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푸어, 별이 되고 싶었던…

[예술로 계단 오르기] - 시인 조연희, 詩의 사생활2

2016-05-10     편집국
예술가들에게 삶은 그 자체로 원천이다. 어머니의 품 안에 담겨져 있던 몸의 기억들이 순명의 두레박을 타고 한 가득 예술의 영감으로 길어 올려 진다. 그 안에 담긴 기억들이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한 단계씩 오르고 올라 예술의 열매를 맺는다. ‘예술로 계단 오르기’는 길어 올리는 과정에서 두레박 밖으로 떨어지는 순명의 부스러기들을 주워 모은 예술가의 퍼즐 맞추기다. 그 첫 번째 계단을 조연희 작가가 오른다. <시의 사생활>로… [편집자]

‘업장 소멸의 집’

우리 집에서 산을 하나 넘어가면 정업원(淨業院)이 나온다. 단종의 아내 정순왕후가 머물던 곳. 잘 알려져 있듯 단종은 삼촌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유배지에서 객사한다. 정순왕후는 정업원이라는 조그만 승방에서 머물며 날마다 동망봉에 올라 단종이 죽은 영월쪽을 바라보며 울었다고 한다. 淨業院. 한자로 직역하면 업을 씻어내는 집 정도가 될까. 어린 나이에 남편을 앞서 보내고 65년이나 비구니로 살아야 했던 정순왕후의 업장은 다 소멸되었을까.… 돌이켜보면 그곳에 살던 그 시절, 우리 집이야말로 정업원(淨業院)이었다. 가족 모두 업장소멸을 위해 그리도 슬프게 서로를 할퀴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정순왕후 송 씨는 이곳 ‘자줏골’ 빨래터에서 붉은 물감을 들여 생계를 이어갔다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을을 예전에는 ‘자줏골’이라 불렀고 한양의 아낙네들은 이를 팔아주려고 일부러 자주끝동을 달아 입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일까. 이곳의 노을은 서러운 붉은색이다. 생리혈 같은 황혼이 산자락 굽이굽이 붉게 물들이던 곳. 정순왕후의 한이 섞인 붉은색 물감이 아직도 흘러나오는 듯 이곳의 노을은 떡이 지도록 붉은 색이다. 이곳에서 매일 노을을 바라보던 나는 나도 모르게 붉은 서러움을 수혈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슬픔에 민감한 체질이 돼버렸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유배를 간 것도 아니면서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엄마는 정순왕후도 아니면서 소일거리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낮에는 이불 만드는 일을 했다. 홑청 위에 캐시밀론 솜을 평평하게 펴서 꿰맨 후 훌러덩 뒤집어 솜이 골고루 가도록 탁탁 털었는데 그때마다 플라타너스 씨앗처럼 솜털이 방안 가득 날리고는 했다. 하얀 마스크로 입을 가린 채 눈썹에도 머리에도 하얗게 솜 가루를 뒤집어쓴 엄마는 자못 비장해 보였다. 먹고 사는 문제에 관한 한 어머니는 못할 일이 없어 보였다. 온종일 이불을 몇 채씩 만들고는 파김치가 된 몸으로 다시 밤새도록 재봉틀을 돌렸다. 팔다리가 모두 해체된 봉재 인형들이 방안 가득 쌓여있는 것은 기괴하기까지 했다. 때때로 눈 코 입이 없는 인형들이 왁자지껄 마치 개구리 울음소리로 우리를 비웃는 듯했다. 그때 나는 알았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죽음도 전염병도 아닌 가난이라고…나는 가난한 어른이 될까 봐 겁이 났던 것이다.

길을 잃다

낙산 아래 세워진 최초의 서민 아파트, 그곳이 우리 집이었다. 긴 회랑 같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직사각형의 대문들이 일렬횡대로 줄 맞춰 있는. 똑같아 보이는 그 대문들 앞에서 어린 시절 나는 얼마나 자주 길을 잃었던가. 그래서 내게는 이곳이 미로처럼 느껴진다. 아니 이 동네 전체가 내게는 미로로 느껴졌다.

서민 아파트에서 45도 각도로 비탈진 가풀막을 오르면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성곽의 높은 돌담을 만나게 된다. 서울성곽은 조선 태조가 한양을 수도로 정한 후 1396년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축조했다고 하는데 이 성곽을 따라가다 보면 길을 잃기 일쑤였다. 어린 시절 나는 나가는 문이 어딘지도 모른 채 너울너울 앞서가는 성자락과 경주를 벌이곤 했다.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 성벽은 숨겨놓은 허리를 내밀었고 난 다시 긴등을 달려야 했다. 언제부터 성담벼락을 기어오르기 시작했을까. 이곳에서 유년을 보낸 아이라면 무릎에 추락의 꿈을 하나쯤 갖고 있다. 휘어진 못 같은 구부러진 적개심도 하나쯤 갖고 있다. 그래서일까. 이곳에는 유난히 깡패가 많았다.

