감사도 있었겠지만 집권 5년 내도록 문화부를 간섭하지 않고 현장 문화계의 의견이 반영될 수 있도록 도운 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다. 아마도 유일하게 문화대통령이라 할 수 있는 이가 있다면, 바로 김대중 대통령이라 확신한다.

문화정책비서관이 없었던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이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언급해야할 차례이다. 지난 기고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필자는 ‘노무현을 지지하는 문화예술인 모임(이하 노문모)’의 간사 역할을 했었다. 노무현 정부 인수위원회의 문화정책 행정관이었다. 문화부장관 정책보좌관의 역할을 했던 ‘문화행정혁신위원회 간사’의 역할도 했다. 노무현정부의 탄생과 초기 방향을 잡는 과정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결론적으로 문화대통령이 될 수 없었다. 나아가 문화의 암흑기를 연 대통령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노무현 정부는 문화계가 주도적인 참여를 하면서 만들어지는 과정에 큰 영향을 미친 정부였으며, 노문모와 이창동, 문성근 등 많은 문화계 인사의 참여가 열어놓은 ‘문화적 정부’였다. 그러나 이창동 장관의 ‘문화 정책 매뉴얼 화와 거버넌스 중심의 행정 구조 개혁’은 장관의 경질과 더불어 사라졌다. 이후의 문화관광부는 관료체계가 강화되고, 거버넌스는 후퇴하였다. 당초 장르별 자율적 합의기구였던 ‘문화예술위원회’는 장르대표자들의 협의체로 변절되었고, 문화산업의 장르별 진흥위원회도 없던 것이 되고 오히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강화되었다. 영화진흥위원회와 같은 장르별 진흥위원회는 사실상 거버넌스를 위한 견제와 행정참여위원회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관료중심의 밀실행정이 아니라 현장의 예술가, 창작가가 참여한 거버넌스의 실현 장치인 것이다.

김대중 정부가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팔 길이 원칙’을 지키려고 의회와 함께 노력했다면, 노무현 정부의 중반부터는 관료중심의 문화행정체계를 오히려 강화 시킨 결과를 낳았다. 이는 결과적으로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문화정책 파행의 토대가 되었다. 노무현 정부의 문화정책에 대한 인식의 수준을 드러내는 단적인 사례가 바로 문화정책 담당 비서관이 청와대에서 없어졌다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 때 만들어진 문화정책비서관은 교육문화수석실 산하의 문화정책 담당 전문 비서관의 역할을 하는 청와대 문화정책 조정의 타워다. 사실 교육의 중요성 때문에 대부분 교육문화수석은 교육계 몫이었고 문화정책의 최고 타워 역할을 한 것이 문화정책 비서관이었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 때만 문화정책 비서관이 없어진다. 장관 보좌관제의 신설에 따라 없앴다는 핑계는 문화부에만 적용했다는 사실에서 변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결국은 노문모나 이창동, 문성근 등 문화계의 영향력을 청와대에서 배제하기 위한 의도적인 조치였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런 사실을 몰랐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그분과 함께 하고 싶었던 ‘문화 대통령의 이름’을 부를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노무현 정부는 문화 진흥의 정부가 아니었다.

문화행정의 관료 중심주의

현재 진행형인 박근해 대통령은 이미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보여주듯, 최순실-차은택의 문화체육관광부 농단에서 말해주듯 박정희와 같은 문화말살의 대통령이었다. 이명박 대통령 역시 문화는 안중에도 없고 인사정책을 비롯하여 문화정책을 통제정책으로 전환하려 시도했다. 일련의 문화정책의 변화를 통해 필자는 문화행정과 관료의 역할에 대하여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김영삼 정부는 문화정책이 중요하다고 ‘허장성세’하면서 외면한 관료 중심의 문화행정을 했다. 김대중 정부는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고자’ 노력하면서 관료 중심의 행정에 현장의 예술가와 창작가가 역할을 늘려갈 수 있는 토대를 닦은 관료 중심 행정의 변화를 시도했다.

노무현 정부는 초기 인수위와 이창동 장관의 역할에 의해 거버넌스 체계의 전면적 확산을 준비했으나, 좌초됐고 결국 관료 중심 행정은 김영삼 정부 때보다 오히려 강화됐다. 김영삼 정부 때는 사실 문화부 출신 중심의 단선적 관료구조가 아니라 교육부, 체육부 등 많은 부처의 통합과 분리를 통해 관료 구조가 복잡해서 일종의 서열에 따른 체계화가 덜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 하반기부터 문화부의 관료 중심 체계는 문화부 출신을 중심으로 단단한 구조를 갖게 됐다. 결국 현재와 같은 관료중심 행정체계가 자리 잡게 됐다. 이명박 정부의 인사 파행에서 간접적인 심부름의 역할을 했거나,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과 차은택의 농간에서 실질적인 부역의 역할까지 하게 됐다. 중요한 인사들을 제거하고 인사권의 힘을 보여주면서 농단을 할 수 있는 구조를 형성했다. 관료 중심 행정이 효율성은 있을 수 있으나, 지금과 간은 시대에서 관료 중심은 군사정권과 같은 구태다. 민간참여 거버넌스 행정의 필요성은 이미 확고한 방향으로 추진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정부 3.0 조차 정부 부처 간, 또는 민간과의 거버넌스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이명박 정부부터 관료 중심의 행정은 더욱 강화됐고, 박근혜 정부에서는 박정희 독재 시절처럼 부역 관료가 빈번히 나타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그 대표적인 부처가 문화체육관광부이기도 하다. 탄핵으로 대통령 뿐 아니라 문화정책이 개혁이 이뤄지길 희망했다. 그리고 새 정부에 거는 기대도 컸다.

검열은 끝나지 않았다

민주당의 검열에 대한 기준 없음은, 문재인 전 대표의 ‘정치와 예술 분리’운운은 노무현 정부 문화정책의 실패를 되풀이 하겠다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더러운 잠’ 사건은 예술가들의 ‘자기검열’을 촉구하고 있고, 국회 공간뿐만 아니라 서울 광장이든, 공공기관이든, 어디든 사전에 작품을 검열하게 할 것이다. 울려 퍼질 노래를 검열할 것이고, 걸려야할 그림을, 전달되어야할 전단을, 읽혀 질 시를, 구호를 검열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문화융성’은 끝나지 않았다. 민주당에게 문화 개혁을 기대할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