먹어도 늘 배가 고팠고, 달려도 늘 제자리. 우리는 알 수 없는 미로 속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끝없이 돌고 도는 물레방아, 늘 제자리인 다람쥐 쳇바퀴. 에셔의 그림처럼 뫼비우스 띠처럼, 로저 펜로스의 삼각형처럼 우리는 악마의 고리에 갇혀 이곳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뫼비우스/ M.C.에셔(1898~1972)

 

그 여자네 집은 개미굴이었다. 새벽종이 울릴 때마다 허리가 짤록한 사낸 기역자로 꺾여 복도를 걸어 나갔고 가로등을 매달고 어두워져서 돌아왔다. 쥐며느리가 열심히 습기를 물어 나르던 동숭시민아파트 28동 305호, 그곳에서 여자는 뻐걱삐걱 하루 종일 부라더 미싱을 밟고 있었다. 걸핏하면 적화야욕 빨갱이처럼 불온하게 밥상을 물들이던 노을. 벽에 걸린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 뒤로도 검은 곰팡이들이 스멀스멀 무례하게 피어나기도 했지만, 뭐 그 시절 배고픔은 고작 경제개발5개년계획 같은 것이었으므로 사진틀 속에 비상금으로 꼬깃꼬깃 접어놓은 희망.

여자의 가난은 이제 매일 복리식으로 불어나고 있었다. 일찌감치 신용불량자가 된 사낸 소인이 찍힌 압류경고장의 모습으로 구겨져 있었고 시대가 바뀐 줄도 모르고 그 여자 아직도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부터 저녁까지 삐걱삐걱 녹슨 다리를 구르고 있었다. 무저갱(無底坑)의 검은 밥상이여, 밥공기에 마른 밥알 모양 들러붙어 있는 식구들. 이따금 섬유질 같은 슬픔을 쭉쭉 찢어먹다 왈칵 목이 메기도 했다. 몇몇은 들것에 나가기도 했지만 그들이 떨구고 간 페르몬들은 죽음도 잊은 채 여전히 단순노동을 반복하고 있는, 동숭동 산127번지 산비알.

피곤에 지친 개미 한 마리 오늘도 제 몸뚱이보다 더 큰 먹이를 밀어 올리고 있었다.

- 졸시 '워킹푸어' 전문

 

하루가 멀다 하고 어디선지 날카로운 사기그릇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비명이 들려왔고 콘크리트 벽 사이로 둔중한 몸부딪침 같은 울림이 전해졌다. 어떤 날은 화장실 하수구를 타고 아이의 울음소리가 슬프게 공명되기도 했다.

밤이면 독하기로 유명한 창신동 깡패들이 휘파람을 불며 몰려다녔고, 부모가 일 나간 빈집에서 혼자 놀다 떨어져 죽은 아이의 혼령 같은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너나없이 새벽부터 밤까지 모두 열심히 일했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직장 일을 끝내고도 일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들은 점점 더 가난해지는 것 같았다.

반짝이는 것은 모두 별이다

그 시절 내 유일한 즐거움은 아파트 베란다에서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는 거였다. 서울 시내의 불빛이 한눈에 들어왔다. 서울의 눈물처럼 반짝이던 불빛들. 우리에게 별은 하늘에서 반짝이는 것이 아니었다. 반짝이는 것이 별이라면, 저 아래 도심의 불빛, 저 불빛이 우리에겐 '별'이었다. 그래서 산동네 아이들에겐 저 도심 속으로 내려가는 것이 진정한 '별'이 되는 거였다.

그런 어느 날 한동안 소식을 끊었던 아버지가 낯선 아줌마와 함께 어두운 고리 같은 복도를 걸어 들어왔다. 엄마가 이불 홑청을 막 뒤집어 캐시밀론 솜이 플라타너스 씨앗처럼 방안 가득 날리고 있던 때였다. 엄마의 얼굴이 운석처럼 구겨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나는 빨리 별이 되고 싶었다. 어서 빨리 저 도심에서 반짝이고 싶었다. 그러나 현관에 매달아놓은 알전구에서는 허약한 필라멘트가 끊어졌다 붙었다 를 반복하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

 

 

* 조연희 시인은 추계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시산맥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현재 영상기획 및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빅시스템즈 기획실장.